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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번역에 관한 노트 머리말: 미지의 걸작 1. 준비 기간 2. 『자본론』의 탄생 3. 『자본론』 출간 이후 그 운명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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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은 일반적으로 경제학 분야의 저서로 분류된다. 그러나 카를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쪽으로 연구의 중심을 옮긴 것은,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철학과 문학의 기초를 힘들게 쌓아올리고 난 뒤에야 비로소 이루어진 일이었다. 바로 이러한 지적 기반이 그의 정치경제학 연구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 자신이 개인적으로 겪은 소외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그는 인간과 인간을 서로 격리시키고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로부터도 소외되게 만드는 경제체제 분석에 맹렬하게 집중했다. 그에게는 소외 현상을 낳는 세계란 생명이 없는 자본과 상품이 괴물과도 같은 힘으로 인간을 노예로 전락시키고 있는 곳이었다. (21페이지)
바로 여기에, 아직은 태속에 있는 상태이기는 하나 『자본론』의 본질적인 주제가 들어 있다. 자본주의가 겉으로 이루어낸 경제적 승리가 아무리 대단한 것으로 보여도, 그것은 인간을 다른 상품과 교환할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시켰다는 점에서 여전히 재앙이다. 인간이 그 자신을 역사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 내세울 때까지는, 이 자본주의의 전제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것이다. (32페이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서로에게 완벽한 조합이었다. 마르크스는 지식의 부유함을 가지고 있었고, 엥겔스는 부유함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마르크스는 잉크로 범벅이 된 수많은 교정과 보완을 통해 글을 느리고 고통스럽게 쓴 반면에, 엥겔스의 필체는 깔끔했고 사무적이었으며 우아했다. 마르크스는 그의 대부분의 생애를 혼란과 가난에 시달리며 살았고, 엥겔스는 수입이 나오는 정규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당한 양의 책과 산문과 언론 관련 저작의 출간을 지속할 수 있었다. (37페이지) 자본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프롤레타리아를 ‘비참하게 만들고’ 빈곤에 처하게 한다. 뭔가 좀 안다고 하는 적지 않은 지식인들은 이 문장을 자본주의의 번영이란 노동자의 임금을 절대적 수준으로 깎아내리고 그 생활수준을 하향조정함으로써 가능하다는 뜻으로 읽어왔다. 그래서 이들은 마르크스의 논리를 이런 식으로 아주 쉽게 조롱했다. “오늘날 노동자들의 생활을 좀 보라고. 차도 있고 전자레인지도 가지고 있잖아? 어째서 저들이 가난하고 비참한가” 미국의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은 마르크스의 저작 전체는 노동자들의 빈곤화란 “전혀 일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아주 간단하게 무시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 마르크스가 말했던 것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는 임금의 절대적 하락이 아니라 ‘상대적’ 하락이 일어나게 된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현실에서 입증할 수 있는 진실이다. 잉여가치 20퍼센트의 증가를 누리고 있는 그 어떤 기업도 임금 20퍼센트 인상이라는 방식으로 그것을 노동자에게 몽땅 내주는 경우는 없다. “따라서 자본 축적이 이루어지는 정도에 비례해서 보자면, 노동자는 그의 임금이 높든 낮든 결국에는 보다 악화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여기서 핵심적으로 주목되는 문장은 “그의 임금이 높든 낮든”이다. 노동자가 아무리 많은 자동차와 전자레인지를 가질 수 있다고 해도 노동자는 자본가에 비해 날이 갈수록 뒤처질 수밖에 없다. (99-100페이지) 『자본론』에는 바로 이 찰스 디킨스의 문학적 질감이 적지 않게 담겨 있으며, 마르크스가 좋아한 이 작가의 묘사와 주장에 동감하는 대목이 여기저기 드러나 있다. 찰스 디킨스식의 표현을 떠올리게 하는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부르주아 옹호론자들은, 어떤 특별한 테크놀로지를 생산에 적용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사회적 진보를 가로막는 적이며 이런 사람은 기계라는 것을 전혀 사용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들을 어떻게 비꼬았을까? 그는 찰스 디킨스의 작품 속 인물인 빌 사이크스를 등장시킨다. 이런 식의 논리가 바로 이 그 잘나신 빌 사이크스의 논법이다. 