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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작가의 말

단편소설
바나나, 요거트
블랭크
수신 차단
안전지대
에스프레소, 판나코타
제로섬, 너머


중편소설
문원 씨의 생각

작품 해설
일상의 구체성으로 읽어 낸 우리 시대_장두영(문학평론가)

저자 소개 1

??월간문학??소설 등단 ??순수문학?? 시 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서울문학관홀 회원 시집 ??새벽 미시령??출간 공저 ??2024신예작가?? 선정, ??한국대표서정산문선6??, ??소설카름??

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10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56쪽 | 140*210*20mm
ISBN13
9791124052372

책 속으로

바나나 주스를 못 먹는 대신 요거트를 발견했다. 내로라하는 유명 우유 회사에서 나온 요거트가 상상할 수 없는, 예년의 삼분의 일 정도 저렴한 가격에 나와 있었다. 저출산의 여파로 주요 고객인 어린이집과 초등학교에서 우유 소비가 현저하게 줄어들자, 우유의 주재료인 요거트 가격이 대폭 저렴해졌다. 우유 회사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결과였다. 요거트에 곁들여 먹을 블루베리는 김치 냉장고 냉동고에 언제나 충분히 준비되어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손이 몇 번이나 갔다가 장바구니에 하염없이 넣어놓기만 하고 결제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 귀한 것을 사시사철 걱정 없이 먹고 있다. 소정의 육 남매 중 큰 오빠가 유일하게 시골에 남아 농사를 짓고 있는데 몇 년 전부터 벼농사를 줄이고 블루베리 농사를 시작했다. 식단의 변화로 쌀 소비가 줄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이었다. 농고를 졸업한 큰 조카가 대학 대신 일찌감치 농사일로 접어든 덕이다. 십여 년에 걸쳐서 벼농사 이외에 여러 종류의 작물 재배를 시도했지만,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고 실패만 거듭하더니 다행히 블루베리 재배는 성공해 수확한 지 4년 차에 접어들고 있다. 그것마저도 작황이 지나치게 좋을 때나 수입농산물이 대량으로 들어올 때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때도 있긴 하지만 열대작물보다 충격이 덜 하다 했다. 우리나라도 기온이 해마다 올라가 여름이 점점 길어지자 열대나 아열대 지방 과일을 너도나도 재배하기 시작해 매년 가격이 내려가고 있다. 그렇다고 수입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수입품과의 가격 경쟁에서 당연히 취약할 수밖에 없단다. 바나나 가격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폭 저렴해지는 이유도 매년 재배 농가가 늘어나는 데도 한몫했다. 덕분에 소정은 바나나와 블루베리를 원 없이 먹고 있다. -「바나나 요거트」 중에서

그런데 윤주는 중학교 때부터 국어를 곧잘 했다. 과학이나 문학도서 읽기 과제를 주면 착실히 해 온 덕에 이해력과 독해력이 좀 부족해도 100점을 놓치지 않았다. 윤주 때문에 입회한 학생들이 몇 있었다. 내신과 모의고사 등급이 오르고 고3이 되자 모의고사 1등급을 받기 위해 옆 동네 강남으로 학원을 옮기긴 했지만 말이다.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반복되는 일이라 민경은 그러려니 초연한 척 마음을 추스르곤 했다. 입사 초에는 배반감으로 억울하고 분해서 밤잠을 설쳤는데 이제는 등급 올린 것만으로 자존심은 회복했다 생각한다. 그래야 속이 편하고 살아갈 수가 있다. 그렇게 고3 수업을 부처님 반 토막이 되어 도 닦는 마음으로 살아내고 있다.

