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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 들어서며: 다시 살아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1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016 | 말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035 | 마지막까지 남는 것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057 | 그리운 것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2부 우리를 다시 길 위에 세우는 힘 072 | 몸의 목소리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090 | 아직도 꿈꿀 수 있는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106 | 안전한 항구를 떠나려는 까닭 허먼 멜빌, 『모비 딕』 3부 마음은 어디로 향하는가 126 | 당신에게도 무진이 있는가 김승옥, 「무진기행」 137 | 내면의 부름을 따라서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153 | 사랑은 왜 아름다운가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4부 사랑은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가 172 | 눈앞에 있는 한 사람의 고통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93 | 눈보라 속에서도 지키고 싶은 것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 209 | 끝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231 | 나가며: 나를 살게 한 사람들 부록 233 | 질문과 함께 걸었던 길 244 | 참고문헌 249 | 본문에 등장하는 영화와 음악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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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은 때로 한 사람을 정확히 이해해서 좋아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사람에게서 자신이 가고 싶은 먼 곳을 발견하기 때문에 끌린다. 내게 전혜린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 ‘먼 곳’은 지리적인 장소가 아니었다. 주어진 질서 밖의 삶,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가능성이었다. 병상의 창문 너머로 나는 오래도록 그것을 바라보았다.”
---p.20 “예전에는 메멘토 모리를 ‘죽음을 기억하라’는 경고로 받아들였다. 죽음을 잊지 말고 헛되게 살지 말라는 뜻으로 읽었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오늘 살아 있는 사람을 더 깊이 바라보고,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처럼 들린다.” ---p.56 “뜨거운 것은 식고, 아름다운 것은 사라진다. 바로 그 사라짐을 바라보는 애잔한 마음이 『설국』의 깊은 곳을 흐르고 있다.” ---p.62 “『설국』이 말하는 아름다움은 바로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 행위에 있다. 아름다움은 그저 아름다워야 한다. 어떤 이유나 목적을 갖는 순간, 그것은 이미 순수함에서 멀어진다.” ---p.63 “그에게 몸은 단순한 육체가 아니라 삶 전체를 떠받치는 ‘커다란 이성’이었다. ‘대지에 충실하라’는 말 또한 추상적 도덕을 따르라는 뜻이 아니라, 감각을 통해 세계와 생생하게 접속하라는 요청이었다.” ---p.77 “니체는 서구 사회를 지탱해 온 초월적 가치의 붕괴를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으로 압축했다. 이제 인간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너진 신의 자리를 또 다른 절대적 가치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발 딛고 선 대지와 삶으로 돌아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일이었다.” ---p.78 “우리는 흔히 용기를 확고한 믿음에서 나오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용기는 확신이 없어도 출발할 수 있는 힘에 가깝다. 실패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첫걸음을 내딛고, 결과를 장담할 수 없어도 자기 안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이 돈키호테가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p.96 “인간은 사실을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사실 너머의 의미를 찾고 이야기를 만들며, 그 이야기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다. 신화가 사라진 시대에도 인간이 새로운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모비 딕』은 인간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인 동시에, 자신이 만든 의미에 사로잡힐 수도 있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에이해브와 흰 고래의 비극은 그 능력의 빛과 어둠을 함께 비춘다.” ---pp.115~116 “무진은 현실의 논리와 계산이 지배하지 않는 세계다. 