이 흉악한 인물은 재판정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배심원 여러분, 이 상인의 목은 칼로 찔린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고 이 칼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칼을 모두 없애버려야 합니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칼이 없다면 농업이고 상거래고 뭐가 되겠습니까? 칼은 해부용으로도 쓰이고 수술에서도 긴요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축제가 벌어진 식탁에서 우리를 용의주도하게 도와주는 도구 아닌가요? 우리가 만일 칼을 모조리 없애고 만다면, 그건 야만의 심연으로 던져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물론 빌 사이크스는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풍자적으로 내용을 개작한 것이다.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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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발췌
『자본론』은 일반적으로 경제학 분야의 저서로 분류된다. 그러나 카를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쪽으로 연구의 중심을 옮긴 것은,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철학과 문학의 기초를 힘들게 쌓아올리고 난 뒤에야 비로소 이루어진 일이었다. 바로 이러한 지적 기반이 그의 정치경제학 연구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 자신이 개인적으로 겪은 소외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그는 인간과 인간을 서로 격리시키고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로부터도 소외되게 만드는 경제체제 분석에 맹렬하게 집중했다. 그에게는 소외 현상을 낳는 세계란 생명이 없는 자본과 상품이 괴물과도 같은 힘으로 인간을 노예로 전락시키고 있는 곳이었다. (1장 ‘준비 기간’에서) 바로 여기에, 아직은 태속에 있는 상태이기는 하나 『자본론』의 본질적인 주제가 들어 있다. 자본주의가 겉으로 이루어낸 경제적 승리가 아무리 대단한 것으로 보여도, 그것은 인간을 다른 상품과 교환할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시켰다는 점에서 여전히 재앙이다. 인간이 그 자신을 역사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 내세울 때까지는, 이 자본주의의 전제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것이다. (1장 ‘준비 기간’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서로에게 완벽한 조합이었다. 마르크스는 지식의 부유함을 가지고 있었고, 엥겔스는 부유함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마르크스는 잉크로 범벅이 된 수많은 교정과 보완을 통해 글을 느리고 고통스럽게 쓴 반면에, 엥겔스의 필체는 깔끔했고 사무적이었으며 우아했다. 마르크스는 그의 대부분의 생애를 혼란과 가난에 시달리며 살았고, 엥겔스는 수입이 나오는 정규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당한 양의 책과 산문과 언론 관련 저작의 출간을 지속할 수 있었다. (1장 ‘준비 기간’에서) 자본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프롤레타리아를 ‘비참하게 만들고’ 빈곤에 처하게 한다. 뭔가 좀 안다고 하는 적지 않은 지식인들은 이 문장을 자본주의의 번영이란 노동자의 임금을 절대적 수준으로 깎아내리고 그 생활수준을 하향조정함으로써 가능하다는 뜻으로 읽어왔다. 그래서 이들은 마르크스의 논리를 이런 식으로 아주 쉽게 조롱했다. “오늘날 노동자들의 생활을 좀 보라고. 차도 있고 전자레인지도 가지고 있잖아? 어째서 저들이 가난하고 비참한가” 미국의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은 마르크스의 저작 전체는 노동자들의 빈곤화란 “전혀 일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아주 간단하게 무시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 마르크스가 말했던 것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는 임금의 절대적 하락이 아니라 ‘상대적’ 하락이 일어나게 된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현실에서 입증할 수 있는 진실이다. 잉여가치 20퍼센트의 증가를 누리고 있는 그 어떤 기업도 임금 20퍼센트 인상이라는 방식으로 그것을 노동자에게 몽땅 내주는 경우는 없다. “따라서 자본 축적이 이루어지는 정도에 비례해서 보자면, 노동자는 그의 임금이 높든 낮든 결국에는 보다 악화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여기서 핵심적으로 주목되는 문장은 “그의 임금이 높든 낮든”이다. 노동자가 아무리 많은 자동차와 전자레인지를 가질 수 있다고 해도 노동자는 자본가에 비해 날이 갈수록 뒤처질 수밖에 없다. (2장 ‘『자본론』의 탄생’에서) 『자본론』에는 바로 이 찰스 디킨스의 문학적 질감이 적지 않게 담겨 있으며, 마르크스가 좋아한 이 작가의 묘사와 주장에 동감하는 대목이 여기저기 드러나 있다. 