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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도서 슬로우 맨
들녘 2009.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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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w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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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자 소개 2

저J. M. 쿳시

 

John Maxwell Coetzee,존 쿳시

현대 영어권 문학에서 최고의 비평적 찬사를 받는 작가 중 한 사람. 1940년 남아프리카연방(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태어났다. 케이프타운 대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영국에서 컴퓨터프로그래머로 재직한 뒤 미국으로 가 오스틴 텍사스 대학교에서 언어학·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8~71년 버펄로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강의하며 소설 창작을 시작했다. 베트남전 반대 시위대에 대한 진압병력의 철수를 요구하는 연좌농성에 참여했다가 미국 영주권 신청이 기각된 뒤 1971년 남아공으로 귀국했다. 1972년 케이프타운 대학교 영문과 교수가 되어 2001년까지 재직했고, 이후 오
현대 영어권 문학에서 최고의 비평적 찬사를 받는 작가 중 한 사람. 1940년 남아프리카연방(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태어났다. 케이프타운 대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영국에서 컴퓨터프로그래머로 재직한 뒤 미국으로 가 오스틴 텍사스 대학교에서 언어학·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8~71년 버펄로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강의하며 소설 창작을 시작했다. 베트남전 반대 시위대에 대한 진압병력의 철수를 요구하는 연좌농성에 참여했다가 미국 영주권 신청이 기각된 뒤 1971년 남아공으로 귀국했다. 1972년 케이프타운 대학교 영문과 교수가 되어 2001년까지 재직했고, 이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 애들레이드 대학교에서 문학을 강의하며 동물보호단체 ‘보이스리스’에서 활동하고 있다. 첫 장편 『어둠의 땅』(1974)을 발표한 이래 『마이클 K의 삶과 시대』(1983)와 『치욕』(1999)으로 이례적이게도 두번 부커상을 받았고 2003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는 등 작가로서 세계적 명망을 쌓았다. 서구 식민주의의 야만에서 자유주의적 지식인의 취약성과 작가의 윤리까지 근현대의 첨예한 문제들을 집요하게 탐색하는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 『야만인을 기다리며』(1980), 『포』(1986), 『철의 시대』(1990), 『뻬쩨르부르그의 대가』(1994), 『느린 남자』(2005),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2007), 자전소설 3부작 『소년 시절』(1997) 『청년 시절』(2002) 『서머타임』(2009) 등의 소설과 몇권의 평론집 및 에세이집을 펴냈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2003)는 후기 쿳시 소설의 돋보이는 문제작이다.

역왕은철

 
전북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클래리언대학교와 메릴랜드대학교에서 각각 영문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H. B. 이어하트재단, 케이프타운대학학술재단, 풀브라이트재단의 펠로 및 한국학술진흥재단의 해외파견 교수를 역임했으며, 케이프타운대학과 워싱턴대학에서 객원교수로 있었다. 유영번역상, 전숙희문학상, 한국영어영문학회 학술상, 생명의신비상, 전북대학교 학술상, 전북대학교 수업상을 수상했다.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문학평론가이고, 현재 전북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철의 시대』, 『피의 꽃잎』, 『연을 쫓는 아이』, 『페테르부르크의 대가』, 『마이클 K』
전북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클래리언대학교와 메릴랜드대학교에서 각각 영문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H. B. 이어하트재단, 케이프타운대학학술재단, 풀브라이트재단의 펠로 및 한국학술진흥재단의 해외파견 교수를 역임했으며, 케이프타운대학과 워싱턴대학에서 객원교수로 있었다. 유영번역상, 전숙희문학상, 한국영어영문학회 학술상, 생명의신비상, 전북대학교 학술상, 전북대학교 수업상을 수상했다.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문학평론가이고, 현재 전북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철의 시대』, 『피의 꽃잎』, 『연을 쫓는 아이』, 『페테르부르크의 대가』, 『마이클 K』, 『전쟁 쓰레기』, 『다른 방에는 다른 놀라움이』 등의 책을 우리 말로 옮겼고, 『J. M. 쿳시의 대화적 소설』(문화관광부우수도서), 『문학의 거장들』(한국연구재단 우수도서), 『애도예찬』(전숙희문학상), 『타자의 정치학과 문학』(한국영어영문학회 학술상, 세종도서), 『트라우마와 문학, 그 침묵의 소리들』(생명의신비상, 세종도서) 등의 저서가 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12월 30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352쪽 | 562g | 153*224*30mm
ISBN13
9788975278457

