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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우체통에서 나올 때
흐르는 강물처럼 그해 5월 기묘한 재회 오후 9시 30분의 고독 폭풍이 몰려가는 소리 양들의 침묵 신라 여인 밤의 열기 속에서 여름 손님 가을 손님 나는 우체국에 앉아 있었다 붉은 신호등 지하 창고로 돌아가다 내가 없는 사이에 생긴 일 잃어버린 집 2000년 6월 13일 작가의 말 |
YOON DEA NYUNG,尹大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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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사람, 다른 이름
- 김영표 (zero@yes24.com)
『미란』은 뜨겁게 시작하여 차갑게 끝납니다. 그 차가움은, 모든 뜨거움을 화한 다음 남겨진 증거와도 같은 잿더미이며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있지만 더 이상의 온기는 없습니다. 주인공 연우에게는 두 명의 미란이 있었습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제주도에서 만난 여자는 원초적이며 본능적이고 가슴이 먼저 앞서는 사람이었고, 서울에서 만난 여자는 그 모든 것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이였습니다. 그는 결국 한 사랑을 죽이고 다른 한 사랑을 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자의 입장에서 본 착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도록 선택 당한 건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미란은 그에게 이런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많은 여자들이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은 곧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단 하나예요. 그러니 그 중에서 고르려 하지 말아요. 거꾸로 연우씨가 그들에게 선택될 수도 있어요."라고. 결국 그는 끝까지 '한 사랑'만을 한 셈이 됩니다. 여자 역시 마찬가지.
처음 마음을 열면서 미란은 "무섭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그토록 무서웠을까요. 누군가를 알게 되고 점점 그에 대한 객관성을 잃게 되고 끝내는 자신을 잃는 것이? 결국 그녀는 그에게 결코 "돌려줄 수 없는 것"을 준 다음 그의 곁을 떠나버립니다. 남자는 돌려줄 수도 없는 그것을 가지고 "그녀는 누구였을까?" 궁금해하며 평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오히려 '무서운' 사람은 떠난 그녀였습니다. 그가 타클라마칸 사막의 폐허가 된 유적지 `미란'을 말하며 떠올린 불모의 이미지처럼 말입니다. 또 다른 미란은 좀 더 이성적입니다. 혼수용품을 사러가서 소비자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거나, 가정의 평안을 위해 묵묵히 그의 비밀을 지켜보는 것으로 현실에 발을 내딛고 있습니다. 그녀는 20대 초반에서 성장을 멈춰버렸던 연우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역할을 하는 선생님과도 같습니다. 그는 깨닫습니다. "삶은 확실히 어떤 기차에 올라타느냐에 따라 운명의 모습이 변하게 마련인"것을. 그리고 그 기차에 같이 타고 있는 미란에 대해 사슬처럼 엮여 있는 '운명'을 느끼게 됩니다. 그는 마침내 "온몸의 부속품이 하나씩 차례로 빠져나가 마침내 완전히 망가지"는 고통을 견뎌내면서 젊은 날의 미란을 놓아줍니다. 삶이란 선택이고, 종내는 가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때그때 우리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욕망이나 열망으로 표현되는 감정의 등불들을 하나씩 꺼나가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도 실은 그 사람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주 가까운 사람조차도. 또 다른 낯선 이의 그림자가 그 사람 내면 깊숙이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너는 내게 있어서 종종 네가 아니다. …… 돌아보면 그 어떤 타인도 항상 나의 일부였다. 내가 들고 있는 거울에 비친 사람은 비록 내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인 동시에 엉뚱한 타인과 동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는 것을 때때로 삶이 나에게 알려주곤 했다. 그토록 많은 것을 상실해가는 도중에." --- 윤대녕 『미란』중에서 이 소설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많은 부분이 겹쳐 있습니다. 이쪽과 저쪽으로 갈려진 사랑의 모습이 그렇고, 끝내 어떤 이와도 완전한 결합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결국 불완전 채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 소설이 던지는 이 질문은 여전히 해결될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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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밤이 왔어.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지. 그런데 문득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걸 깨달았어. 내 집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거야. 하는 수 없이 나는 그 파란 대문 집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지. 주린 배를 움켜쥐고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날이 밝기를 기다리면서 말이야. 그런데 조금도 무섭거나 두려운 생각이 들지 않더군. 신기할 정도로 말이야. 오히려 아늑한 기분이 드는 게 참으로 이상했지.'
