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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의 역役 비상대책회의 딸 고타소가 남긴 한恨 고대 상업 세력권의 중추 기지, 한수漢水 한수 경략 진흥왕의 배신 관산성 전투 고구려행行 김춘추 집안의 내력 왕자 비형의 운명 진평의 술수 폐위된 왕가의 아들, 춘추 김유신 가家와의 만남 설씨녀 설화에 담긴 신라 사회 김용춘, 멀어진 왕위계승 왕비의 꿈 무왕의 반격 검군의 죽음 낭비성 전투 걸사표乞師表 덕만의 세력을 구축하라 이구족夷九族 여왕의 즉위 백제와 고구려의 새 집권자 김춘추의 계략 고구려 길 연회 구금된 신세 탈출 당 태종의 계산 황룡사 9층 목탑 안의 건탑, 밖의 출병 불교계의 유혈극 출병의 파장 왜로 건너간 김춘추 왜와의 담판 죽은 선덕이 산 춘추를 구하다 비담의 난亂 승만의 즉위 비령자 진덕왕의 배신 품석의 유골 장안으로 가는 길 당나라 유학생 김춘추와 당 태종 죽음의 귀로 지속적인 친당정책 태평송 관제의 개혁 국학의 설치 알천, 섭정을 거부하다 김춘추의 즉위 지소와 김유신의 결혼 김유신의 상대등 임명 협공 계백 투항 사비 입성 간계 칠중성 마지막 어가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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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장인물
김춘추(태종 무열왕, 재위 654~661) 언변에 능하며 신중하고 생각이 깊은 인물. 언젠가 왕이 될 것을 대비해 항상 주변에 인물을 포진시켜 나가는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 두 번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현명함과 뛰어난 외교 역량을 갖춰 삼국통합의 결정적 전기를 이룩하게 된다. 성왕(재위 523~554)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중흥을 꾀한 백제의 영주. 고구려에 빼앗긴 한수 유역을 진흥왕과 합동 작전을 벌여 되찾았으나 진흥왕의 배신으로 신라에 빼앗기고 만다. 그 뒤 복수전을 감행하나 되레 사로잡혀 피살당한 비운의 군주다. 아들 위덕왕, 손자 무왕, 증손 의자왕 3대에 이르는 복수의 명분을 제공했고 김춘추의 딸 고타소의 죽음과 김춘추의 외교행각의 원인遠因을 제공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동륜 진흥왕의 뒤를 이을 태자였으나 진중하지 못한 성격에다 월장을 일삼다 불의의 사고로 죽어 훗날 왕위계승 분쟁의 싹을 마련한 인물이다. 진지왕(재위 576~579) 김춘추의 조부로 진흥왕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 하였으나 개혁의 불만 세력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정적 동륜 일가를 감시하지 않는 등 치밀하지 못한 성격과 주변 인물 역시 잘 포용하지 못한 한계를 노정한 불운의 군주이다. 김용춘(비형) 진지왕의 유복자이자 김춘추의 생부. 아비의 폐위로 어미와 떨어져 진평왕의 왕궁에서 고독한 성장기를 보낸 비운의 인물. 세간에서는 비형으로 불렸다. 권토중래의 꿈을 간직하며 휘하의 무리를 키웠으나 아들 춘추의 입지와 장래를 위해 진평왕에게 저항하지 않고 춘추의 정치적 초석을 다져주며 끝없이 희생하는 삶을 살았다. 김춘추의 성장에 가장 강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문희 김춘추의 부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을 줄 아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여인으로 시련과 영광을 김춘추와 함께 하며 내조를 묵묵히 수행해 가는 존재이다. 김유신 비록 왕이 되진 않지만 상대의 마음을 굴복시켜 죽음으로 충성할 수 있게 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가는 지장. 의도적으로 김춘추에게 접근하여 동생 문의와 결혼시키고 상대에게 충성을 다해 끝까지 보필하였다. 고구려 멸망을 이룬 이후 와석종신으로 영예로운 일생을 마감한다. 선덕왕(덕만, 재위 632~647) 진평왕의 딸로 아비의 왕권강화를 등에 업고 신라 최초로 여왕의 자리에 오른 공주. 이름은 덕만. 지혜와 덕성은 겸비하였으나 여자라는 약점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개혁을 한 번도 추진하지 못하고 불교에 빠져 맹신을 일삼았다. 비담이 일으킨 대규모 난의 와중 절명하는 비운의 여자. 일찍이 결혼하였으나 자식을 두지 못했다. 알천 진평왕이 덕만의 왕위계승을 부탁한 고명대신이자 당대의 명장. 자신의 안위와 영달에만 연연한 춘추전국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진덕왕 대를 거치며 소리 없이 거세된다. 무왕(재위 600~641) 성왕의 손자로 『서동요』의 주인공. 나머지 아들들을 왜로 보내면서까지 의자를 태자로 책봉하는 등, 의자를 통해 왕실의 안정과 백제의 중흥을 간절히 염원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결국 빗나가 의자의 손에 의해 백제는 멸국의 화를 당하게 된다. 의자왕(재위 641~660) 백제의 마지막 임금. 해동증자의 별칭을 얻으며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신라를 파국 직전으로 몰고 갔다. 전제정치로 민심을 잃었고 결국 김춘추가 주도한 나당연합군의 외침에 의해 몰락한 인물. 당하에 꿇어앉아 김춘추에게 술잔을 치고 당에 끌려가는 수모를 겪은 끝에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다. 연개소문 무장 봉기를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한 후 고구려의 권력을 장악한 무부. 