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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책머리에 - 나는 실패했다 …… 7 프롤로그 - 부모가 통 모르고 있는 자식 …… 17 첫째 가름 아버지들의 눈물 …… 29 둘째 가름 세 가지 독 …… 41 첫 번째 독 - 과보호 …… 45 두 번째 독 - 잔소리 …… 62 세 번째 독 - 체벌 …… 69 세 가지 독, 그 결과 …… 75 셋째 가름 세 가지 비결 …… 83 첫 번째 비결 - 사랑 …… 86 두 번째 비결 - 방목 …… 96 세 번째 비결 - 칭찬 …… 110 넷째 가름 탈의 근원, 말 …… 121 말은 오해되고 와전된다 …… 123 논리의 함정 …… 130 반성문 …… 133 아이들의 거짓말 …… 136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 간다 …… 138 비폭력 대화 기술 …… 145 부모 자식 사이 대화는 많지 않다 …… 148 다섯째 가름 공부, 응 그래, 공부 …… 153 어머니들의 열성 …… 163 지능과 창의력과 환경 …… 172 명문대에 들어갈 수 있는 비결 …… 179 신바람 나는 모험 - 책 읽기 …… 206 짜르지 마세요! …… 226 학원, 그 만성 종양 …… 232 촌지에 대한 짧은 명상 …… 251 노느라 바쁜 아이들 …… 257 여섯째 가름 허다한 시행착오들 …… 263 아버지의 굳은 얼굴 …… 265 자식들의 독립 선언 …… 270 이미 쌓아 올린 장벽 …… 275 이중 잣대 …… 283 가난 연습 …… 286 용돈을 얼마나 줄 것인가 …… 295 어머니의 위상 …… 299 자식들 우애는 부모에게 달려 있다 …… 304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 …… 311 관심 - 사랑과 간섭 사이 …… 317 부모는 거름이다 …… 320 일곱째 가름 나는 왜 자식 농사에 실패했다고 생각하는가 …… 331 내 자식들의 현재 …… 332 부모와 자식들의 정서적 거리 …… 345 우리 집 보물 …… 356 에필로그 - 미진감 …… 3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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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에 따라 다르지만, 우리나라는 일본에 비해 고소 사건이 인구 비례 44곱절에서 250곱절까지 많다. 모두 언론의 보도이거나 전문 연구자들이 제시하는 자료이므로 믿지 않을 수도 없다. 분쟁이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책의 주제인 부모 자식 간, 이렇게 볼 경우, 역시 마찬가지일 것 같다. 부모 자식 간 갈등, 분쟁, 이것이 일본 사회보다 훨씬 더 많다. 그런 쪽 연구를 찾아본 적이 없어서 나 자신의 체험적 판단을 제시할 수밖에 없지만, 나의 결론은 바로 헬리콥터 부모와 캥거루족 자식이다.
모든 수고를 다 바쳐 자식을 캥거루 새끼로 키워 내고야 마는 부모들은 자신들이 바친 수고에 대한 반대급부를 바란다. ①자식들이 자라는 동안에는 부모에게 복종하여 부모의 기대를 채워 줄 것을 기대하고, ②자신들이 나이 든 다음에는 자식들에게 의지하려 드는 게 그것이다. 그런데 ①과 ②양쪽 모두 이루어질 수 없다. 갈등과 분쟁 이유만 된다. 서로가 서로를 구속한다. ②쪽으로 잠깐만 더 눈을 돌려 보기로 한다면, 차츰 더 이기적이 되어 가는 추세에 따라 앞으로 더욱더 불가능한 기대가 될 것이다.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다. 정신적인 면에서, 이를테면 부모가 자식에게 약간의 위안이나마 기대한다 해도 그것이 망발이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①과 ②양쪽 모두 아예 마음도 먹지 않아야 하고, 자식을 정서적 불구로 만드는 것 이외에는 백해무익한 헬리콥터 부모 노릇도 그만두어야 한다. --- pp.57~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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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높이’라는 표현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고 누구로부터였는지 잘 모르겠는데,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은 위대한 개념이다. 비단 부모 자식 관계만이 아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경험하게 되는 갈등의 상당 부분은 눈높이를 맞추는 평등 구현 노력의 실패로부터 비롯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인간관계에서 아주 유용한 지혜가 있는데, 그것은 곧 상대방 눈높이에 나를 맞춰 보는 평등 구현 노력을 뜻한다. 이 노력을 통해 평등한 입장에서 상대방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쪽이 되기만 해도 갈등의 쌍방이 되어 서로 고통당하는 경우는 상당 부분 피할 수 있게 된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더욱더 그렇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의 대부분은 부모가 자식의 눈높이를 무시한 채, 자기 눈높이에서 자식을 내려다보며 명령하고 억압하고, 마침내는 폭력 행사도 마다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눈높이를 맞춰 같은 눈높이에서 동년배 친구처럼 평등한 입장이 될 경우, 그 명령도, 그 억압도, 그 폭력도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물론 내가 뭐랬니? 