그는 성공의 순간보다 실의와 좌절, 실직과 실연, 병과 고통의 시간에 더 자주 그곳을 찾는다. 쓸쓸한 기억들은 안개처럼 뒤엉켜 마음을 흔들지만, 무진에서 그는 위선과 가식, 사회적 허울을 벗어던지고 영혼을 느슨하게 풀어놓는다.” ---pp.128~129 “삶에서 잠시 비켜 서보는 시간은 무미하고 고단한 일상을 견뎌내는 데 필요한 통과의례다. 「무진기행」의 인물들이 쏟아내는 한탄과 독백은 꿈과 낭만이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초상이다.” ---pp.134~135 “『달과 6펜스』는 이처럼 저 먼 ‘달’의 광휘를 좇기 위해 세속의 ‘6펜스’와 인간적인 유대를 하나씩 뒤에 남겨둔 한 사내의 고독한 열망이자,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감행한 신성하고도 잔혹한 망명의 기록이다.” ---p.141 “예술의 가치가 반드시 고통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가 파멸해야 위대한 작품이 탄생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예술에는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과 경험, 실패와 상처, 세계를 바라본 고유한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AI 시대에도 지켜야 할 것은 바로 그 흔적일 것이다. 완성된 결과물의 매끄러움만이 아니라, 한 인간이 무엇을 보고 느꼈으며 왜 그것을 표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는가 하는 삶의 서사는 여전히 대체될 수 없다.” ---pp.149~150 “폴이 겪는 이러한 혼란은 실존주의 철학이 말하는 ‘자유의 형벌’을 떠올리게 한다. 스스로 선택할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 선택이 반드시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냉혹한 현실이 그녀를 끊임없는 망설임 속에 붙들어 둔다.” ---p.161 “사강의 생은 과잉과 결핍 사이를 위태롭게 오갔다. 속도와 위험, 사랑과 도피, 쾌락과 고독이 뒤섞인 불규칙한 박동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단순히 방탕이나 허영이라는 말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녀는 안락하고 정돈된 삶에 쉽게 머물지 못했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며 생의 경계를 거듭 넘나들었다.” ---p.165 “도스토옙스키는 잔인할 만큼 집요한 인간성의 실험자였고, 인간과 신의 심연 속으로 끝까지 내려가려 했던 작가였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인물들은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때로는 치를 떨게 만든다. 그 형제들은 아버지 표도르에게서 흩어져 나온 욕망과 기질을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품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 안에 웅크리고 있는 또 다른 자아이기도 하다.” ---p.180 “대심문관은 수많은 논리를 쏟아냈지만, 그리스도는 한마디의 논리도 보태지 않는다. 말에는 말로 맞설 수 있지만, 사랑은 말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대답한다. 그 입맞춤은 논쟁의 승리도 패배도 아니다. 자신을 심판하고 죽이려는 사람까지 품는 사랑이며, 그럼에도 인간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신뢰의 표현이다.” ---p.187 “『닥터 지바고』를 읽다 보면 혁명과 전쟁, 이념과 권력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고 무너질 수 있는지를 절감하게 된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상에서 시작된 움직임도 어느 순간 인간보다 이념을, 삶보다 명분을 앞세우게 된다. 그 과정에서 사랑과 우정, 예술과 기억, 개인의 고통과 행복은 사소한 것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작품은 오히려 그렇게 밀려난 것들 속에 인간을 인간답게 지켜주는 가장 소중한 가치가 있음을 일깨운다.” ---p.204 “고전은 단순히 오래된 책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인간에게 길을 비추는 등대이자, 무너져가는 존재를 떠받치는 정신적 함대다. 수많은 세대가 자신들의 깊은 사유와 삶의 경험을 보태어 우리에게 물려준 가장 숭고한 유산인 셈이다.” ---p.212 “『신곡』은 허구적 가상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죄와 벌의 유형, 섬세한 인간 심리와 성격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다. 『신곡』은 하느님의 존엄과 심판, 사랑과 구원을 노래하는 작품인 동시에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비판하는 문학이다. 천상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당대의 인간과 사회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p.214 “인간은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을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로 이끄는 ‘베아트리체’를 품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단테는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영혼의 성숙과 구원을 향한 여정으로 확장함으로써, 인간적 사랑과 신성한 사랑이 만날 수 있는 놀라운 문학적 공간을 만들어냈다.” ---p.