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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보리쌀 눈
10 파릉 12 겨울 같은 봄 14 시 값 16 육수 빛 달 푸짐하게 안겨듭니다 18 헤우 20 억새 투막집 22 단말마 24 가자미국 26 흑임자죽 28 닭 파는 노인 30 메기 33 불매가 34 등 36 Bin Jib 39 보릿돌 해녀 42 작천정 그 여자 44 까추 46 와탕카 48 허들링 51 우는 발 52 히옌 메콩으로 카톡 보내다 54 세이킬로스 비문 56 오늘을 끓이다 58 이바구꾼 바위 61 열아홉 62 채유리 달력 64 다시래기 66 소드래 68 석거 70 삼짇날 72 멸치고래 다솜하다 74 큰 계곡 내, 봄볕 입말한다 76 고슬 78 블루문 80 으레 그러려니 83 여름 84 은빛 여우 86 새벽에 진달래 우는 소릴 들었다 88 야생마 90 심알잇기 92 속눈썹을 붙이며 94 힐베르트 카페 96 우수 98 Heartbreak Hotel 100 호박죽을 끓여요 102 전복 목걸이 104 철학책 봄꽃 106 기억의 지속 109 아이스 블루 해설 사라지는 것들의 오래된 생명_최형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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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돌 해녀
해루질한 망사리 가득 굵은 살구지* 눈가에 오도독오도독 씹히는 오월 한나절 간간하다. 바다 밑을 매봐야 세상 밭도 일군다고 한 마장 깊은 물살 드나들었다. 애살스럽게 물질해 곱은 손가락으로 차린 뒷심 좋은 밥상과 새칩게 키운 소라 속살 같은 자식 자랑엔 늘푼수라. 물숨을 참는다는 건, 입술 부르튼 생을 오래 자맥질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이랑 매면서 세상 부력에 홀로 떠다닐 수 없어 몸을 낮추는 납추를 매단다. 받침 없어도 부를 수 있는 바다지만 다가가기엔 막막한 이녁이라서 자기 숨만큼만 잡았다는 고동회를 건네는 손등엔 검파래 가득 피었다. 성님 아우 두엇은 작년 이맘때 썰물 같은 남편 따라 가버렸고 딸네 다니러 간 방어진 댁도 소식 깜깜이라. 주인 잃은 두렁박만 파도에 넘실댄다. 눈물 바람 비린 파도 일렁이지만 바다 밭이라 가차 없이 매몰차게 몰아붙이면 보리 까시래기처럼 까끌까끌한 우리네 생도 사흘 잔잔하면 나흘 출렁인다. 뒷걸음질 없이 오롯이 뛰어들기만 했던 서른여섯에 생때같은 남편 떠나보낸 뒤 모자반 줄기보다 질긴 목숨 줄 근근 건사하며 살아왔다. 어야든동 바다 농사 지을라카믄 뼈마디 녹아도 몰밭**에서 놀아야 하는 기라. 검푸른 파도 아래 늙은 거죽만 남은 목소리 물 벽에 부딪혀 돌아 나온다. 해종일 물가를 서성이던 갯메꽃 머리꼭지 위로 햇다시마 같은 초여름이 옆구리 매매 감으면 따신 봄볕 파스 한 장 붙이고 헤진 무르팍 야무지게 당겨 세운다. 평생 깐물***과 내외하며 살았고 죽어서도 깐물에서 어정거릴 그녀 얼굴 저 너머로 청각 빛 숨비소리 아득하게 피어난다. * 고동의 경상도 방언 ** 해초밭의 경북 방언 *** 바다의 경북 방언 호박죽을 끓여요 십일월쯤 서른 살짜리 달을 만났습니다 그는 혼자라고 아니 혼자가 될 거라고 말했지요 기타를 좋아한 그는 후스마 방에 외짝 장롱 그릇 몇 개 그의 노래 듣고 싶지 않는 여자와 살았다 하네요 흰옷을 좋아한 남자 락스도 좋아했다죠 향 락스 같은 그녀 세고비아 음률이 싫어 떠났고 한동안 남잔 락스에 옷을 담구지 않았답니다 그 남자 엄마도 어떤 이를 따라갔고 그때부터 달을 좋아했다 하네요 그 남자 시계는 멈췄고 처음 만났던 다리에서 달을 건네주며 함께 먹자고 보챘습니다 달이 아니라 물고기라 했지만 난 믿지도 먹지도 않았죠 달은 달이니깐요 남자는 다리 아래로 또 다른 달을 찾아 뛰어들었습니다 달은 삼키지 못하고 겨우 시계만 건내주고는 초침이 분침과 만날 즈음 그는 어디로 갔습니다 난 달을 먹기로 하고 풋 서리 맞은 호박 같은 달을 끓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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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내 생의 위치와 물리량 동시에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불확정성에 기대 앞으로 나아간다 AI도 내 파이π 끝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살면서 신세 지지 않았던 건 하나도 없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경의를 보낸다 내 제어장치였고 성장동력이었고 정신세계 확장을 함께해 준 이들 다시 태어나도 오직 그들만 보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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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왜 계속되어야 하는가
그녀의 시에서 희망은 전면에 나설 만큼 크지 않다. 삶이 반드시 좋아질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고, 떠난 사람이 돌아올 것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병든 몸이 기적처럼 회복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그런 낙관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대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삶 자체에 대한 신뢰다. 신뢰는 미래를 향한 기대가 아니라, 오늘을 견디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다. 그녀는 인간이 특별히 강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조금씩 강해진다고 믿는 시인이다. 상실은 인간을 무너뜨리지만 동시에 인간을 더 깊게 만든다. 슬픔은 삶을 멈추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삶을 더 오래 바라보게 만든다. 그녀의 작품에서 고통은 인간을 파괴하는 힘이 아니라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 시간으로 바뀐다. 그래서 이 시집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 삶을 긍정하지 않지만, 인간을 긍정한다. 이 둘은 전혀 다른 문제다. 삶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세상은 여전히 부조리하다. 사랑하는 사람은 떠나고, 기억은 희미해지며, 누구도 시간 앞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이채율 시인이 믿는 것은 그런 세상 속에서도 끝내 살아남는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단어는 ‘희망’이 아니라 ‘지속’이다. - 최형만 (해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