책 속으로

그가 자신의 말을 반복한다.
“아니. 내 몸 안에는 나사가 없어. 나사가 있다면 기계인간이지. 나는 기계인간이 아니란다.”
하지만 류바는 기계적인 다리가 아니라니까 다리에 흥미를 잃는다. 아이는 입맛을 다시면서 요구르트를 다 먹고 잠바 소매로 입을 닦는다. 그는 티슈를 뽑아 입술을 닦아준다. 아이는 그가 그렇게 하도록 가만히 둔다. 그는 소매도 깨끗이 닦아준다.
어린 아이한테 손가락을 댄 건 처음이다. 한순간, 아이의 손목이 그의 손에 늘어져 있다. ‘완벽하다.’ 다른 말로는 표현할 도리가 없다. 사람은 새로운 모든 것을 갖고, 완벽한 순서로 된 모든 것을 갖고 자궁에서 태어난다. 손상되어 태어나는 몸도, 예를 들어 이상하게 생긴 수족이나 스파크를 일으키는 뇌를 갖고 태어난 몸도, 하나하나의 세포는 창조의 날에 그러한 것처럼 신선하고 깨끗하고 새롭다. 하나하나의 새로운 탄생은 새로운 기적이다. ---'8장' 중에서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든다.
“인생의 새 장이 열리고 옛 장은 덮였어요. 당신은 그것에 작별인사를 하고 새것을 받아들여야 해요. 받아들이세요. 그렇게만 하면 돼요. 그렇게 되면 닫혔다고 생각했던 모든 문들이 열릴 거예요. 두고 보세요.”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정말로 자연스럽게 느끼고 싶어 할까? 그는 매질 로드에서 그 일이 있기 전에는 자연스럽게 느꼈던 걸까? 아무런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의 의미일 것이다. 아무 생각이 없는 것 말이다. 밀로(Milo)의 비너스는 자연스럽게 느낄까? 팔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밀로의 비너스는 여성적인 아름다움의 이상으로 받들어진다.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에게도 원래 팔이 있었는데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팔을 잃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 애절한 것으로 만들 따름이다. 하지만 만약 비너스가 실제로 팔이 잘린 사람을 모델로 했다는 게 앞으로 밝혀지면, 그녀는 지하 창고로 금세 치워질 것이다. 어째서 그럴까? 어째서 여자의 파편적인 이미지는 찬미의 대상이 되지만 파편적인 여성의 이미지는 잘린 부분을 아무리 말끔하게 봉해 놓아도 그렇지 못하는 걸까? ---'9장' 중에서

오랫동안 바라고 필요로 했던 변화를 가져온 건 그의 기억 속에 아른거리는 마리야나의 미소다. 즉시, 암울함과 검은 구름이 모두 걷힌다. 그는 마리야나를 고용한 사람이고 그녀의 보스이며, 그녀는 자신의 요구에 따라 일을 하고 돈을 받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 아파트를 돌아다니며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말쑥하게 해놓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는 우중충한 분위기를 밝게 하려고 꽃을 배달시키기까지 한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그가 여자에게서 원하는 건 무엇일까? 그는 그녀가 다시 미소를 지었으면 싶다.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지어줬으면 싶다. 그는 그녀의 마음속에 아무리 작더라도 자신의 자리가 있었으면 싶다. 그는 그녀의 연인도 되고 싶은 걸까? 그렇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걸 간절히 바란다. 그는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인 드라고, 류바, 아직 보지 못한 세 번째 아이를 사랑하고 보듬고 싶다. 맹세코, 그녀의 남편에 대해서는 눈곱만큼의 악의도 없다. 그는 그녀의 남편이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고 마리야나의 남편이 될 수 있다면 그는 어떤 것이라도 내놓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공동의 아버지, 공동의 남편이 될 수도 있고, 플라토닉해도 괜찮으리라. 그는 그들을, 그들 모두를, 돌봐주고 보호해주고 구해주고 싶다. ---'11장' 중에서