아파트 단지 내 공원의 오렌지빛 나트륨등에 불이 나갔는가 싶었는데 잠시 후 다시 들어왔다. '그러다 나는 처마 밑에 앉아 깜박 잠이 들어버렸어. 한참 후에 누군가 등에 두드려 나는 잠에서 깨어났지. 그런데 나를 깨운 사람은 놀랍게도 어머니였어. 밤늦게까지 내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돼서 나를 찾으러 밖으로 나온 거야. 더 놀라운 것은 그 파란 대문 집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는 사실이야.' --- p.2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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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 대해 무지하다니 한 가지만 알려주죠. 연우씨가 보기엔 세상의 많은 여자들이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은 곧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단 하나예요. 그러니 그 중에서 고르려 하지 말아요. 거꾸로 연우씨가 그들에게 선택될 수도 있어요. 앞으로 만약 그런 일이 생기게 되면 고맙게 여기란 뜻이에요. 상대나 자신 둘 다에게 말예요.'
--- p.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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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이겠지만, 심각한 위기의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나와 네 어미도 그랬다. 완전히 지쳤다고 느껴지는 때가 올 거다. 그땐 세상의 모든 양들이 침묵하고 나무도 한결같이 등을 돌리고 서 있을 거다. 안타깝구나. 그땐 이미 이 아비가 도울 수 없을 때일 테니까. 부디 잘 살기 바란다. 너한테도 단점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걸 알게 될 때마다 상대에게 고개를 숙이거라.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에게도 고개 숙이거라. 너는 지금부터 많은 짐을 짊어진 사람이다. 모쪼록 경배하거라. 너를 찾아오는 범죄자조차 성의껏 변호해야 하듯이 말이다.
--- p.1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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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잃고 싶지 않은 게 있다면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지마. 우린 엄연히 타인이고 어려운 선택 끝에 서로 긴밀히 협조하기 위해 만난거야. 그러니 어떤 순간에 간신히 얻어낸 가슴 떨리는 영상을 굳이 캐물어서 날려버리는 것은 하지 않았으면 해. 그건 우리를 지켜주고 있는 신들이 잠들어 있는 방의 촛불을 하나씩 꺼버리는 일이야 '
--- p.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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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했나요? 하지만 이렇게 무너져 가는 것도 한편 운명이에요. 싱처또한 마찬가지구요. 운명이란 주인의 간곡한 기대조차 번번히 져버리곤 하는 것이더군요.'
그 단정적인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혀버린 채 물끄러미 그녀의 이마만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생긴 것인지 이마 한 중간에 날카로운 상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바람이 몰아쳐 오자 그녀는 쿨럭쿨럭 기침을 해대며 종업원이 내온 보드카를 한 잔 마시고 충혈된 눈빛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나이를 먹어도 신기할 정도로 당신은 변하지 않는 군요.' --- p.279~2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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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확실히 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힘에 의해 유지되고 변화된다. 그러나 인간적인 측면으로 내려올 때는 그 신념이 속수무책으로 변하는 경우가 있다. 적어도 자기 신념을 위해 주변을 희생하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미숙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꾸로 자신의 신념조차 때로 가까운 사람들 위해 버릴 수밖에 없을 때 그의 삶은 비록 누추해지더라도 인간적으로 그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어쨌든 가까운 사람에 대한 책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전체를 위한 신념이 달성된 경우에라도 그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옳은 태도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 p.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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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확실히 어떤 기차에 올라타느냐에 따라 운명의 모습이 변하게 마련인가 보다. 중간에 간이역에서 슬쩍 내려버리면 모를까. 같은 기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운명이 사슬처럼 서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을 서울에 도착하고 나서 다시 한 번 뼈져리게 깨달았다.
