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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20세기를 살다 간 워홀은 21세기가 원하는 창조적 인재의 원형이었다
1장 그림을 그리며 병을 이겨낸 소년 그림도 좋고 영화도 좋아 소년에게 가장 친한 친구는 연필과 스케치북 / 자르고 오리고 붙이는 일이 즐거워 카네기 공과대학에 들어가다 미술교사가 될 거야 / 미술교사보다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어 백화점에서 일하며 상업미술에 접근하다 딱 맞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다 / 뉴욕에 대한 동경이 시작되고 2장 예술가들이 모이는 뉴욕으로 가다 훗날 대가가 된 필립 펄스타인과 함께 뉴욕으로 마음은 벌써 뉴욕에 가 있어 / 일자리를 찾아서 / 사람을 좋아하는 만큼 외로움도 크다 / 예술에 큰 영향을 끼친 텔레비전을 사다 대중문화의 수도 뉴욕 예술가의 심장이 뛰는 곳 / 예술혼의 발전소 그리니치빌리지 상업예술가로 성공하다 밀려드는 일거리 /첫 번째 상업미술 전시회 / 두 번째 전시회 이후 명성이 높아지고 3장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의 벽을 허물다 농담 같은 그림 순수미술에 대한 마음속의 열망 / 상업미술의 성공을 과감히 접다 / ‘코카콜라 병’을 선택한 예술철학 다른 화가들과 차별되는 새로운 그림을 그릴 거야 내가 미치려면 무조건 새로워야 해 / 리히텐슈타인을 뛰어넘고 싶어 / 최고의 전문가들을 친구로 삼다 실크스크린으로 작업하다 무엇이든 남이 안 하는 기법을 원해 /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기법이 필요해 흔해빠진 ‘수프 캔’을 그리다 순수미술을 하면서 ‘수프 캔’을 그리는 특별한 발상 / 가장 흔해빠진 것을 가장 독창적인 예술로 / 독창성이 스타성을 만들고 예술적 성과를 한 단계 높인 재난 시리즈 이번에도 남과 다른 발상을 / 재난은 현대인의 일상에 숨어 있는 거야 4장 예술사에 기록될 팝아트의 선두가 되다 팝아트란 무엇인가 ‘좋은’ 취향과 ‘나쁜’ 취향의 경계선을 허물다 / 팝아트는 ‘아메리칸 드림’과 궁합이 잘 맞는 예술 예술 공장 공장장 작업실을 ‘팩토리’(공장)라 이름 붙인 재치 / 모든 것을 포용하는 팩토리의 예술 세계 예술가에서 시대의 문화 아이콘으로 예술이냐 아니냐의 논란을 만들다 /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던지기 / 논란을 딛고 팝아트의 선두 주자가 되다 / 록 콘서트 같은 전시회 5장 모든 예술은 서로 통한다 워홀이 만들면 영화도 달라 언더그라운드 영화 운동에 매료되다 / 실험성이 강한 영화 《엠파이어》로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서다 / 미술로 얻은 ‘부’를 영화를 위해 쓰다 잡지 ≪인터뷰≫를 발간하다 이번에는 잡지야! / 남이 안 하는 스타일의 잡지를 원해 / 40년 넘게 지금까지 유지되는 대단한 잡지 주문 초상화를 그리다 초상화도 그의 손을 거치면 예술이다 / 현실을 개척하는 특별한 기질 / 사람들이 욕을 해도 내겐 별 상관없어 뜻하지 않게 총상을 입다 워홀의 작업실 ‘팩토리’는 인생극장 / 미친 사람과 친하게 지낸 덕분에 / 워홀은 역시 달라 미래에는 누구나 15분 동안 유명해질 것이다 예술가, 미디어에 도전하다 / 유명해지거나, 유명하게 만드는 것은 둘 다 재미있는 일이야 6장 삶을 예술로 만드는 능력을 지닌 사람 《마오》 시리즈라는 특별한 작품 사회주의자라는 오해가 기막히지만 재미있어 / 《마오》 시리즈로 또 한번 충격을 선사하다 고전작품을 현대로 부활시키다 이번에는 고전이야! / 워홀은 예술감상자들도 스타라고 생각했어 ‘망치와 낫’을 작품화하다 ‘망치와 낫’은 매력있는 소재일 뿐 / 공산주의의 상징 ‘망치와 낫’도 워홀이 그리면 비싸게 팔린다 비즈니스 아티스트 앤디 워홀 비즈니스 세계의 효율성을 창조 세계에 결합시키다 / 그동안 벌어놓은 돈을 너무 많이 써버렸어 / 나는 돈에 의연한 척하기 싫어 / 어마어마한 재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예술가 에필로그 : 앤디 워홀의 가장 위대한 조력자, 어머니의 힘 ●앤디 워홀이 걸어온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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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1세대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앤디네 집안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민자 거주지인 도시의 소외된 빈민지역에서 앤디는 의기소침하고 소심한 소년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런 앤디에게 그림 그리기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고, 그림 그리는 것이 가장 즐거운 놀이였다. 몸이 아파 침대에 누워서 지낼 때조차도 말이다.