“당신이 나한테 왔어요. 어떤 면에서 보면 나는 나한테 오는 것을 통제하지 못해요. 당신은 창백하고, 몸이 굽고, 목발을 짚고, 끈덕지게 아파트에서 살고, 수집한 사진을 갖고 있죠. 그런 상태로 나한테 온 거죠. 또한 크로아티아 난민인 미로슬라브 조키치(미로슬라브가 그의 이름이지요, 친구들은 그를 멜이라고 불러요.)의 부인을 향해 불완전한 애착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내게 왔어요.”
“불완전한 게 아닙니다.”
“불완전한 거예요. 자신의 감정을 안으로 삭이지 못하고 불쑥 말해버렸잖아요. 결과가 어떻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는데도 말이죠. 당신도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 폴, 생각해봐요. 당신은 정말로 당신이 고용한 사람을 유혹해 가족을 버리고 당신과 살도록 할 작정인가요? 당신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것 같아요? 그녀의 자식들은 화를 내고 혼란스러워할 거예요. 그들은 그녀에게 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하루 종일 당신의 침대에 누워 울고만 있을 거예요. 그걸 어떻게 감당할 거죠? 다른 계획이라도 있나요? 당신은 멜이 아내와 자식들을 두고 파도 속으로 들어가 사라지게 할 계획이라도 있나요?
나의 첫 질문으로 돌아갈게요. 폴 레이먼트, 당신은 누구죠? 당신의 연애감정이 뭐가 그리 특별하죠? 당신이 인생의 가을에, 그것도 늦가을에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진짜 사랑을 찾아냈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남자일 것 같아요? 레이먼트 씨, 그것은 하찮은 거라고요. 그런 이야기는 하찮은 거라고요. 더 강력한 상황을 들고 나와야 하는 거예요.” ---'13장' 중에서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죠? 당신은 나를 시련이라고 생각하죠. 당신은 대부분, 내가 헛소리를 지껄이며 이런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당신은 들고 일어서지는 않는군요. 아직은 말이죠. 당신은 내가 포기하고 가버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참는 거죠. 부인하지 마세요. 당신 얼굴에 훤히 써 있어요. 당신은 욥이고 나는 당신이 부당하게 받는 고통이라는 거겠죠. 당신이 원하는 건 평화밖에 없는데, 내가 당신을 자신에게서 구해주겠다며 어쩌고저쩌고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하겠죠.
폴, 이런 식일 필요는 없어요. 다시 얘기하지만 이것은 내 얘기가 아니라 당신 얘기예요. 당신이 주도권을 잡기로 결정하는 순간, 나는 물러날 거예요. 당신은 나한테서 더 이상 아무것도 듣지 못하게 될 거예요. 나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될 거예요. 이 약속은 당신의 새로운 친구인 마리아나에게도 적용되는 거예요. 나는 물러날 거예요. 그리고 당신과 그녀는 자유롭게 각자, 구원을 얻게 될 거예요. ---'14장' 중에서

그 점토는 지난 크리스마스 때 샀던 오래된 것이다. 원래는 빨간색, 싱싱한 초록색, 그리고 하늘처럼 푸른색을 띠던 것들이 이제는 섞여서 활기가 없는 자주색으로 바뀌어 있다. 어째서 밝은 건 흐릿해지는데 흐릿한 건 밝아지지 않는지 궁금하다. 병아리들이 알에서 나오듯이, 자주색이 없어지고 붉은색과 푸른색과 초록색이 다시 나타나게 하려면 뭐가 필요할까?”
그녀는 어째서 질문을 하고 나서 답변은 하지 않는 걸까? 답은 간단하다. 붉은색과 푸른색과 초록색으로 돌아가지 않는 건 엔트로피 때문이다. 되돌릴 수 없고 취소할 수 없는, 우주를 지배하는 엔트로피 말이다. 문학하는 사람도 그건 알아야 한다. 여류소설가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것들이 획일적인 것으로 바뀌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의기양양한 병아리는 늙은 암탉이 되어 흙 속에서 죽어간다는 사실. ---'16장' 중에서