“수시로 가야 해서 이번 기말고사가 정말 중요하거든요. 중간고사에서 두 개나 틀려서 아무래도 기말을 100점 맞아야 1등급 가까스로 맞출 것 같아요.”
“두 개면 3등급에서 대기하고 있겠네. 중간고사 때 한두 개 틀린 애들이 몰려 있어 2등급이 없는 걸로 아는데.”
“네 맞아요, 그래서 급하게… 국어를 세 과목 신청했거든요. 독서, 문학, 언매까지.”
“왜 그렇게 많이 신청했어요?”
“사실은 모의고사 수학이 불안해서요. 미적을 선택했는데 매번 1등급 컷에 걸쳐 있어요. S대 지역균형선발 받은 친구가 의대 간다고 포기하는 바람에 저한테까지 왔어요. 최저는 지금처럼만 하면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블랭크」 중에서

“괜찮아요, 다른 사람들은 통화 다 하고 숙소에서 푹 쉬고 있어요.”
“그렇구나, 오래 통화해도 되겠네.”
“아직 뒤에 사람이 없으니까 근데 사람들 있으면 끊어야 해요.”
“그래, 친구들은, 훈련소 친구들은 어찌 됐는데?”
“훈련소 친구들은 다 흩어졌어요. 보직 받아서 후반기 교육받으러 각자 흩어졌어요. 대전 계룡대로 전라도로 각자 보직 받은 분야로 다시 교육받으러 여러 곳으로 흩어졌어요.”
“아들도 받겠지, 강 철책 근무만 아니면 좋겠어.”
“강 철책 근무는 이미 뽑아서 갔고 남은 게 보충 중대하고 수색대, 보병인데, 난 수색대 지원하고 싶은데요. 해병대도 UDT도 결국 못 갔잖아요.”

몇 년 전 드라마의 영향으로 방송과 유튜브에서 UDT 특수부대원들의 활약상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수현은 UDT SEAL에 지원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 관련 체육관까지 찾아갔었다. 관장은 실제 UDT 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전역한 사람으로 수현을 보자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체육관에서 시험에 대비해 훈련받은 사람들이 해마다 좋은 성적으로 입대했다는 결과물까지 제시하며 합숙 훈련에 임할 것을 권했다. 수현처럼 신체적으로 허약한 친구도 지원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만 있다면 몸과 체격 조건은 훈련을 통해서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단다. 하드웨어격인 몸은 투철한 정신력과 함께 혹독한 체력 테스트를 통해 정식 UDT 대원이 된다 했다. 1차 체력검증이 끝나면 소프트웨어적인 조건 또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는데 사회에서는 많은 시간과 상당한 경제적 요건에 부합하는 다양한 종류의 자격증을 국가에서 지원하여 무료로 취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전역을 하면 관련 분야로 취업이 가능하다며 진지하게 긍정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강건한 체력을 원했던 수현의 욕망과 달리 허약한 자신의 몸 상태를 바꿔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 몸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수현의 당면 목표로 진짜 사람 구실 제대로 하려면 몸을 강건하게 만들어야 한다며 합숙을 해서라도 반드시 입대하겠다고 굳은 의지를 보였던 게 작년이었다. -「수신 차단」 중에서

센터에 도착하니 문 앞에 배달 로봇이 기다리고 있다가 예약한 메뉴를 유리와 루나에게 각각 하나씩 건넸다. 임무 완수 메시지를 깜박인 후 엘리베이터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어 이동하자, 유리는 지문을 인식해 센터 문을 열었다. 자동 센서기 앞에서 다시 한번 소독하고 이상 없다는 메시지가 곧바로 뜨자, 안에서 문을 잠그고 휴게실로 직진했다. 2미터 정도 되는 탁자에 마주 보고 음식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유리는 에피타이저로 양송이 스프와 단백질 칼륨 루테인 지아잔틴 성분이 풍부한 신선한 루꼴라를 곁들인 관자 한치 샐러드를 오른쪽에 놓았다. 본 코스로 새우, 소라, 홍합, 문어, 모시 바지락을 넣어 만든 고소하고 담백한 먹물 파스타와 꽃등심 스테이크를 중앙에 놓았다. 디저트로 부드러운 티라미슈와 진한 향의 에스프레소를 왼쪽에 세팅했다. 루나는 에피타이저로 올리브 오일과 빵을 자신의 앞에 놓았다. 본 코스인 암컷 숭어알을 소금에 절여 압축시켜 만든 이탈리아산 어란에 고급 무염 버터와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로 만든 스페셜 어란 파스타와 프리미엄 바비큐 스테이크를 에피타이저 뒤로 놓았다. 모짜렐라 치즈로 드레싱한 토마토가 곁들인 샐러드를 스테이크 옆에 놓고 크림 완자와 망고 판나코타 디저트는 스테이크 뒤로 놓았다. -「에스프레소, 판나코타」 중에서