내가 그랬잖아! 거봐, 못써, 안 돼, 이 멍텅구리 같은 등의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악성 불평등 언어도 발사될 수 없다. 곧 갈등의 근원이 제거된다. 평등한 상태에선 위와 아래가 구분되는 수직 상태가 아니라 눈높이를 함께하는 수평 상태에서 만나게 된다. 수직 상태에서는 위도, 아래도 사실은 불편하다. 위는 아래로부터, 아래는 위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수직이다. 관계가 삭막해질 수밖에 없다. 노장청老壯靑이 함께 어우러져 즐길 수 있는 대동 세계는 수평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평등은 모든 인간관계의 이상적理想的 상태다. 이런 상태가 되어야만 우리는 저 갑갑한 만성 주눅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다. 모든 인간관계의 이상적 상태인 평등한 친구가 되는 이러한 노력도 물론 모든 면모에서 유리한 입지에 있는 부모 쪽의 관용과 기교와 적극성 없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관계의 주도권을 언제나 부모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과 눈높이가 어긋나지 않도록, 그래서 언제나 대등한 친교 관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할 때 부모 자식 사이 갈등은 현저히 줄어든다. 그리고 이 평등은 바로 진정한 사랑이 가능한 절대적 전제가 된다. --- pp.8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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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방목을 찬양하고 있는 셈인데, 그러나 그 방목은 물론 방종을 뜻하지 않는다. 자율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만큼 인간은 거룩하지도 않고, 심지가 굳지도 않다. 방목이 방종으로 되지 않도록, 적절한 금 긋기가 필요하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지만, ‘Fine Country’ 싱가포르는 ‘Fine Country’이다. 앞의 ‘Fine’은 ‘좋은’이라는 뜻의 형용사이고, 뒤의 ‘Fine’은 ‘벌금’이라는 뜻의 명사다. 싱가포르의 관광 상품 가운데 하나인 ‘벌금 셔츠’를 보신 분들도 계실 듯한데, 싱가포르는 그야말로 벌금 천국이다. 구제 불능이라 하여 말레이시아로부터 쫓겨나, 1965년 어쩔 수 없이 독립해야 했던 싱가포르가 단시간에 말레이시아를 훨씬 더 능가하는 부자 나라가 된 것은 바로 그 ‘벌금’ 제도를 포함한 철두철미한 타율 때문이었다. 싱가포르 초기에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소변을 보는 사람들이 흔했다. 그것도 벌금으로 바로잡았다. 그 나라에서 벌금의 효용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을 것 같다. 대형 매장의 카트에 코인 하나 넣도록 되어 있는 것, 그 시작은 프랑스의 어느 매장이었다. 아무리 간곡히 부탁해도 카트는 마구 흐트러지기만 했다. 매장 직원 하나가 코인 아이디어를 냈다. 그 뒤부터는 카트 정리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이 단순한 아이디어는 세계 모든 나라로 퍼져 나갔다. 내 어린 시절, 산은 모두 벌거숭이 민둥산이었다. 큰비가 내리면 강에는 황톳물이 넘실거렸다. 초가지붕에 돼지가 얹혀 떠내려가는 풍경을 본 적도 있다. 정부에서는 강압적 방법으로 모든 아궁이를 틀어막은 다음, 나무 대신 연탄을 연료 삼도록 했고, 그제야 비로소 산에서는 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 적정량의 타율이 없으면 사회 체제는 유지될 수 없다. 그러나 그 타율도 적정량을 넘어서면, 전제 체제가 되고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문제는 적정량인데, 그 기준이 쉽지 않다. 치자治者는 고민할 수밖에 없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자식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적정량의 타율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 기준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다. 저마다 개성이 다르기 때문이고, 부모와 자식 사이 관계 양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적정량의 타율은 부모가 정할 수밖에 없는데, 타율은 더 적을수록, 자율은 더 많을수록 좋다. 타율이 적을수록 인간은 더 자율적이 된다(소화제 효과). 자율은 자라는 생명에게 최대의 덕목일 수 있다. 다 자란 뒤에도 마찬가지다. 제 몸 하나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어른들이 뜻밖으로 많다. 