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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의 유려한 시 이야기
가장 신뢰받는 평론가 황현산의 시 이야기. 그가 소환하는 시들은 지극히 다양하며, 그 시들이 안내하는 세상은 광활하게 넓다. 황현산의 유려한 문장을 따라 시를 읽다 보면, 짧은 시 속에 웅크리고 있던 인생사와 세상사의 온갖 표정이 한 순간에 가슴을 뛰게 만든다.
2015.11.17.
에세이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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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화집 『우물에서 하늘 보기』에 부쳐 008
01 이육사의 「광야」를 읽는다 013 02 사치와 사보타주 023 03 이곳의 삶과 다른 시간의 삶 - 작가 탄생의 서사 033 04 딴 나라에서 온 사람처럼 043 05 갱피 훑는 여자의 노래 053 06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061 07 섬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 071 08 [임을 위한 행진곡]을 위해 083 09 이 죄악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091 10 이 비통함이 잊힐 것이 두렵다 099 11 잘 가라, 아니 잘 가지 말라 103 12 미친 사내가 건너가려던 저편 언덕, 분명 아름다울 것이다 113 13 창조와 희생 123 14 폭력 무한 133 15 길 떠나는 가족 143 16 추석의 밝은 달 아래 153 17 만해의 ‘이별’ 163 18 박정만의 투쟁 175 19 최승자의 어깨 185 20 신춘문예를 생각한다 195 21 백석의 『사슴』 - 잃어버린 낙원과 잃어버린 깊이 205 22 윤극영, 어린이 한국 215 23 이용악의 고향 227 24 사물이 된 언어 또는 무의미의 시 237 25 황진이 - 사랑의 완성 247 26 시인의 적토마 255 27 시, 무정한 깃발 263 |
Hwang Hyunsan,黃鉉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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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의 저 너머를 꿈꾸지 않는 삶은 없다. 또 다른 삶에 대한 의지가 없다면 물질이 이 까다로운 생명을 왜 얻어야 했으며, 그 생명에 마음과 정신이 왜 깃들었겠는가. 예술가의, 특히 시인의 공들인 작업은 저 보이지 않는 삶을 이 보이는 삶 속으로 끌어당긴다. 그의 사치는 저 세상에서 살게 될 삶의 맛보기다. 그 괴팍하고 처절한 작업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은 이 분주한 달음박질에서 한 걸음 비켜서서, 내가 왜 사는지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묻기를 두려워하는 지쳐빠진 마음이다.
---「02. 사치와 사보타주」중에서 랭보는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후세의 문학연구자들이 ‘투시자의 편지’라고 부르게 될 편지를 선배 시인 드므니에게 보내며, 이렇게 말했다. “내 말은 투시자여야 한다는 것이며, 투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모든 감각의 길고 엄청나고 이치에 맞는 착란을 통해 투시자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감각이 착란에 이른다는 것은 광인이 된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투시자의 착란은 전면적이고 장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이치에 맞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심각한 광기를 자각하며 그 경험을 논리적인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을 착란이나 광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랭보가 말하는 ‘모든 감각의 착란’은 이 세상에 몸을 두고 살면서도 저 소금장수처럼 다른 세상의 감각을 확보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조선시대의 노비가 양반 상놈이 없는 세상을 본다면 그것은 벌써 착란이며, 나무 위에 허공이 있으니 그 나무가 꽃을 피워 올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벌써 투시자다. 허공은 모든 것이 가능한 자리이며, 다른 세상이란 저 허공과 같지 않는가. 꽃나무는 여기 있지만 꽃이 필 자리는 저 허공이 아닌가. ---「03 작가 탄생의 서사」중에서 “그동안 가난했으나 행복한 가정이었는데, 널 보내니 가난만 남았구나.” 단원고의 한 학부모가 이런 말을 써서 팽목항에 내걸었다. 이 짧은 말의 밑바닥에 깔려 있을 절망감의 무한함까지 시간의 홍진 속에 가려지고 말 것이 두렵다. 우리는 전란을 만난 것도 아니고 자연재해에 휩쓸린 것도 아니다. 싸워야 할 적도, 원망해야 할 존재도 오직 우리 안에 있다. 적은 호두 껍데기보다 더 단단해진 우리의 마음속에 있으며, 제 비겁함에 낯을 붉히고도 돌아서서 웃는 우리의 나쁜 기억력 속에 있다. 칼보다 말이 더 힘 센 것은 적이 내부에 있을 때 아닌가. 죽은 혼의 가슴에 스밀 말을, 짧으나마 석삼년이라도 견딜 말을 어디서 길어 올리고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 ---「10. 