생아는 핸드폰 알람을 듣고 잠에서 깨자마자 뻑뻑한 눈을 부드럽게 풀었다. 어제보다 단단한 사금이 검지를 타고 내리자, 재빨리 보석함에 담았다. 주방으로 가 냉장고에서 골드 형 주스 두 개와 빵에 넣을 잼을 꺼내 식탁에 앉았다. 빵에 잼을 듬뿍 바르고 있는데 술이 덜 깬 얼굴로 비트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들이켰다.
“일찍 일어났네. 어제 도대체 몇 시에 들어온 거야, 당신?”
“미안, 중간에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있어야지. 일찍 자지 그랬어.”
“그러게 자게 내버려 둬야 말이지. 밤새 오르락내리락 심장을 열두 번도 더 강타하는데 잠을 어떻게 자. 장 일부 마감되는 거 보고 잠깐 눈을 붙였는데 그때까지 당신 들어오는 거 못 들었는데.”
“당신 잘 줄 알고 살짝 들어왔지. 이제 초월할 때도 됐잖아 당신. 주스와 잼이 효자 노릇 톡톡히 하고 있는데.”
“본업이 잘 돼야지, 부업이 뜨면 좀 그렇지. 여전히 동굴 속에서 파란 촛불 켜고 기도하고 있는데.”
“하긴 아무리 말썽 피워도 내 새끼만 못하지. 들어온 자식이 효자 노릇 해도 성에 안 차니 큰일이다.”
생아는 비트가 식탁 맞은편에 앉자, 빵과 주스를 내밀었다.
“생큐, 역시 우리 주스 맛은 타의 추종을 불허해. 환상적이야, 갈수록 오묘하고 깊은 맛이 신비롭단 말이야.”
“당연하지, 우리들의 시간과 영혼을 갈아 만든 작품인데.”
넓게 펼쳐진 주방 창밖으로 안개가 서서히 걷히자, 포도농장의 포도송이가 미명의 햇살 아래 투명한 보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제로섬, 너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시인이기도 한 방안나 작가가 첫 소설집 『제로섬, 너머』를 펴냈다. 단편소설 6편과 중편소설 1편을 묶은 이번 소설집은 우리 시대의 첨예한 문제들을 인물들의 구체적인 삶 속으로 끌어들인다. 저출산과 기후변화에서 입시, 군대, 결혼, 투자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일상과 사회의 구조가 맞닿는 자리에서 인간이 무엇을 견디며 살아가는지 묻는다.

『제로섬, 너머』에서 사회적 문제는 이야기의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인물의 선택을 제약하고, 관계를 흔들며, 미래를 바라보는 방식에 스며든다. 작가는 이러한 현실을 인물들이 몸으로 겪는 삶을 통해 드러낸다. 일곱 편의 소설에 담긴 삶은 현실의 단순한 재현을 넘어, 삶을 지배하는 질서와 그 질서 안에 온전히 포함되지 못한 인간의 마음을 다양하고도 깊게 비춘다. 그 중심에는 어려움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향하는 작가의 시선이 있다. 작가는 인물의 처지를 성급하게 판단하거나 고통을 손쉽게 위로하는 대신, 그들이 감당하는 하루와 마음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인다. 시인이기도 한 작가의 감수성은 사회적 현실을 향한 문제의식과 만나, 개인의 내면과 그를 둘러싼 세계를 함께 살피는 서사로 이어진다.