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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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었을 때 오래된 문장은 어디로 우리를 데려가는가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들고 길을 나선다. 가을의 계룡산 갑사, 오래된 담장과 낮은 지붕이 남아 있는 전주 서학예술마을, 눈 덮인 병산서원, 끝없이 지평선이 펼쳐지는 김제 평야, 진주 남강과 진양호, 겨울 파도가 부서지는 부산 이기대, 벚꽃 흩날리는 순천만, 달빛 내리는 경주 진평왕릉, 동해의 낭만가도, 영덕 블루로드, 오대산의 눈길, 그리고 남양성모성지의 순례길. 그의 배낭에는 언제나 오래된 책 한 권이 들어 있다. 전혜린과 톨스토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니체, 세르반테스와 멜빌, 김승옥과 서머싯 몸, 사강과 도스토옙스키, 파스테르나크와 단테. 『사랑했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그렇게 책을 들고 길을 걸으며 한 인간이 자신에게 돌아가는 기록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독자도 함께 걷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마른 낙엽 밟는 소리가 들리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달빛 아래 오래된 왕릉의 소나무가 모습을 드러낸다. 브람스의 선율이 동해의 수평선 위로 흐르고, 눈보라 속에서는 『닥터 지바고』의 촛불이 희미하게 흔들린다. 고전은 그렇게 종이 위에 머물지 않고 길 위로 나온다. “손때 묻은 고전이 나를 사랑한 부모님처럼 내 삶에 영원히 존재한다” 시인 정호승은 이 책이 태어난 자리를 누구보다 깊이 들여다본다. 그는 이 책을 “젊은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깊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 탄생”한 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곧이어 그것을 “걷기와 고전 읽기를 통해 그 슬픔을 견뎌낸 인내의 기록이자 고뇌의 서사”라고 부른다. ‘극복’이 아니라 ‘견딤’이라는 말에 이 책의 핵심이 있다. 삶에는 극복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시간이 흐른다고 사라지지 않는 슬픔도 있다. 사람이 떠난 자리는 다른 무엇으로도 완전히 채워지지 않는다. 이 책은 그것을 성급하게 위로하거나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그럼에도 남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정호승은 저자가 젊은 날 읽은 고전을 품고 전국의 산과 들을 걷는 모습을 바라보며 “사랑과 죽음이라는 인생의 비밀을 찾아 나선 저자의 발걸음마다 통찰의 눈물이 고여 있다”고 썼다. 이 표현은 이 책의 독특한 성격을 정확히 보여준다. 여기서 눈물과 사유는 떨어져 있지 않다. 슬픔이 생각을 깊게 하고, 오래된 문장이 개인의 체험을 만나 다시 살아난다. 머리로 이해했던 문장이 어느 날 몸으로 읽히고, 수십 년 전에 읽었던 책이 전혀 다른 책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이 책의 고전 읽기는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삶의 재독(再讀)이다. 풍차와 달빛, 안개와 눈보라… 고전은 다시 풍경이 된다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유난히 많은 풍경을 만나게 된다. 풍차 앞에는 아직 꿈꾸는 돈키호테가 서 있다. 저자는 나이가 들수록 사람이 조금씩 산초를 닮아간다고 말한다. 밥의 무게를 알고 책임의 크기를 배우는 것은 세월의 지혜다. 그러나 너무 오래 땅만 보고 걸으면 하늘을 잊게 된다. 그래서 묻는다.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꿈꿀 수 있는가. 경주 진평왕릉의 달밤에서는 『달과 6펜스』가 펼쳐진다. 발밑에는 현실이라는 6펜스가 있고 머리 위에는 닿을 수 없는 달이 있다. 인간은 어느 하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결국 다시 6펜스의 세계로 돌아오지만, 달을 한 번 바라본 사람에게 현실은 전과 같은 현실이 아니다. 순천에서는 「무진기행」의 안개 속으로 들어간다. 누구에게나 잠시 세상에서 비켜나 자신을 돌아보고 싶은 ‘무진’이 있음을 생각한다. 동해 낭만가도에서는 브람스 교향곡 3번이 흐른다.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떠올리며 사랑과 자유, 외로움과 떠남을 생각한다. 가을이 아름다운 것은 떠남을 외면하지 않기 때문이며, 사랑의 아름다움에는 붙잡는 마음뿐 아니라 때가 되면 놓아주는 마음도 들어 있음을 깨닫는다. 오대산에는 눈보라가 친다. 그 눈길을 『닥터 지바고』와 함께 걸으며 묻는다. 혁명과 전쟁, 거대한 이념이 인간을 휩쓸어갈 때 끝까지 지켜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하고, 느끼고, 시를 쓰고,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인간의 능력까지 역사는 빼앗을 수 있는가. 이 책에서는 문학이 풍경이 되고 풍경이 다시 질문이 된다. 