헬리콥터 부모와 캥거루 자식이 대세가 되어 갈수록 더욱더 많아지고 있다. --- pp.101~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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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수많은 부정적 문화 현상들 가운데, 모든 국민들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은 역시 자녀 교육 문제일 것이다. 어느 가정도 자녀 교육 문제에서만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 시점에서 《유순하의 생각》 세 번째로 출간된 『부모가 바뀌면 자식이 산다』는 이런 교육 현실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우리나라가 결코 좋은 나라가 될 수 없다는 절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 정말 좋은 나라를 지향하는 《유순하의 생각》 프로젝트는 부모와 자식, 아내와 남편이 갈등할 수밖에 없도록 함으로써 사회 구조마저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는 가족 문화, 성한 구석이 아예 없도록 사회 전체를 알뜰하게 바수뜨려 가고 있는 정치나 기업 문화의 고질적 병폐부터,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이 낮은 젊은이들을 양산해 내고 있는 황폐한 청년 문화, 온 국민을 온통 미신의 늪으로 몰아가고 있는 종교의 망국적 폐해까지, 우리 사회 각 분야를 철두철미하게 분석, 비판하고 있다. 세 번째로 출간된 『부모가 바뀌면 자식이 산다』는 교육 망국론에서 비롯된 공교육과 사교육의 폐해부터 체계적, 조직적으로 망가지고 있는 아이들의 교육 환경과, 부모들의 잘못된 자녀 교육의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우리 부모들의 대표적 관심사는 자식들 공부다. 공부 닦달에 넌덜머리를 내지 않는 자식은 없다. 자식들 대부분은 당연히 반발한다. 그런데도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공부는 포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포기할 경우, 자기 자식이 다른 집 자식들에 비해 빠지게 될는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절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룬 것이 육아 환경은 세계 최악이고,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우리 아이들’이다. 대학의 ‘등급’과 ‘행복’에 어떤 인과 관계가 있는가? 일류 대학을 나온 사람이 일류 행복을 누리는가? 오래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라는 표현이 유행했었다. ‘행복은 대학 등급 순이 아니다.’ 일류 대학을 나올 경우, 이른바 ‘프리미엄’이라는 것 때문에 현실적으로 약간 유리한 점은 있다. 그러나 약간 유리한 그것은 ‘행복’과는 관계없다. 그보다는 좀 빠지는 대학을 나왔다 할지라도 더 양질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경우는 아주 흔하다. 『부모가 바뀌면 자식이 산다』는 전체 일곱째 가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가름에서는 부모 자식 간의 정서적 거리를 말하고 있다. 부모 자식 관계에서는 접촉 면적이 넓고 접촉 기회가 많을수록 관계가 더 돈독해질 수도 있지만, 사실은 갈등이 더 많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관계의 성패가 시혜 의식과 수혜의식의 균형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시혜는 준 것이고, 수혜는 받은 것이다. 자기 자식에게 모든 것을 바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자식들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는 게 된다. 어느 특정한 가정의 자식만은 아니다. 인간의 욕망은 이처럼 끝이 없다. 둘째 가름은 부모들의 과보호를 말하고 있다. 우리 부모들의 과보호는 이미 도를 넘어섰다. 아이들에게 자율성을 주기는커녕 그나마 있는 것마저 빼앗아 버린다. 그래서 부모들은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깨질세라, 겨울이면 추울세라, 여름이면 더울세라 노심초사한다. 자신이 보호하지 않으면 그 자식들이 제 꼴을 갖춰 낼 수 없다는 강박 관념이라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을 먹이려 하고, 입히려 하고, 재우려 하고, 깨우려 하고, 가르치려 하고, 좋은 학교에 보내려 하고,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식을 사실상 정서적 불구로 만드는 것인데도, 부모들은 그 익애에 죽어라 매달린다. 셋째 가름은 부모 자식 간의 행복한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수적임을 말하고 있다. 모든 자식은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를 줄기차게 원한다. 모든 인간관계 실패는 사랑의 결핍으로부터 비롯된다. 모든 관계에서 사랑한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표현되어야 하고 전해져야 한다. 