--- p.3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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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서 꽃이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열대 어디를 가나 지천으로 피어 있는 그 환장할 붉은 꽃. 하이비스커스. 급기야 투둑투둑 비가 쏟아지며 바람이 정원 가까이로 거세게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펴 들고 미란이 근무하고 있는 호텔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호텔은 집에서 30분 거리로 해변 쪽에 있었다. 야자수 숲이 바람에 무겁게 쓸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황톳물이 튀는 밤길을 걸어 아래로 내려갔다. 언덕을 내려가며 언뜻 뒤를 돌아보니 발코니에 걸려 있는 보라색 등이 사납게 흔들리고 있었다.
--- p. 2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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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거기엔 온기라는 게 존재하지 않잖아요. 필요한 것들을 모두 매매 관계로 처리하게 되면 막상 할 일도 없어지구요. 하긴 지금은 혼자 있으니 그게 편하긴 하겠죠."
그녀는 내게 드라이클리닝식으로 산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역시 아쉽거나 필요한 게 별로 없었다. 촛불을 켜놓고 음악을 오토 리버스 시켜놓고 그녀와 케이크와 포도주를 먹고 침대에 들어가 그날도 사랑을 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녀와 사랑을 하면 할수록 내가 길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란의 몸은 변함없이 다정다감하고 긴장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이상할 정도로 냄새가 좋았다. --- p. 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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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있었군요."
"그래, 가지 않았지." "실망했나요?" "미안하단 말만 하지 않으면 돼. 그 말을 들으려고 기다렸던 건 아니니까." "화났나요?" "빗속을 함께 뛰어왔다고 해서 꼭 그래야만 되는 건 아니야. 그게 의외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있어." 원피스 자락에 흙탕물이 튀어 있었다. 종아리와 구두에도 흙탕물이 튀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당신의 몸을 조금이라도 만져보고 싶어. 그게 섹스를 뜻하는 건 아니야. 설명하기가 힘들지만 그거하고는 뭔가 조금 다른 감정이야. 말하자면 당신이 이 세상에 정말 존재하는지 확인해보고 싶어. 당신의 체온을 통해, 그 흐름의 일부라도 말이야." --- p. 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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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가 내리고 난 밤이면 저 이태리 식당 정원에 유령이 나타나요. 너무나 밝은 빛을 하고 말이죠. 어둠 속에서 그것은 곧 사라져버릴 듯 보이지만 내가 바라보고 있는 순간만큼은 거기에 뚜렷이 존재하고 있어요. 이쪽을 우두커니 바라보면서 말예요. 한 번은 가까이 가서 훔쳐보았죠. 그런데 놀랍게도 당신 모습을 닮아 있더군요.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이에요."
"......" "그것은 새벽이 오기 전에 가로등이 꺼지듯 감쪽같이 사라지곤 했어요. 그게 만약 당신이었다면 당신은 자기 혼령에 이끌려 여기에 왔는지도 몰라요. 새상 한 모퉁이에서 우리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예요. 눈사람처럼 생긴 그 맑은 기운, 당신 말예요." --- p. 1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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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거기엔 온기라는 게 존재하지 않잖아요. 필요한 것들을 모두 매매 관계로 처리하게 되면 막상 할 일도 없어지구요. 하긴 지금은 혼자 있으니 그게 편하긴 하겠죠."
그녀는 내게 드라이클리닝식으로 산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역시 아쉽거나 필요한 게 별로 없었다. 촛불을 켜놓고 음악을 오토 리버스 시켜놓고 그녀와 케이크와 포도주를 먹고 침대에 들어가 그날도 사랑을 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녀와 사랑을 하면 할수록 내가 길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란의 몸은 변함없이 다정다감하고 긴장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이상할 정도로 냄새가 좋았다. --- p. 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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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있었군요."