답은 넘쳐나지만, 어떤 질문을 품고 살아갈 것인가 『사랑했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가 고전을 이야기하면서도 오래된 느낌을 주지 않는 이유는 질문이 철저히 오늘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답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검색하면 나오고, 알고리즘이 취향을 골라주며, 인공지능은 몇 초 만에 방대한 지식을 정리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검색해서 얻을 수 없는 질문이 남는다. 나는 지금 정말 내 삶을 살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이 길을 가고 있는가. 꿈과 현실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사랑은 왜 인간을 행복하게 하면서 동시에 아프게 하는가. 타인의 고통 앞에서 나는 어디까지 다가갈 수 있는가. 모든 것이 무너진 뒤에도 무엇을 붙들고 다시 일어설 것인가. 이 책에서 고전은 이 질문들에 모범답안을 내놓지 않는다. 오히려 답을 서두르지 못하게 한다. 280만 콘텐츠 크리에이터 쉐리가 이 책을 읽고 “알고리즘과 AI가 취향과 답까지 골라주는 시대, 고전은 ‘나는 무엇을 좇고, 무엇을 사랑하는가’를 다시 묻게 합니다”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짧고 빠른 콘텐츠를 만드는 젊은 창작자에게 이 책은 “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건넸다. 빠른 답보다 오래 남는 질문. 그것이 이 책이 고전에서 발견한 힘이다. 결국 이 책이 도착하는 곳은 ‘사람’이다 열두 편의 고전을 따라가던 여정은 마지막에 단테의 『신곡』에 닿는다. 단테는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는다. 지옥과 연옥을 통과해 빛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혼자 가지 않는다. 두려움에 떠는 순간마다 베르길리우스가 곁에 있고, 그의 손을 잡아준다. 저자는 그 손을 오래 바라본다. 고통을 대신 짊어질 수는 없다. 죽음을 막아줄 수도 없다. 그러나 떠나지 않을 수는 있다. 이 깨달음은 책 전체를 관통한다. 저자를 다시 길 위에 세운 것도 결국 사람이었다. 함께 걸어준 사람, 밥을 먹어준 사람, 책 한 구절을 보내준 사람, 다음 글을 기다려준 사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곁에 있어준 사람. 그래서 고전을 향해 출발한 이 책은 마지막에 사람에게 돌아온다. 남양성모성지의 늦은 오후, 긴 순례를 마치며 함께 걷던 이가 말없이 저자의 손 위에 손을 얹는다. 기울어가는 햇살이 나무 사이로 스며들고 연둣빛 잎들이 작은 별처럼 흔들린다. 그때 저자는 말한다. “천국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 한 문장은 『사랑했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가 긴 여행 끝에 도착한 장소를 보여준다. 구원은 멀리 있는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어쩌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손을 놓지 않는 순간에 있을지 모른다. “인생의 길을 잃고 헤매며 추워 떠는 당신에게” 정호승은 추천사의 마지막에서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건넨다. “지금 인생의 길을 잃고 헤매며 추워 떠는 당신에게 따뜻한 위로가 필요한가.” 그리고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한다. “분명 당신의 인생을 다정하고 고요히 쓰다듬어 주며 함께 견뎌줄 것이다.” 중요한 말은 다시 한번 ‘함께 견딘다’는 것이다. 이 책은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픔은 곧 지나갈 것이라고 쉽게 위로하지도 않는다. 슬픔이 사라진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고전 한 권을 들고 옆에서 함께 걷는다. 때로는 이야기하고, 때로는 음악을 듣고, 어느 순간에는 아무 말 없이 풍경을 바라본다. 그러다 문득 깨닫게 한다. 죽음은 한 사람의 삶을 멈추게 할 수 있지만 사랑했던 시간까지 데려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지만 함께했던 시간은 남은 사람 안에서 계속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슬픔에 대한 문장이면서 동시에 삶에 대한 문장이다. 사랑했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고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오래된 책을 다시 펼쳐보고 싶게 하는 책, 삶의 어느 길목에서 방향을 잃은 사람에게는 잠시 함께 걸어주는 책,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질문을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는 오래 곁에 두고 싶은 책이다. 한 권의 책을 덮은 뒤 독자에게 남는 것은 열두 편의 고전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다. 나는 무엇을 사랑했는가. 누구와 어떤 시간을 보냈는가. 내 곁에는 누가 있었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누구의 곁을 지키고 있는가. 『사랑했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그 질문을 조용히 우리에게 건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