「바나나 요거트」의 배경은 로봇이 가사와 배송을 돕는 가까운 미래이다. 그러나 작가의 관심은 첨단기술이 아니라 평범한 어느 가정의 식탁으로 향하고 있다. 사소하다고 취급되어 온 가사 노동의 경험이 여기서는 사회 변화를 예측되는 핵심 도구로 활용된다. 디스토피아적인 전망을 내세운 SF가 이미 장르적 관습으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도, 이 작품은 다가올 미래를 한 가지 색으로 칠하지 않는 미덕이 있다.

「블랭크」는 화자인 학원 강사 민경을 통해 독자들을 강남권 입시 풍경에 깊이 함몰되게 만든다. 작가의 치밀한 현장 관찰과 취재 구체성의 깊이가 묘사에 머무르지 않고, 곧 작품의 핵심 주제인 오늘날 입시 교육의 어두운 현실과 매끄럽게 연결된다. 제목과 소재, 서사 구조와 결말이 하나의 완결된 이미지로 단단히 조여가는 작가의 솜씨가 날렵하게 나타나고 있다.

「수신 차단」에서 아들 수현을 군대에 보낸 엄마 정애의 손에서는 휴대폰이 한시도 떠나지 못한다. 병영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이 작품의 중심은 현실 폭로나 고발에 있지 않다. 아들의 고통을 전화라는 좁은 통로로만 전해 들어야 하는 부모의 무력감, 즉 걱정의 크기와 개입 가능성이 어긋나는 상태야말로 이 소설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정서이다.

「안전지대」는 선명한 공간과 계급의 대칭 구도에 세워진 작품이다. 하지만 작가는 부유층 거주지 선유동 저택에서 살고 있는 품종묘 고양이와, 구선동 옥탑방에 사는 선혜 주변의 길 고양이의 구도를 도식적인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는다. 거창한 생명 사랑을 설파하지 않으면서도 결말부에 고양이를 집 안으로 들이는 마지막 동작 하나로 ‘안전지대’라는 작품 제목의 의미가 완성되는 작품이다.

「에스프레소, 판나코타」는 시대를 들여다보는 창으로서의 음식 이야기이다. 이 작품에서는 감각적으로 풍요로운 음식이 인물의 위태로운 현실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시절 친구 결혼식에 참석한 유리와 루나는 예식장을 나와 이탈리안 코스와 디저트를 앞두고 결혼과 신혼집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같은 세대, 오래된 친구, 유사한 성실성을 지녔음에도 두 사람이 밟고 선 안전망의 두께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이 작품의 미덕은 이 격차를 어느 한쪽 개인의 결함으로 치부하지 않는 데에 있다.

표제작인 「제로섬, 너머」는 이 소설집의 사실적 생활 관찰에 기반한 다른 수록 작품들과는 달리 환상성을 서사의 중심 장치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환상은 현실의 특정한 상황을 더욱 깊이 있게 드러내기 위한 확대경으로 기능한다. 제목의 ‘너머’는 단순한 극복이나 희망으로 읽히지 않는다. 인물들은 제로의 섬 덫에서 벗어났다고 믿었으나, 사실상은 더 크고 정교한 자본의 손익 구조 안으로 편입되었을 뿐이라는 구조적 아이러니를 표현하고 있다.

중편소설 「문원씨의 생각」은 죽음과 노년, 그리고 가족 돌봄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다룬다. 죽음을 앞둔 한 노인의 시선을 통해 가족이라고는 복잡하고도 애증이 얽힌 관계망을 건조하면서도 예리하게 해부한다. 작가는 거대한 담론이나 악지스러운 감동을 도모하는 통속적인 가족 서사 공식을 거부한다. 그 대신 지극히 사소하고 구체적인 일상의 감각과 기억의 조각들을 통 해 삶의 진실을 길어 올린다.

이처럼 이 소설집이 주목하는 것은 제도와 통념의 언어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사람의 마음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을 따라가며 겪는 불안, 그 기준 밖으로 밀려났을 때의 고독, 타인에게 쉽게 말할 수 없는 상처와 바람이 인물들의 삶에 겹친다. 방안나 작가는 이들을 어떤 문제를 설명하기 위한 사례로 다루지 않는다. 저마다의 사정과 감정을 지닌 한 사람으로 바라보며, 그 삶의 안쪽으로 다가간다.