찰스 디킨스식의 표현을 떠올리게 하는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부르주아 옹호론자들은, 어떤 특별한 테크놀로지를 생산에 적용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사회적 진보를 가로막는 적이며 이런 사람은 기계라는 것을 전혀 사용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들을 어떻게 비꼬았을까? 그는 찰스 디킨스의 작품 속 인물인 빌 사이크스를 등장시킨다. 이런 식의 논리가 바로 이 그 잘나신 빌 사이크스의 논법이다. 이 흉악한 인물은 재판정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배심원 여러분, 이 상인의 목은 칼로 찔린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고 이 칼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칼을 모두 없애버려야 합니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칼이 없다면 농업이고 상거래고 뭐가 되겠습니까? 칼은 해부용으로도 쓰이고 수술에서도 긴요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축제가 벌어진 식탁에서 우리를 용의주도하게 도와주는 도구 아닌가요? 우리가 만일 칼을 모조리 없애고 만다면, 그건 야만의 심연으로 던져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물론 빌 사이크스는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풍자적으로 내용을 개작한 것이다. (2장 ‘『자본론』의 탄생’에서) 1878년, 마르크스를 인터뷰한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의 한 기자는 “마르크스와의 대화는 어느 한 줄기로만 계속해서 흐르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그의 서재에 놓여 있는 책의 분량만큼이나 다채로웠다”라고 썼다. 그는 또한 이렇게 덧붙였다. “한 인간은 대체로 그가 읽은 책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게다가 그 서재를 잠깐만 훑어봐도 거기에는 셰익스피어, 디킨스, 새커리, 몰리에르, 라신, 몽테뉴, 베이컨, 괴테, 볼테르, 페인, 그리고 영국과 미국, 프랑스 정부의 공식 통계자료, 러시아어,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등으로 된 정치적 저작들을 비롯해서 무수한 책들이 있다. 그러니 이런 책을 읽고 있는 인물이라면, 그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정말이지 엄청난 책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76년 『카를 마르크스와 세계 문학』을 쓴 프라워 교수는 이 450페이지 분량의 책 전체를 마르크스가 인용한 문학작품 분석에 집중했다. 『자본론』 제1권만 보더라도, 『성서』, 셰익스피어, 괴테, 밀턴, 볼테르, 호메로스, 발자크, 단테, 실러, 소포클레스, 플라톤, 투키디데스, 크세노폰, 디포, 세르반테스, 드라이든, 하이네, 베르길리우스, 유베날리스, 호라티우스, 토머스 모어, 새뮤얼 버틀러를 비롯해서, 뱀파이어와 늑대인간 같은 공포물, 길거리에서 판매되는 독일어 싸구려 소설, 영어로 된 연애소설, 민요, 노래, 광고용 노래, 멜로드라마, 익살극, 신화, 속담 등 그 인용한 작품과 내용, 장르는 엄청나다. (2장 ‘『자본론』의 탄생’에서)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활용한 문학적 스타일이란, 마치 두꺼운 빵에 잔뜩 바르는 잼처럼 경제학 개념을 설명할 때 허용되지 않는 어떤 과장되고 현란한 표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겉으로만 보면 놓치기 쉬운 사물의 애매한 본질을 드러내기에 가장 적절한 언어이자, 기존의 정치경제학이나 인류학 또는 역사와 같은 분야의 틀로만 한정할 수 없는 존재론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본론』은 전체적으로 대단히 독특한 작품이다. 이러한 작품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으며, 바로 그러한 까닭에 이 책은 그토록 오랫동안 계속해서 외면당하던지 아니면 오해되어왔던 것이다. (2장 ‘『자본론』의 탄생’에서) 1997년 10월, 『뉴요커(New Yorker)』의 경제기자 존 캐시디는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영국 출신의 한 투자가와 나눈 대화를 기사에 실었다. “월가에서 일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마르크스가 옳았다고 더더욱 확신하게 된다. 마르크스의 이론을 부활시켜 일관성 있는 이론을 만들어내는 경제학자가 있다면, 노벨상을 받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최고의 접근법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자신하는 바이다.” 그와의 대화 이후 캐시디는 난생처음으로 마르크스를 읽고 그와 인터뷰한 영국 투자가의 말이 옳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계화, 불평등, 정치적 부패, 독점화의 경향, 기술적 진보, 고급문화의 쇠락, 기력이 빠져가는 현대적 존재의 본질 등에 대한 마르크스의 문장은 매혹적이다. 이런 마르크스의 논지가 주목한 사안들은 오늘날 경제학자들이 새롭게 직면하고 있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 스스로도 마르크스의 족적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다.” (3장 ‘『자본론』출간 이후 그 운명’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