“우리, 서로한테 솔직해지세, 드라고. 자네가 자네 어머니와 나 사이를 석연치 않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오늘 여기에 오지 않았을 거 아닌가. 내가 자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지. 자네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불미스러운 게 전혀 없네. 자네 어머니를 향한 내 감정에도 불미스러운 게 전혀 없네. 나는 다른 여자들에게 그러한 것처럼 자네 어머니를 존중하네.”
불미스러운 게 전혀 없다니, 우습고도 낡은 표현방식이다! 그것은 훨씬 더 조야하고 말할 수 없는 것, 즉 ‘나는 자네의 어머니와 섹스를 하지 않았다’는 표현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 아니던가? 만약 섹스가 문제라면, 만약 섹스 때문에 미로슬라브 조키치가 질투심에 불타 날뛰고 그의 아들이 울먹이려고 한다면, 왜 그는 명예에 관한 일장 연설을 하고 있는가? “나는 자네 어머니와 섹스를 하지 않았네, 자네 어머니를 유혹하지도 않았네, 그러니 자네 아버지한테 가서 그렇게 말하게.” 하지만 만약 그가 마리야나를 유혹할 생각이 아니라면, 만약 그가 그녀와 섹스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거라면, 1980년대에 태어난 젊은이에게 그가 뭘 하려고 하는 것인지 납득이 가게 설명할 수 있을까? ---'18장' 중에서

“나는 드라고를 찾으려고 여기에 왔어요. 당신이 날을 세우고 나한테 하는 얘기를 듣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고요. 나는 사랑과 보살핌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어요. 나는 마리야나가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란 적이 없어요. 육십 대 노인으로서 내가 하고 싶은 건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걸 하는 것뿐이에요. 감정의 문제는 전적으로 내 문제예요. 나는 다시는 마리야나에게 그런 감정을 들이밀지 않을 거예요. 단지 늘 회의적으로 나오니까 한 마디만 더 합시다.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욕망, 보호의 날개를 펴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요.”---'20장' 중에서

“당신이 뭘 보는지, 혹은 당신이 뭘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내가 당신에게 말해줄게요. 토렌스 강 옆에서 오이들에게 모이를 주고 있는 늙은 여자. 깨끗한 속내의가 다 떨어져가는 늙은 여자. 당신 생각에는 당신을 교활하게 비틀면서 짜증나게 만드는 늙은 여자. 이렇게 보이겠죠.
하지만 폴, 현실은 그보다 더 복잡한 거예요. 실제로 당신은 그보다 훨씬 많은 걸 보지만, 보고 나서 지워버리는 거예요. 예를 들어, 눈에 거슬리는 빛. 부드러운 물 옆에서 그 빛에 사로잡? 있는 사람. 그녀를 찌르고 꿰뚫을 것 같은 날카로운 빛.
불필요하게 복잡하다고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확장이죠. 숨 쉬는 것처럼 말이죠.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처럼 말이죠. 확장되고 수축되고, 이런 게 삶의 리듬이죠. 폴, 더 충만하고 더 크고 더 넓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 그게 있어야 돼요. 그런데 당신은 그걸 허용하지 않으려 해요. 생각의 실타래를 자르지 말아요. 끝까지 따라 가세요. 당신의 생각과 느낌들을 따라 가란 말이에요. 그것들을 따라 그것들과 함께 커지세요. 그 미국시인이 뭐라고 했죠? A와 B 사이에 얽힌 허구를 통해서만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요? 기억력이 자꾸 없어져요. 날마다 더 희미해져요. 안타까운 일이네요. 여하튼 나는 당신에게 이런 교훈을 가르치려고 하는 거예요. ‘그는 강가의 벤치에 앉아 있는 그녀를 찾아낸다. 오리들이 몰려 있는 걸 보니 그녀가 모이를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이런 설명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겠죠. 그것의 단순함이 사람을 현혹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죠. 그러나 그거로는 충분치 않아요. 그것은 나를 살려내지 못해요. 나를 살려내는 일이 당신에게는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면 당신을 살려내지 않는 것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죠. 오리들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이 나를 그림의 중앙에 배치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전제하에 하는 말이에요. 이 변변찮은 오리들을 살려내면 그들도 당신을 살려낼 거예요. 그건 내가 장담해요. 그것이 마리야나여야 한다면 마리야나를 살려내세요. 그러면 그녀가 당신을 살려낼 테니까요. 그건 그처럼 기본적인 거예요. 하지만 제발 내 부탁을 들어주는 셈치고 우유부단하게 굴지는 말아줘요. 나는 내가 얼마나 더 지금처럼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20장' 중에서