표현되지 않고 전해지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모든 자식은 자기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를 줄기차게 원한다. 그러나 부모는 무한 베풂이 곧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의 대부분은 부모가 자식의 눈높이를 무시한 채, 자기 눈높이에서 자식을 내려다보기 때문이다. 넷째 가름 ‘탈의 근원, 말’에서는 모든 인간관계가 말로 이루어지고 있다. 말이 없는 인간관계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말은 양날의 칼이다. 인간관계를 돈독하게도 하지만, 망가뜨리기도 한다. 자식들이 자라 갈수록 우선 공유 부분이 줄어든다. 대화가 기름지기 위해서는 정서적 공감대가 중요한데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세대 차이로 말미암아 많은 대화가 이루어지기 어렵고 그 대화마저 재미있는 게 되기 어렵다. 대화를 위한 노력, 물론 중요하다. 대화는 저절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자식들과의 대화가 차츰 더 성글어 가는 것, 그것은 자식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따로 이룩해 가는 것으로, 더 나은 세계를 이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다섯째 가름 ‘공부, 응 그래, 공부’에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신물 나게 되풀이되고 있는 우리 교육 제도나 방법에 대한 만년 개탄의 요약은 ‘창의력을 죽이고 인간성을 황폐하게 만드는 교육’이다. 우리는 정말 철두철미하게 아이들의 창의력을 죽이고 인간성을 망가뜨려 왔다. 아이들에 대한 간섭과 강제는 장기적으로는 자발성을 거세하면서 창의력을 말려 죽인다. 학업 성취의 1차적 동기가 되는 창의의 절대적 전제는 바로 자발성이며, 부모들이 진정으로 관심 가져야 할 것은 자식들의 자발성 함양이다. 여섯째 가름 ‘허다한 시행착오들’에서 부모가 가장 관심해야 하는 것이 사랑의 고른 나눔, 더 나아가 자식들이 부모로부터 받는 관심과 사랑에 차별이 없음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자기 자식을 다른 형제나 다른 집 아이와 비교하는 것은 무심결에 자기 자식을, 사이좋게 어울려야 할 친구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며, 아무런 효과도 기대할 수 없다. 아이들 교육도 마찬가지다. 물론 훌륭한 부모, 위대한 교육자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대한민국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은 제도적, 조직적으로 망가지고 있다. 자라고 있는 아이들에게 가장 유해한 교육 환경은 말 따로 행동 따로인 교사와 부모들이라 할 수 있고, 그 아이들에게 가장 큰 불행은 성장 과정에서 존경하는 스승과 부모가 없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곱째 가름 ‘나는 왜 자식 농사에 실패했다고 생각하는가’는 필자 자신이 총체적으로 마무리하는 글이다. 자식 농사에 실패한 이유를 굳이 규명해 보자면, 바로 가부장적 의식 때문이다. 나의 이성적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무엇. 그렇게 이해하는 나는 이만한 평화나마 참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자식에게 바친 물심양면의 희생에 대한 본전,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은 망발이나 마찬가지다. 자식을 위해 희생한 게 아니라, 자식으로 말미암아 누린 것이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마라. 너희들이 할 효도는 어릴 때 이미 다 하였다’는 유대인의 속담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이라는 굴레에 칭칭 매여 살아야 했던 나의 줄기찬 소망은 가족으로부터의 해방 또는 탈출이었다. 가족이라는 굴레로부터 벗어나기만 하면 당장 행복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가족에 대한 의무를 끝낸 다음 우리 부부만 남게 되었을 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황홀경이 아니라 한없는 적막감이다.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떻게 된 게 도무지 성한 구석이 없고, 이놈이나 저놈이나 글러 먹은 놈밖에 없다. 도대체 이게 나라냐!”라는 탄식을 머금고 있어야 하는 것이,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리고 그런 현실에 대한 책임은 당연한 것처럼 정치의 몫이 되었다. 모든 화살이 정치 쪽을 향해 날아갔다. 바로 그 대목에 우리의 매우 중요한 착각이 있다. 과연 정치만일까? 그렇지 않다. 정치는 성한 구석이 없는 우리 사회의 한 부분일 뿐이다. 정답은 사실상 ‘성한 구석이 없다’이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한 부분들일 뿐이다. 기초가 부실한데 어떻게 위대한 건축물이 탄생할 수 있을까? 근본적인 교육 혁명이 필요한 시점이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