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서문
포르투갈 오비두스 신트라 스페인 코카 엘 레알 데 만사나레스 벨몬테 라 칼라오라 세고비아의 알카사르 프랑스 블루아 샹보르 셰농소 아제르리도 빌랑드리 조슬랭 오쾨니스부르 아일랜드 애쉬포드 성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성 글라미스 성 웨일즈 카디프 성 잉글랜드 윈저 성 워릭 성 뱀버러 성 도버 성 벨기에 그라벤스텐 네덜란드 마위데르슬롯 독일 노이슈반스타인 카이저부르크 마르크스부르크 하이델베르크 엘츠 스웨덴 칼마르 라트비아 룬달레 러시아 크렘린 폴란드 말보르크 체코 칼슈테인 흘루보카 오스트리아 호호슈테르비츠 페스퉁의 호헨잘츠부르크 로젠부르크 스위스 시용 그랑송 그뤼예르 이탈리아 페니스 칼란트 카스텔로 델 부온 콘실리오 카스텔 베세노 카스텔 툰 카스텔 델 몬테 미라마레 카스텔로 스포르체스코 카스텔 델로보 슬로베니아 프레드야마 헝가리 샤로슈퍼턱 에티오피아 곤다르 성 인도 델리의 레드 포트 조드푸르의 메헤랑가르 자이푸르의 자이가르 성 일본 히메지 캐나다 샤토 프롱트낙 미국 카스티오 데 산 마르코스 찾아보기 / 사진출처 / 참고문헌 |
|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간직한 블루아 성
프랑스 전역에는 5000여 개가 넘는 고성(古城)들이 있다. 특히 파리 남동쪽 내륙의 오를레앙부터 대서양 연안 낭트까지 펼쳐진 루아르 지방은 화려한 경치와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고성들로 유명하다. 루아르 강변에 세워진 블루아 성은 프랑수아 1세와 2세가 호화로운 궁정생활을 한 곳이며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이 성은 처음에는 블루아 백작 개인 소유였지만 루이 12세가 정권을 잡은 후 궁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프랑수아 1세가 밀애(密愛)를 나누던 샹보르 성 440개의 방, 60여 개의 계단, 365개의 벽난로, 작은 뾰족탑과 넓은 공원이 있는 샹보르 성은 원래 블루아 백작들의 사냥용 오두막이었던 것을 1519년 프랑수아 1세가 매입해 새로 지은 것이다. 건물 중앙을 짓는 데만도 1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1800명의 노동자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에 매혹되었던 프랑수아 1세는 샤토브리앙(Chateaubriand)의 표현처럼 ‘바람결에 머리카락 흩날리는 여인’ 같은 아라베스크 문양의 외형을 지닌 성을 만들었다. 1519년 시작된 샹보르 성 공사는 1547년까지 이어졌다. 성의 상단부에는 고전적인 이탈리아 양식의 지붕창, 누각, 꼬마탑, 작은 박공 등이 있다. 프랑수아 1세가 이곳을 거처로 삼은 이유는 사냥을 무척 즐겼던 데다가 성 근처에 살던 투리 백작 부인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화 속의 왕’을 꿈꾸던 루드비히 2세의 백조의 성: 노이슈반스타인 성 눈 덮인 산을 배경으로 초록 숲 한가운데 동화 속의 성처럼 솟아 있는 노이슈반스타인 성은 19세의 나이로 바이에른의 왕이 된 루드비히 2세가 지은 성이다. 1869년에 성을 짓기 시작하여 왕이 죽은 해인 1886년에 공사가 끝났다. 성을 짓기 위해 엄청난 자재와 굴착 작업이 필요했고 가파른 곳으로 자재를 실어 나르기 위해 도로공사를 해야 했다. 그리고 성 주변 조경을 위해 1879년에서 1880년 사이에만 5000톤이 넘는 사암과 510톤의 대리석, 40만 개의 벽돌을 사용했다고 한다. 성 내부의 징거스 홀에는 청동 샹들리에 8개와 촛대들이 있어 모두 600개의 초를 꽂을 수 있다. 또한 알현실에는 고딕 양식, 로마네스크 양식, 비잔틴 양식이 뒤섞인 모자이크가 있고 왕관 모양을 한 청동 샹들리에는 무게가 1톤이 넘는다. 당시 유행했던 네오고딕 스타일의 가구 외에도 루드비히 2세는 전기 초인종과 다기능 부엌 같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능들과 장치들을 설치하게 했다. 루드비히 2세를 숭배하던 사람들은 그를 ‘동화 속 왕’이라 불렀고, 루드비히 2세의 별난 씀씀이에 놀라 결국 그를 연금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대신들은 ‘미친 왕’이라고 불렀다. 모두 하나같이 호화로운 건물이었기 때문에 성을 짓는 데에는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그의 정적(政敵)들은 점점 더 격렬해졌고 성을 짓기 위해 빚도 늘어가서 결국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게 되었다. 루드비히 2세를 반대하던 세력들은 그를 정신병자로 내몰았고, 노이슈반스타인 성에서 끌어내 베르크 성에 감금시키고는 삼엄하게 감시했다. 결국 그는 1미터 50센티미터도 안 되는 호수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러시아 궁정의 극적인 사건과 비극의 무대: 크렘린 궁 중세 시대의 모든 러시아 도시에는 크렘린, 즉 요새가 있었다. 타타르어에서 유래된 ‘kremlin'이라는 단어는 공공기관과 종교단체가 주재했던 요새가 갖추어진 지역을 의미했다. 현존하는 크렘린 중에서 대문자로 시작되는 ’크렘린(Kremlin)‘은 모스크바에 있는 것을 말한다. 모스크바에 있는 크렘린은 차르가 통치하던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이후 소련 시절까지 이 나라의 심장부였다. 크렘린은 타타르인들의 공격으로 두 차례나 파괴되었다가 이반 3세에 의해 현재의 크기와 구도로 재건되었으며 그로부터 200년 동안 차르의 왕궁으로 쓰였다. 크렘린은 이반 4세의 통치, 자신이 이반 4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드미트리의 왕위 찬탈, 폴란드 군대의 수도 점령, 로마노프 왕조의 출현, 표트르 1세가 자신의 왕위 계승을 반대한 소피아 공주와 결탁해 반란을 일으켰던 근위대를 처형한 사건 등 러시아 궁정의 극적인 사건과 비극의 무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