“드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할 테니 웃지는 말게. 나는 시간과 역사에 추월당했네. 이 아파트와 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추월당했지. 시간에 추월당한다는 건 이상한 게 아니네. 자네도 오래 살게 되면 그리될 걸세. 우리 얘기가 실제로 무엇에 관한 것인지 말해 보게. 자네의 기준에 맞지 않는 컴퓨터에 관한 건가?”
드라고는 어리벙벙해져 그를 쳐다본다. 그도 사실 놀라고 있다. 왜 그런 격렬한 말을 했을까? 가엾은 아이가 무슨 짓을 했기에 그랬을까? “새로운 것이 싫으십니까?” 늙은이에게 충분히 물을 수 있는 질문이다. 화가 날 게 뭔가?
그는 드라고가 했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동작으로 손을 내두르며 말한다.
“이 모든 것이 한때는 새것이었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도 한때는 새것이었네. 나도 새것이었네. 내가 태어난 시간에 나는 지구에서 가장 새로운 것이었네. 그런 다음 시간이 나한테 작동하기 시작했네. 자네한테 그러할 것처럼 말이네. 드라고, 시간은 자네를 먹어치울 것이네. 자네는 언젠가 좋은 새 집에서 좋은 새 아내와 앉아 있을 것이고, 자네의 아이들이 돌아서서 자네 두 사람에게 ‘왜 그렇게 구식이세요?’라고 말할 거네. 그 날이 되면, 자네가 이 대화를 기억하길 바라네.”---'23장' 중에서

“마리야나, 당신은 틀렸어요. 전혀 그게 아니에요. 나는 혼란스러운 게 아니에요. 불안정할지는 몰라요. 그러나 불안정하다는 것이 정신이상은 아니에요. 우리는 모두, 더 불안정해야 해요. 전에는 그러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게 내 생각이에요. 우리는 더 자주, 우리 자신을 흔들어야 해요. 또한 우리는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거울을 바라보아야 해요. 거울 속으로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말이죠. 나는 시간의 파괴를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안경 뒤에 갇혀 있는 존재를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는 보통 그 존재의 눈길을 피하려고 무던히 애를 쓰잖아요. ‘나와 함께 먹고 나와 함께 자고 나 대신에 ‘나’라고 말하는 이 존재를 보세요!’ 마리야나, 당신에게 내가 불안정하다고 생각되면, 그것은 내가 충격을 당해서만이 아니에요. 그것은 이따금 ‘나’라고 말하는 낯선 존재가 유리를 깨고 내 속으로 들어와 얘기하기 때문이에요. 나를 통해서요. 오늘 밤 얘기하고 있어요. 지금 얘기하고 있어요. 사랑을 얘기하고 있어요.”---'26장' 중에서

“고개를 들이밀기 전에 한없이 냄새만 맡고 있으니까 그렇죠. 폴, 당신이 한 발짝 떼는 걸 그렇게 힘들어 하니까, 당신한테 토끼가 되라는 말은 하지 않겠어요. 나는 당신한테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당신의 거북이 성격 ‘안에서’, 당신의 다양한 거북이 열정 ‘안에서’ 마리야나에 대한 구애를 빠르게 해줄 수 있는 수단을 찾을 수 있는지 보라고 간청할 뿐이에요. 그녀에게 구애를 하고 싶다면 말이죠.
폴,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건 열정이라는 걸 기억하세요. 당신은 문맹이 아니니 틀림없이 그걸 알 거예요. 열정이 없으면 세상은 텅 비고 형태가 없는 것이 되고 말 거예요. 돈키호테를 생각해보세요. 『돈키호테』는 흔들의자에 앉아 라 만차의 지루함을 한탄하는 남자에 관한 게 아니에요. 그것은 물동이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늙고 성실한 늙은 일말의 등에 올라타 착한 일들을 하기 위해 뛰어나가는 사람에 관한 거예요. 엠마 루오, 엠마 보바리를 보세요. 돈을 어떻게 낼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이 나가서 비싼 옷을 사잖아요. ‘우리는 한 번밖에 살지 않는다. 한 번 해보는 거야!’ 알론소도 그렇게 말하고 엠마도 그렇게 말하죠. 폴, 한 번 해봐요. 어떻게 되는지 한 번 해보라고요.”
“당신이 책에 써먹을 수 있도록 나보고 어떻게 되는지 한 번 해보라 이거군요.”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당신을 책에 써먹을지 ‘모르도록’ 말이에요. 누군가가 당신을 책에 넣고 ‘싶어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당신이 책에 넣을 ‘가치가 있도록’ 말이에요. 알론스와 엠마처럼 말이죠. 폴, 중요한 사람이 되세요. 영웅처럼 살아요. 고전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잖아요. 주요인물이 되세요. 그렇지 않다면 뭣 때문에 살죠?