"그래, 가지 않았지." "실망했나요?" "미안하단 말만 하지 않으면 돼. 그 말을 들으려고 기다렸던 건 아니니까." "화났나요?" "빗속을 함께 뛰어왔다고 해서 꼭 그래야만 되는 건 아니야. 그게 의외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있어." 원피스 자락에 흙탕물이 튀어 있었다. 종아리와 구두에도 흙탕물이 튀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당신의 몸을 조금이라도 만져보고 싶어. 그게 섹스를 뜻하는 건 아니야. 설명하기가 힘들지만 그거하고는 뭔가 조금 다른 감정이야. 말하자면 당신이 이 세상에 정말 존재하는지 확인해보고 싶어. 당신의 체온을 통해, 그 흐름의 일부라도 말이야." --- p. 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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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가 내리고 난 밤이면 저 이태리 식당 정원에 유령이 나타나요. 너무나 밝은 빛을 하고 말이죠. 어둠 속에서 그것은 곧 사라져버릴 듯 보이지만 내가 바라보고 있는 순간만큼은 거기에 뚜렷이 존재하고 있어요. 이쪽을 우두커니 바라보면서 말예요. 한 번은 가까이 가서 훔쳐보았죠. 그런데 놀랍게도 당신 모습을 닮아 있더군요.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이에요."
"......" "그것은 새벽이 오기 전에 가로등이 꺼지듯 감쪽같이 사라지곤 했어요. 그게 만약 당신이었다면 당신은 자기 혼령에 이끌려 여기에 왔는지도 몰라요. 새상 한 모퉁이에서 우리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예요. 눈사람처럼 생긴 그 맑은 기운, 당신 말예요." --- p. 1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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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저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라요. 그렇지만 영영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요. 세상엔 그런 일은 없으니까요. 만약 당신이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이번만큼은 받아들이겠어요. 제게 한번쯤 상처를 입힌다고 해도 말에요. 하지만 단 한번이에요. 준이 때문이라도 더 이상은 저도 용납하기 힘들어요 '
그리고 아내는 마지막으로 조용히 덧붙혔다. '그런데다 저는 이미 당신을 한번 용서 한 적이 있어요' --- p.2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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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미란이란 같은 이름의 낯선 사람이자 미란이란 낯선 이름의 같은 사람이다 섬세한 글쓰기로 90년대 한국 문학의 영토를 확장한 작가 윤대녕의 새 장편소설 『미란』이 출간되었다. 윤대녕은 1990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단편 「어머니의 숲」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소설집 『은어낚시통신』 『남쪽 계단을 보라』를 비롯해 장편소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달의 지평선』 등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90년대 문단의 대표 작가로 급부상그의 작품 세계는 ‘존재의 시원에 대한 탐구’로 요약된다. 1980년대의 획일적인 인간관을 했다. 문학성의 회복을 요구하는 1990년대적 시대 정신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작가로 불리는 거부하며, 1990년대의 소설 화두를 ‘사람’으로 삼고 독특한 구성과 미학적인 문체를 통해 시대와 존재의 시스템이 어떻게 갈등하고 화해에 이르는가를 개성 있는 고집으로 이야기하였다. 서사적 재미보다는 시적 이미지가 충만한 그의 소설들은 장편보다는 중?단편에서 단연 빛을 발해온 터. 서정적이고 환상적인 문체, 섬세한 이미지를 통해 현대인들의 고독한 삶을 추억과 환상을 통해 신화처럼 아득하고 그윽한 시원의 세계로 끌어올린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미란』은 계간 『문학과 사회』 2000년 가을호부터 2001년 가을호에 걸쳐 연재했던 작품을 묶은 것이다. 이 소설엔 성(姓)은 다르지만 이름이 같은 두 사람의 미란이 등장한다. 작가는 이들을 통해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불특정 다수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또한 이들이 결국엔 동일인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돌아보면 그 어떤 타인도 항상 나의 일부였다. 