당과의 항쟁을 주도하였으나 직설적이고 독선적인 성격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크게 얻지 못했고 전제적인 정치를 행했다. 그의 사후 고구려 왕조는 명운을 다하고 만다. 품석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고 김춘추의 첫째 사위가 된 인물. 비겁하고 비열한 성격의 호색한이다. 대야성 성주로 있었으나 민심을 잃어 성을 사수하지 못했고 백제군에 투항하였으나 처자와 함께 몰살한다. 김유신에게 군권을 이양하는 계기를 제공한 장본인이다. 당 태종(재위 626~649) 자신의 정적은 누구를 막론하고 처단하는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 당의 2대 제왕으로 장안을 찾아온 김춘추와 협상을 타결하고 신라를 위해 정치적 후원을 다하나 백제의 멸망을 보지 못하고 죽고 만다. 진덕왕(승만, 재위 647~654) 김유신의 적극적 후원으로 선덕왕의 뒤를 이은 신라의 두 번째 여왕. 즉위 이후 선덕왕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하나 그녀 역시 김춘추 세력의 반발에 밀려 제대로 된 개혁 한번 못하고 주저앉아버린다. 당 고종(재위 649~683)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당나라 3대 제왕으로 김춘추와 정치 동맹을 유지하며 신라를 도와주는 척 거병해 백제를 멸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소정방에게 신라 토벌을 명하는 등 한반도 전체를 삼키려 획책한 양면성의 소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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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에 편중된 고대사 편식에 김춘추를 권한다
고대사 열풍이 대단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얼마 전부터 TV 사극의 주무대가 고대사로 넓혀진 탓이 크다. 조선왕조나 고려의 한정된 영역을 넘어 고대사로 그 영역을 넓힌 것이다. 우리의 시원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고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에 한숨짓는 이들이 있다. 바로 역사학자들. 그들이 한숨짓는 이유는 고구려사에만 편중된 고대사 편식, 고증과 사료에 입각하지 않은 서술과 묘사로 잘못된 역사관이 유포될 우려, 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중국의 ‘동북공정’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김춘추, 외교의 승부사』의 출간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우선 고구려가 아닌 신라를 이야기 한다는 점이 그렇다. 그리고 대부분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 내막은 베일에 가려진 김춘추와 그 일가를 중심으로 고대사 읽기를 하고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의 저자 박순교는 신라사, 특히 김춘추를 외면하는 경향에 대한 섭섭함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다. 우리는 5백여 년간의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한 중국 진시황의 업적은 줄줄이 꿴다. 하지만 고조선 멸망 이후 8백여 년의 분열을 종식한 김춘추(태종 무열왕)에는 무심하다. 고대사 자료의 쌍벽이라 할『삼국사기』와『삼국유사』가 모두 김춘추의 혈통과 등장을 기점으로 전후시기를 나누고 있다. 그렇다면 김춘추에 대한 우리의 망각과 홀대는 너무 심하지 않은가. 태종 무열왕과 김춘추의 관계를 묻는 질문이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올라오는 것을 보면 저자의 이런 토로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고증과 사료에 충실하지 않은 서술은 판타지에 불과하다 이런 실정에서 각종 고대사 관련 영상물과 책들이 위험수위를 넘어선 지 오래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정확한 고증과 사료에 입각하지 않은 서술이나 묘사로 일관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한 편의 무협물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물론 자료의 절대 부족이라는 고대사의 한계를 감안하면 이들의 과도한 상상력은 정당방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상상력은 자료를 근거로 발휘되어야 한다. 특히 역사 관련 서술의 경우 정확한 사료 검증과 해석은 필수조건이다. 『김춘추, 외교의 승부사』는 넘쳐나는 싸구려 상상력들과 달리, 사실에 기초한 치밀한 묘사와 서술로 잘못된 역사적 사실관계를 바로 잡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 뒤에는 ‘김춘추의 집권과정 연구’를 주제로 한 저자의 논문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다. 그만큼 고증과 사료에 충실한 책이다. 책 사이사이에 인용된 관련 사료와 논문이 대표적 예다. 역사, 사실史實事實대로 이런 사료와 논문은 글의 생생함을 더한다. 저자는『삼국사기』,『삼국유사』,『송서』,『양서』,『구당서』,『일본서기』,『동경잡기』,『신증동국여지승람』등 풍부한 사료와 자료를 우리에게 내보인다. 이들은 저자의 연구 논문에 바탕이 되었던 사료들이다. 