---'28장'중에서

출판사 리뷰

노년과 사랑, 집과 예술의 의미를 찾아가는 고독하고 불편한 행보
교통사고로 다리 한쪽을 잃고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 전직 사진사 폴 레이먼트. 독신자 아파트에서 혼자 살아가던 그는 이제 사소한 일상마저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해결할 수 있다. 예전처럼 자전거를 타고 가 장을 보는 일도, 요리를 하는 것도, 기본적인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일조차 불가능하다. 결국 그는 사회복지 시스템의 협조 아래 파견 간호사를 들인다. 능숙하고 진지하게 레이먼트를 돕는 크로아티아 출신의 간호사 마리야나. 그녀는 크로아티아에서 예술작품 복원사 학위를 땄으나 이민 후 간호사 일을 하며 가정 경제의 일정 부분을 책임지는 여인이다. 사고 후 절망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는 레이먼트에게 마리야나는 차츰 타임머신에 오르게 해주는 티켓과도 같은 존재가 된다. 하지만 레이먼트는 마리야나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순수한 사랑인지 잔상처럼 남은 노년의 욕구인지조차 판단할 수가 없다. 예기치 않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갈등하는 레이먼트 앞에 어느 날 낯선 침입자가 나타난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라는 노작가다. 그녀는 레이먼트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그의 속내까지 훤히 알고 있는 신비로운 인물이다. 급기야 레이먼트의 집에 눌러 앉아 그를 종용하고 다그치기 시작한다. “밀어봐요! …… 당신의 인생을 살라고요. 내가 당신을 소설 속 주인공으로 쓰고 싶을 만큼…….”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나아가는 레이먼트와 엘리자베스, 남아 있는 날이 훨씬 더 많은 마리야나와 그의 가족들. 이들은 서로 밀고 당기는 불편한 관계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인생과 시간, 사랑과 욕구, 그리고 예술과 집의 의미에 천착하게 된다.

『슬로우 맨』 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존 쿳시의 심오하고 정직한 성찰록이다
존 쿳시는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이자 부커상 2회 수상작가로 유명하다. 남아공 출신답게 남아프리카와 관계된 작품을 여러 권 발표했지만 『슬로우 맨』의 공간적 배경은 남아공과 ‘전혀’ 관련이 없는 오스트레일리아다.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한 후에 집필한 본격적인 소설이 바로 『슬로우 맨』이기 때문이다. 쿳시는 남아공을 떠난 것을 두고 “결혼생활이 막을 내리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그만큼 ‘고향’을 옮기는 문제는 그에게 있어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닌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폴 레이먼트가 프랑스 사람이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살고 있고, 그가 자전거 사고로 다리를 절단당한 후 사랑에 빠지게 된 마리야나 조키치 역시 크로아티아 출신의 이민자라는 것도 작가의 환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지만 가슴으로 말하지 못하고, 거주지는 있지만 정작 돌아갈 집은 없다’는 레이먼트의 처절한 고백은 어쩌면 이민의 삶을 살고 있는 쿳시의 심경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나는 늘 고향이라는 것이 아주 영국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했어요. ‘따뜻한 가정’(hearth and home)이란 영국식 표현이 있잖아요. 그들에게 집은 난로불이 타고 있는 곳이고, 자신의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돌아가는 곳이에요. 추위를 느낄 필요가 없는 곳이죠.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는 이곳에서 따뜻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어요.