이 비통함이 잊힐 것이 두렵다」중에서 시인은 운이 없다. 그러나 운이 좋은 자는 어디 있는가? 금도끼를 가진 자는 금도끼를 알아보지 못한다. 알아보지 못하는 금도끼는 이미 금도끼가 아니다. 적토마를 지닌 자는 제 적토마를 비루먹은 말로만 여긴다. 알아보지 못하는 적토마는 적토마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시인들에게 말한다. 그 초라한 쇠도끼를 뽐냄으로써 이 세상 어디에건 찬란한 금도끼가 단단히 숨어 있게 하라고. 언제나처럼 비루먹은 말을 타고 가라고. 모든 적토마들이 지쳤을 때도 그대의 말은 느릿느릿 가던 길을 가리라고. 비루먹은 말은 우리 열정이 들끓던 지난날의 적토마였기에, 또 다른 날의 적토마가 아닐 수 없지 않겠는가. 시 쓰기는 끊임없이 희망하는 방식의 글쓰기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시가 말하려는 희망은 달성되기 위한 희망의 아니라 희망 그 자체로 남기 위한 희망이다. 희망이 거기 있으니 희망하는 대상이 또한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 희망이다. 꽃을 희망한다는 것은 꽃을 거기 피게 한 어떤 아름다운 명령에 대한 희망이며, 맑은 물을 희망한다는 것은 물을 그렇게 맑게 한 어떤 순결한 명령에 대한 희망이다. 시를 읽고 쓰는 일은 희망을 단단히 간직하는 일이다. ---「26. 시인의 적토마」중에서 이 절망적인 자기 처단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가로막고, 그 두 세계 사이에 온갖 관습의 울타리를 만들었던, 그래서 시인의 순정한 정신을 타락과 무기력 속에서 살게 했던 저 낡은 세상에 대한 복수와 같다. 산문은 이 세계를 쓸고 닦고 수선한다. 그렇게 이 세계를 모시고 저 세계로 간다. 그것은 시의 방법이 아니다. 시가 보기에 쓸고 닦아야 할 삶이 이 세상에는 없다. 시는 이를 갈고 이 세계를 깨뜨려 저 세계를 본다. 시가 아름답다는 것은 무정하다는 것이다. ---「27. 시, 무정한 깃발」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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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는 한 편 한 편마다 무언가 극단적인 것이 있다.”
이 시대의 낭만가객, 평론가 황현산이 겨울을 여는 시화詩話집을 선보였다. 『우물에서 하늘 보기』. 한국일보에서 2014년 초부터 연재했던 27편의 이야기들을 한데 모았다. 가히 ‘시 마을에서 세상 보기’라 할 만하다. 우물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이 필경 좁고 편협하다면 그가 시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넓고 여유로우며 다양하되 처연하다. 시가 꿈꾸는, 응당 꿈꾸어야 하는 세상에 대한 저자의 간절함이 편마다 읽는 이의 가슴을 건드린다. 이육사를 필두로 한용운, 윤극영, 서정주, 백석, 유치환, 김종삼, 김수영, 보들레르, 진이정, 최승자 등의 시편들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시뿐만이 아니다. [베티블루]와 [동사서독] 같은 영화, [임을 위한 행진곡]과 [클레멘타인]과 [엄마 엄마] 같은 노래들, 구전민요들, 이중섭의 그림 [길 떠나는 가족] 등이 가리지 않고 초대되어 시화의 한 풍경을 자연스럽게 이루어낸다. 저자는 이 다양한 예술작품을 때로는 정면으로 바라보며 예술가의 진지한 예술론을 펼치기도 한다. 때로는 이야기와 경험담과 일화의 축과 축을 매개하는 고리 역할로, 때로는 세상을 바라보고 진단하는 커다란 창으로서 작품을 대하거나 응용하기도 한다. 어찌 예술작품뿐이겠는가. 우리가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세월호의 비극이, 참혹하고 참담한 윤 일병 사건이 시화집의 몇 편에 걸쳐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했다. 그 중에는 자신의 대학 동창이기도 한 어느 소설가와 함께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검은 차를 몰고 온 사나이들에게 끌려가 이제는 문학인들의 집이 된 남산의 어느 시설에서 내리 사흘 동안 “청동상”처럼 온몸에 퍼렇게 멍이 들도록 두들겨 맞고 저 ‘88올림픽’이 끝나던 날 숨을 거둔, 박정만이라는 무명시인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있다. 시로써 생의 한계와 가능성을 읽고 이해할 줄 아는 저자에게 위의 사건들은 차마 감당할 수 없는 세상 밖의 일이었다. 작품을 분석하는 예술론은 진지하지만 작품보다 유려하며, 작품의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그 시각은 보편적인 인간미가 넘친다. 바쁜 일상에 치여서, 그러나 언제나 ‘진실’의 편에 가까이 살아가는-그러려고 노력하는 소시민들이라면 평론가가 시화집마다에서 살짝살짝 펼쳐 보이는 명제와 의문과 이견들로부터 충분한 공감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인용된 시편들만도 그 숫자가 적지 않은 데다 그를 통해 전해주는 이야기의 폭과 방향성과 밀도에 차이가 있어 한데 묶고 보면 자칫 어수선하지 않을까 싶지만 그렇지는 않다. 본문에서 뽑은 문장에서처럼 ‘시란 무엇인가-무엇이어야 하는가’ ‘시인과 예술가의 삶은 어떠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저자의 물음이 한결같게 진지하게 읽는 이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는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