이런 사료적 정확성과 치밀한 고증은 단지 호기심이나 흥미에 그치지 않고, 역사를 종합적이고 다차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흥미 위주의 역사에서 탈피하여 역사를 통한 사고의 폭을 넓히고, 함께 생각해 보자고 권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史實?事實)들은 저자의 상상력과 결합해 독자들을 역사적 현장으로 이끈다. 김유신이 혼전 임신이 발각된 동생 문의를 분형에 처하려는 순간의 긴박감과, 이를 막으려 말을 내달려 오는 김춘추의 모습은 손에 잡히듯 생생하다. 물론 아무리 자료가 많아도 역사 그대로를 복원할 수는 없기 마련이다. 그러나 저자는 고미술 복원사의 자세로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리고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인물들을 재발견하는 것도 흥미롭다. ‘김용춘’이라는 인물이 그렇다. 김용춘은 비형이라고도 불리며, 진지왕의 유복자이자 김춘추의 생부다. 우리에게 ‘도화녀’로 알려진 여인이 바로 그의 어머니. 그는 극적인 출생 배경과 불행한 성장 과정을 겪지만, 권토중래를 꿈꾸는 왕손으로서 면모를 일신하여 새로운 인물로 거듭난다. 또한 저자는 역사적 인물의 감정까지 섬세한 문법으로 읽어낸다. 이는 집권한 김춘추가 김유신을 끌어안기 위해 어린 딸 지소를 혼인시킬 때 홀로 고뇌하는 장면과 같은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왕권을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군주의 모습과 예순을 훌쩍 넘긴 한 사내에게 딸을 시집보내야 하는 아비의 슬픔이 절묘하게 묘사된다. 이와 같이 이 책은 ‘팩션faction’의 틀을 가지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사료 부족으로 생긴 여백을 채우는 차원에서 읽는 맛을 더하는 정도의 서술 태도를 취하고 있다. 사료를 근거로 한 상상이 차지도 넘치지도 않는 수위에서 조절된 것은 이 책의 미덕이라 할 수 있다. 전?위 압박외교를 제대로 보여준 외교 승부사 김춘추 그렇다면 이 책은 김춘추를 어떻게 재현하고 있는가? 저자는 시대적 몰입을 위해 642년에 발생한 ‘대야성 싸움’으로 시작한다. 642년은 중요한 해다. 백제 의자왕은 왕성한 혈기로 즉위한 지 2년 만에 신라를 공격, 40여 개의 성을 빼앗았다. 이어 그해 8월, 백제 장군 윤충이 대야성을 합락하기에 이른다. 문제는 당시 대야성의 성주가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이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 일가, 즉 김춘추의 딸 고타소와 손자들이 몰살당한다. 642년은 고구려에도 의미 있는 해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살해하고 집권을 장악한 쿠데타가 있었다. 이 시점에 김춘추가 고구려행을 감행한다. 목적은 백제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지원군 요청. 하지만 당시 백제와 고구려는 신라를 공격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므로 그 요청이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다. 저자는 여기에 김춘추의 치밀한 계산이 있었다는 해석을 가한다. 자신의 사위 김품석이 성주로 있었던 대야성 함락은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큰 타격이었다. 특히 사위의 불륜이 대야성 참패에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신라 내부에서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은 모두 김춘추를 겨냥한 것이었다. 이렇게 궁지에 몰린 그가 꺼낸 든 카드가 바로 아무도 예상 못한 고구려행이었다. 물론 김춘추와 연개소문의 만남, 요즘 말로 하면 양국 정상회담은 결렬되었다. 하지만 김춘추는 노림수를 둔 셈이다. 김춘추는 여러 가지 정치 외교적 행보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한편, 고구려행이 죽음을 각오한 것임을 신라 내부에 홍보하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대야성 사건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성과는 ‘당’을 압박한 것. 동맹관계를 주저하는 당을 압박하기 위해 김춘추는 당의 최대 적인 고구려와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사인을 확실히 보낸 것이다. 이로써 신라와 당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되었고, 648년 대망의 당나라 방문을 통해 나당동맹을 완성한다. 그리고 차기 왕위 계승자로서의 입지를 굳힌다. 이것이 김춘추표 전방위 압박외교의 진수다. 마치 스포츠에 볼 수 있는 ‘올코트 프레싱all- court pressing(압박수비)’을 연상시킨다. 외교가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깨달은 김춘추의 탁월한 전술이라 할 수 있다. 김춘추의 외교전략은 주변국의 동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외교정책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국제관계에서 눈치만 보며 소극적으로 대응하기보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능동적으로 한 발 앞서 행동해 주도권을 장악하라 가르친다. 김춘추가 활약했던 당시 신라는 약소국이었고, 대내외적으로 위기 상황이었기에 현재 우리의 현실 외교에 좋은 참고가 될 수 있다. 그만큼 김춘추는 행동하는 외교정책가이자 실리주의자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