같은 맥락에서 쿳시는 주인공 레이먼트의 입을 빌어 “어디를 가든 나는 추운 것 같아요.” 혹은 “나는 누구의 ‘우리’도 아니니까요.”라고 말한다. 21세기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가 된 이민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 것도 작가의 오스트레일리아 이주와 관련된 개인적인 체험에 연유된 바가 크다는 뜻이다. 자신의 근원지를 떠나 이국에 정착한다는 것은 외롭고 고단한 일이다. 평생 커다란 화인火印 하나를 가슴에 지니고 살아야한다는 뜻이다.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밥을 먹어도 늘 배가 고픈 듯한 허기짐의 연속. 하지만 그 허기짐이 일상 속에서 화석이 되는 순간 이민자의 삶은 대개 끝이 난다. 보다 안락한 삶과 보다 편안한 집을 찾기 위해 떠났지만 끝내 그 어느 곳에도 단단히 뿌리내리지 못한 채로. ‘집’과 ‘고향’은 늘 손에 넣기에 너무도 요원한 대상이다.

‘시간이 나의 삶을 먹어치웠다’고 고백하는 무겁고 속 깊은 소설
『슬로우 맨』에서 이민의 삶만큼 비중 있게 다룬 것은 노년의 문제다. 이 점은 작가의 다른 작품 (『철의 시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여자가 나이를 먹을 때」,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지만 특히 『슬로우 맨』에서 더욱 심오하게 형상화된다. 나이가 많고, 자전거를 타다가 차에 들이받혀 한쪽 다리를 잃은 비참한 상황에서 자신을 간호해주는 간호사와 사랑에 빠진 주인공 레이먼트. 하지만 그는 특징이라곤 없는 인물이다. 평범할 뿐만 아니라 수동적이고 무기력하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다. 간호사이자 도우미인 이민자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흥미를 끌 만한 것은 못 된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것이 상호교환적인 연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레이먼트에게 ‘사랑’은 지난 삶과 청춘 그리고 시간의 의미를 되짚게 해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 이 놀라운 감정을 통해 그는 ‘비로소’ 불완전한 자신을 뒤돌아본다. 그리고 속절없는 흘러간 시간의 무상성에 대해 한탄한다.

“이 모든 것이 한때는 새것이었네. 나도 새것이었네. 내가 태어난 시각에 나는 지구에서 가장 새로운 것이었네. 그런 다음 시간이 나한테 작동하기 시작했네. 자네한테 그러할 것처럼 말이네. 드라고, 시간은 자네를 먹어치울 것이네.”

흥미롭지 않은 주인공에, 별반 매력이지 않은 이야기다. 오죽하면 소설 속 작가로 등장하는 엘리베스 코스텔로가 레이먼트더러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당신을 책에 써먹을지 모르도록” 살라고 다그칠 정도다. “누군가가 당신을 책에 넣고 싶어할 수 있도록, 당신이 책에 넣을 가치가 있도록 말이에요. (……) 주요인물이 되세요. 그렇지 않다면 뭣 때문에 살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레이먼트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어제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생활을 이어가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존재하며, 언제나 갈증을 느끼고, 끝내 이루지 못할 것들을 동경하면서 어찌 보면 ‘살아지는’ 삶 속에서 연명하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슬로우 맨』을 읽으면서 가슴이 아파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물론 수식어 하나 없이 건조하고 쿳시의 정직한 문장들도 여기에 한몫을 한다. 옮긴이의 표현처럼 “쿳시와 같은 위대한 작가가 아니라면, 별 특징이 없는 노년의 남자, 그것도 다리를 잃어 비참해질 대로 비참해진 남자에 관한 자못 무미건조한 이야기가 이렇듯 가슴을 아프게 하는, 노년에 대한 심오한 성찰로 이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슬로우 맨』은 청춘과 노년의 의미를 되짚어보고, 시간의 무상함을 생각하게 하고, 백퍼센트 순수한 선善이란 존재하는지, 그리고 육신의 존재를 쉬게 해주는 ‘집’은 과연 있는 것인지, 또 영혼의 안식처인 ‘예술’의 가치와 의미는 어디에 있는지를 성찰하게 해주는 무겁고 속 깊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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