내가 들고 있는 거울에 비친 사람은 비록 내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인 동시에 엉뚱한 타인과 동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는 것을 때때로 삶이 나에게 알려주곤 했다. 그토록 많은 것들을 상실해가는 도중에.”(「작가의 말」)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도 실은 그 사람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주 가까운 사람조차도, 또 다른 낯선 이의 그림자가 그 사람 내면 깊숙이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윤대녕의 장편 소설 『미란』은 얼핏 비루한 일상에 관한 보고서처럼 보인다. 윤대녕 소설에 늘 등장하는 여자들과 그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미묘한 갈등, 그리고 그 주위를 겉도는 ‘나’의 의식적인 편린들이 그것을 예증하고 있다. 그런 상투적이고 일상적인 읽기 층위에서 『미란』을 읽어나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미궁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묘한 마력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이전에 윤대녕 소설에서 볼 수 있었던 ‘나’와 그녀(타자)와의 불일치성, 혹은 미끄러짐의 문제가 아니라 묘하게 꼬여 있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간신히 기생하는 인간들의 일상적인 ‘파열’에 기인한다. 그 파열을 견뎌야 하는 것은 살아 있는 존재에게 내려진 ‘저주’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따라서 『미란』에 등장하는 미란(‘들’)은 그 파열이 현실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매개물인 것이다. 소설 『미란』에는 세 가지 존재적 층위로서의 미란이 등장한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타입’으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여자로서의 김미란, 그리고 다른 한편, 파열된 주체로서, 길들여지기를 거부하고 일상을 겉도는 자신과 지극히 닮아 있는 나르시시즘적 타입의 여자 오미란. 마지막으로 중국의 타클라마칸 사막에 인접해 있는 반사막 도시 유적 미란이 그것이다. 이 유적은 건조화를 거듭하면서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제주도와 이국(異國) 동남아시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미란』의 갈등은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는 사랑으로 언제나 내 곁에 있는, 그야말로 항상성의 상징인 김미란과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혼란과 고통을 주며 명확한 윤곽을 드러내지 않는 오미란이라는 인물의 대비로 극대화된다. 가족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견디면서 정체되어 있는 삶을 살아가는 김미란은 내게 안락함을 주는 존재인 동시에 ‘나’에게 끊임없이 자기 동일성이라는 존재론적 환원을 강요하는 ‘벗어나고 싶은’ 현실이다. 그렇다고 살인을 저지르고 결국 자신의 죽음 충동조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죽어간 오미란을 자신의 의지 상대로 선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란/오미란, 삶/죽음, 고통/쾌락, 자기 동일성/자기 분열의 갈등과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윤대녕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들 사이의 구분이 아니라 ‘차이’다. 김미란과 오미란은 나에게 삶과 죽음 사이를 배회하게 하지만 그 어느 쪽에서도 완벽하고 주체적인 충만을 얻을 수 없다는, 다시 말해 주체란 원초적으로 찢긴 채 존재하기 때문에 분열된 주체를 봉합할 수 있는 신기루를 만들어 이를 견딜 ‘이유’로 삼지 못한다면 결국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존재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배회는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의 내적 긴장을 최소화하고 궁극적인 무의 상태로 복귀하려는 생물학적 속성을 갖고 있으며 정상인(김미란)과 비정상인(오미란)은 결핍이 아니라 불일치, 차이에 의해 나뉘는 존재가 아니라 구분될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것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는 폐허의 유적으로 남은 반사막 도시 ‘미란’의 건조함을 ‘제주도’로 상징되는 섬의 유동성과 시시각각 변하는 운동성으로 치환하고 있는 윤대녕의 미적 자의식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