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역자 서문
저자 서문 인사 "세계를 떠나는 관문일 뿐이다" "자연성과 고요한 시 자신의 "자아"를 향해 유랑하다 광상적인 비전을 찾아서 미술은 알려지지 않은 세계로 진입하는 모험이다 "그림은 예민한 감각으로 자체의 삶을 산다" 환상의 "느린 소용돌이"를 풀어놓다 "회화는 체험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체험이다" 아이러니를 방어적인 무기로 삼다 분위기 회화는 리듬, 비례, 그리고 초월의 감성이다 출생, 용해, 그리고 죽음이란 위대한 테마들 간략한 연대기 참고 문헌 인명 색인 찾아보기 |
|
로스코의 혼합은 모던 아트에서 정확하게 비견할 만한 것이 없는 일련의 빛을 발하는 색의 구조들을 산출했는데, 그것들은 모던 예술가들에 대한 보들레르 호소의 가장 심원한 의미로 “새로운” 것이다. 매우 새롭기 때문에 만약 로스코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모던 아트에서 특정한 색의 가능성들을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는 기술적인 위대함의 성취이다. 그러나 로스코의 진정한 천재성은 색이 아니라 그가 느낌의 언어를 창조한 데 있다. - 로버트 머더웰
--- p.184 |
|
이 책의 내용
로스코에 관한 한 가장 권위 있는 책!
이 책에 버금가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의 전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에서 매우 명성이 높고 전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진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70)의 풍부한 색조의 대형화, 특히 색면 회화는 1940년대 중반에 미국 미술계를 강타하면서 모더니즘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로스코는 자신의 기념비적인 캔버스를 “좀 더 계발적인 세계로 가는 패스포트”라고 말했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열 살 때 아버지의 부름으로 미국 오레곤 주로 옮긴 후 로스코는 동유럽 전통 미학에서 이탈한 적이 없다. 1920년대 초 장학금을 받고 예일 대학에서 2년 동안 수학하다가 아이비리그에서 일어난 유태인에 대한 인종차별로 인해 더 이상 장학금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뉴욕으로 가 뉴욕 화파의 환경에서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어려서 받은 러시아 문호 도스토예프스키, 그리스의 비극시인 아이스킬로스, 독일 철학자 니체의 영향은 지속된다. 색채 속으로 사라진 로스코 로스코에게 미술은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탐험할 수 있는 알려지지 않은 세계로 진입하는 모험이었다 그의 작품세계의 기반은 문학과 음악이었고, 재료는 내면의 삶, 내면의 체험이었다. 로스코의 숭고함, 한계, 천국과 지옥으로서의 형이상학적 고통이 그가 “비극적인” 것으로 부르기를 선호한, 그리고 색의 전통적 기능들을 부정한 대형 캔버스들 속에 내재해 있다. 열 살 때 러시아로부터 미국으로 온 로스코(본명 Marcus Rothkowitz, 1903~70)는 장학금을 받고 예일대학에 입학했지만 2학년 때 유태인 배척주의에 의해 장학금이 중단되자 자퇴하고 뉴욕으로 갔다.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1930년대에 뉴욕의 환경, 특히 젊은 예술가들이 거주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밀집한 지역에 나타나는 삶의 현장을 조명했는데, <지하철 판타지>가 그중 하나다. 로스코는 1930년대 초 동갑내기 애돌프 고틀리브를 만나고부터 신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거의 매일 만나 신화에 관해 논의했다. 프로이트, 융, 마르크스, 프레이저 등의 이론에 관해 토론했으며, 1920년대 무정부주의자들의 영웅인 니체로 회귀했다. 니체는 음악을 듣는 가운데 엄청난 감성적 흥분을 발견했으며, 음악에 민감한 로스코에게 니체의 저서는 갖가지 요소를 내포한 직관에 초점을 두는 데 도움이 되었다. 로스코는 숭고한 감정을 모노크롬에 가깝게 그린 바넷 뉴먼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로부터 테마 문제의 선택에서 영향 받았다. 온갖 종류의 이미지와 충동들이 전례 없는 방식들로 작품에 나타났는데,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캔버스를 두 개 혹은 세 개의 직사각형으로 분할하고 강렬한 색채를 엷게 칠한 뒤 그 위에 좀 더 크기가 작고 윤곽선이 모호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은 불명료한 모서리를 지닌 직사각형의 색채 덩어리들을 그린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었다. 로스코는 자아표현으로부터 니체가 시사한 숭고한 비극으로, 프라 안젤리코로부터 초기 크리스천들로 나아갔다. 그는 이탈리아를 방문하던 중 라벤나의 대주교의 예배당 안에 있는 명각 “빛은 여기에서 태어났거나, 자유롭게 여기에 수감되었으며 지배한다”를 발견하고 그것이 곧 자신이 여태까지 추구해온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로스코는 수년에 걸쳐 작업하면서 자신의 개념을 순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의 분위기 있는 그림들은 어두워졌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를 거치면서 그의 색채는 심리적 우울을 반영하는 듯 더 흐려지고, 변화나 활발한 상호작용이 감소되었다. 로스코는 1968년 4월 갑자기 심각한 동맥류에 의해서 쓰러졌다. 충분히 건강을 회복하여 가족과 함께 프로빈스타운으로 갔을 때 그는 검은색 분위기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가 말한 대로 “어두운 색이 항상 위에 있는” 두 개의 직사각형 면들을 나누는 진기하고 확고한 선이 있는 보라색 바탕에 검은색, 갈색 바탕에 검은색이었다. 그는 1970년 2월 25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