‘제로섬, 너머’라는 제목은 누군가의 이익이 다른 누군가의 손실로 귀결되는 세계의 셈법을 돌아보게 한다. 경쟁과 효율의 기준만으로 한 사람의 삶을 헤아릴 수 있는가. 승패의 구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을 우리는 얼마나 들여다보고 있는가. 이 소설집은 그러한 물음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는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한다.

방안나 작가의 첫 소설집 「제로섬, 너머」는 우리 시대의 문제를 응시하면서도 끝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이야기이다. 삶을 지배하는 질서의 힘과 그 질서로 다 설명되지 않는 마음을 함께 담아낸 일곱 편의 소설은, 독자에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곁의 사람들을 새롭게 바라볼 계기를 건넨다.

*

작가의 말

컴퓨터를 열면 나보다 먼저 도착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초롱초롱 기다리는 수많은 그대들
그대들이 있어 퇴색해 버린 지난 시간을 돋을새김할 수 있었고
지난하고 고단한 현실을 과장하지 않고
안개 속에 가려진 미혹의 시간을 만날 수 있었다.

그대들이 길목마다 청사초롱 들고 나침반이 되어
곧게 서 있었기에 두려움 없이 걸을 수 있었다.
날카로운 눈과 옳은 소리만 듣는 그대들의 귀가 있었기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웅덩이에 빠지지 않았다.

한꺼번에 몰려 오지 말고 천천히 차례 지켜 오기를
급하다고 서로 밀치고 달려와 쏟아 놓으면
가시덤불처럼 엉켜 시간이 지체되므로
오늘, 지금 이야기부터 또 시작하자.

추천평

방안나 작가의 소설집 『제로섬, 너머』에서는 저출산, 기후변화, 입시, 군대, 결혼, 투자, 간병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문제를 인물의 생활과 선택 속에 육화한다. 이때 인물들의 일상은 현실의 단순한 재현을 넘어, 삶을 지배하는 질서와 그 질서에 포섭되지 않는 인간의 마음을 함께 비추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 소설은 누군가의 이익이 다른 누군가의 상실로 환산되는 세계에서, 관계의 의미와 공존의 가능성을 묻는다. ‘제로섬, 너머’라는 제목은 그러한 문학적 탐색의 방향을 함축한다. 󰡔제로섬, 너머󰡕는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는 상상력으로 경쟁의 문법을 되묻는 우리 시대 삶의 지형도이다. - 김호운 (소설가·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밥을 먹다가 멈춘 숟가락, 대화 끝에 남은 침묵, 돌아올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에는 저마다 말하지 못한 사정이 있다. 방안나의 소설은 그 사정에 귀를 기울인다. 『제로섬, 너머』를 읽으며 눈여겨보게 되는 것은 삶을 이어 가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먹고 일하고 기다리는 익숙한 행동 속에서도 각자의 두려움과 바람은 다르게 움직인다. 소설은 그 차이를 따라가며 우리가 타인의 삶을 얼마나 서둘러 이해했다고 믿어 왔는지 돌아보게 한다. 책장을 덮은 뒤에도 인물들의 하루는 계속될 터. 그 하루를 조금 더 헤아리고 싶어지는 마음이 이 소설집에서 느껴지는 여운이다. - 최성배 (소설가·한국문인협회 이사)
‘너머’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독자들은 소설 속 제로섬과 같은 온갖 사건과 갈등의 플롯이 끝난 자리에 서서 그 이후에 펼쳐질 일들을 상상하게 된다. 우리 시대의 첨예한 균열의 지점들을 일상의 디테일과 예민한 감각으로 포착해 낸 작가의 시선은 냉혹한 현실의 무게를 직시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온기를 놓지 않는 서사로 이어지며 오래도록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 장두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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