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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들이기
2. 베어지지 않는 것들 3. 국물 4. 언어와 울음 5. 밥 6. 아무 일도 없는 바다 7. 노을과 화약 연기 8. 사쿠라 꽃잎 9. 비린 안개의 추억 10. 더듬이 11. 날개 12. 달무리 13. 옥수수 숲의 바람과 시간 14. 백골과 백설 15. 인후 16. 적의 해, 적의 달 17. 몸이여 이슬이여 18. 소금 19. 서늘한 중심 20. 빈손 21. 볏짚 22. 들리지 않는 사랑 노래 23. 인물지 |
金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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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들은 모두 각자의 개별적인 울음을 울고 있었다. 그들을 울게하는 죽음이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죽음을 우는 그들의 울음과 그 울음이 서식하는 그들의 몸은 개별적인 것으로 보였다.
--- p.112-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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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94 이것이 환상이었을까. 나는 가난했다. 적 안에 내포된 죽음만이 나의 재산이었다. 그것이 환상이었다 하더라도, 돌아섯 펼치는 새의 양쪽 날개는 대안이 없는 환상이었다. 수영앞바다 전법훈련장 물 위에서 나는 그 양쪽 날개를 쉴새없이 퍼덕거렸다. 물은 늘 거칠었다고, 물은 노에 저항했다. 배는 그 저항의 힘으로만 나아갔다. 물은 퍼덕거리려는 날개를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 돌아서서 펼치고, 조이면서 다가올 때, 노를 잡은 격군들의 몸은 북과 겉돌았다. 북에는 날개의 환상이 담겨있었고 노는 물에 잠겨 있었다. 중군 전위에서 흔드는 깃발의 신호가 양쪽 날개끝까지 연결되지 않았다. 두 날개의 분기점에 중군 대열을 형성할 때, 몰려드는 배들이 부딪혀 노가 부러졌고 고물이 깨어졌다. 방향을 전환시키는 쇠나팔이 울릴 때마다 격군들의 함성이 터져나왔고 감독 군관의 고함 소리는 목이 쉬어 있었다. 날개는 무거웠다. 날개는 좀처럼 펼져지지 않았다. --- p.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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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녹슨 글자들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청춘의 날들은 흩어져가고, 널린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 날리네. - 이 칼을 쓰던 자를 죽였느냐? - 배를 나포할 때 스무 명을 사살했습니다. 그때 죽은 자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모두 다 젊은 녀석이었습니다. - 이 또한 모진 놈이었을게다. 적의칼을 한 자루씩 들여다보면서, 나는 하루 종일 배를 저어온 안위를 데리고 그런 하나마나한 잡소리를 하고 있었다. 말은 비에 젖고, 청춘은 피에 젖는구나...... 청춘의 날들은 흩어져가고, 널린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 날리네...... 젊은 것들의 글이었다. 바다에서 내가 죽인 무수한 적들의 백골이 내 마음에 떠올랐다. 내 칼에 새겨넣은 물들일 염(染)자도 내 마음에 떠올랐다. 내 젊은 적들은 찌르고 베는 시심의 문장가들이었다. 내 젊은 적들의 문장은 칼을 닮아 있었다. 이러한 적들 수만 명이 경상 해안에 집결해 있었다. 널린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 날리네...... 내가 죽인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이 날려도 나는 이 바다 위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날 저녁에 술을 먹여 안위를 재웠다. 명량에서 나는 머뭇거리는 안위를 배 위에서 베려고 했다. 안위는 그 후 깊고 조용한 무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가 잘 죽을 수 있는 자리를 찾고 있음은 확실해 보였다. 그날 밤 안위는 취했다. 적의 내륙 기지에 조선 백성 수백 명이 끌려와 있고 이들이 모두 적의 최일선으로 배치되어, 아군이 순천을 공격한다면 우선 이 전진 배치된 조선 백성들과 부딪힐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안위는 무표정했다. 안위는 자꾸 마셨다. --- pp. 80~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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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가을에 나는 다시 초야로 돌아왔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 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서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이다.
초야의 저녁들은 헐거웠다. 내 적막은 아주 못 견딜 만하지는 않았다. 그해 겨울은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마을의 길들은 끊어졌고 인기척이 없었다. 얼어붙은 세상의 빙판 위로 똥차들이 마구 달렸다. 나는 무서워서 겨우내 대문 밖을 나가지 못했다. 나는 인간에 대한 모든 연민을 버리기로 했다. 연민을 버려야만 세상은 보일 듯싶었다. 연민은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나는 자주 아팠다. 눈이 녹은 뒤 충남 아산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사당에 여러 번 갔었다. 거기에, 장군의 큰 칼이 걸려 있었다. 차가운 칼이었다. 혼자서 하루 종일 장군의 칼을 들여다보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그 칼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영웅이 아닌 나는 쓸쓸해서 속으로 울었다. 이 가난한 글은 그 칼의 전언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一字陣)으로 적을 맞으리. 다시, 만경강에 바친다. - 2001년 봄 김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