++++++++++ 물론 워홀은 뉴욕으로 가서 그곳의 예술적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며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 가는 것은 두려웠다. 그래서 펄스타인에게 같이 가자고 설득한 것이다. 펄스타인 역시 뉴욕의 매력을 모르지 않는 터라 두 사람은 함께 뉴욕에 가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두 사람은 각각 200달러씩 들고 피츠버그를 떠나 뉴욕으로 향했다. 이 행보는 후에 뉴욕 예술의 정수를 이룩하는 워홀에게 의미가 큰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 부분에 대해, “내가 열여덟 살 때 한 친구가 나를 크로커 상점의 쇼핑 가방에 넣어 뉴욕으로 보냈다.”라며 짧게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 순수미술을 하겠다고 결심한 워홀이 코카콜라 병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는 것은 그의 특별한 예술철학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비록 상업미술보다는 순수미술에서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예술을 고상하거나 특별한 사람들에게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문화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코카콜라 병을 그렸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전에 워홀이 했던 광고 작업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순수미술의 소재로 코카콜라 병을 택했다. 그는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코카콜라 병을 예술의 세계로 끌어들이면서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선을 허물고 싶었으며, 특정 계층의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대중에게도 예술의 세계를 열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 수프 통조림 그림을 본 사람들은 워홀에게, “왜 슈퍼마켓에 가면 볼 수 있는 수프 통조림을 그립니까?” 또는 “대량생산이나 소비주의 혹은 광고에 대한 반발입니까?”라고 물었다. 워홀은 그 질문들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 그림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수프 통조림을 그린 것입니다.’ 같은 팝아트 화가로 분류되었지만, 워홀은 다른 화가와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일상 중에서도 가장 일상적인 것을 소재로 택함으로써 너무나 대중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의 독창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다른 팝아트 화가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 워홀은 자신의 새로운 작업실을 ‘팩토리’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에 그의 예술관이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팝아트가 나오기 전, 예술이란 예술가가 오랜 시간 고통스럽게 혼자만의 작업을 통해 창조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창작의 고통 끝에 고상하고 교양 있는 아름다움이 탄생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자신들을 일반 대중들과 다르다고 생각했고, 자신들이 일반 대중들보다 훨씬 가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워홀은 그런 생각을 비웃듯이 자신의 작업실을 ‘팩토리’(공장)라고 이름 짓는 재치를 발휘했다. 작품의 소재를 지극히 일상적이고 대중적인 것에서 선택하는 것뿐만 아니라,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도 기존의 생각을 뒤집었다. 마치 공장에서 공산품을 찍어내듯 만들어낸다는 의미로 규정지은 것이다. ++++++++++ 워홀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그의 몸은 더디게 회복되었다.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된 후에 1968년 9월에는 다시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 총격 사건으로 그는 평생 간헐적인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부상의 후유증 때문에 평생 코르셋을 입고 지냈으며, 그토록 싫어하던 병원을 자주 들락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총격 사건이 있은 지 수년이 지난 1982년, 워홀은 아스펜에서 스키를 타며 휴가를 보내고 돌아온 뒤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난 아직도 저격 부상의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는 솔라니스가 또다시 자신을 암살하려고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기도 했다. ++++++++++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통한 워홀의 마지막 변신은 매우 놀라웠다. 워홀은 그 시대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정치가의 이미지 가운데 하나에서 독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워홀이 마오쩌둥의 얼굴을 작품 제작에 사용하기 전까지 그의 사진을 걸어놓는 것은 정치적 의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자신의 신념을 고백하는 위험한 일처럼 보였고, 당시에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행위였다. 워홀은 이런 답답한 상황을 재미있게 뚫고 나갔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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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의 비범한 창의력에는 숨은 조력자, 어머니의 지원이 있었다
워홀은 일반적인 예술가들과는 생활태도가 달랐다. 자유분방한 사고를 지니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일을 돕는 조수들에게 친절하고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구하는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워홀의 이러한 사고와 태도 뒤에는 어머니의 교육이 있었다. 어머니는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워홀이 아홉 살 때 카메라를 사달라고 조르자 선뜻 카메라를 마련해주었고 찍은 사진을 스스로 직접 현상해볼 수 있도록 임시 암실까지 만들어주었다. 1930년대에 이미, 워홀의 어머니는 감성 교육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어머니의 전폭적인 사랑 속에서 자랐기에 워홀은 공감하고 배려하는 태도를 지닌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책에 담긴 워홀의 성장기는 청소년을 자녀로 둔 부모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간다. 진정한 창의 교육 방식에 대해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다양성을 아우르는 멀티 플레이어의 원형 ‘마릴린 먼로’와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그리고 재난 현장을 작품으로 표현하며 가장 금기하던 것과 가장 일상적인 것들을 다른 차원으로 데려다 놓은 앤디 워홀은 예술과 창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었다. 그리고 영화를 제작하고 잡지를 발행하면서 한 가지 분야에만 머물지 않고 여러 분야를 넘나들었다. 이런 워홀의 삶은 창의적 인재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진로를 결정하기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비전으로 다가간다. 21세기는 한 가지 분야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양성과 컨버전스(여러 기술이나 성능이 하나로 융합되거나 합쳐지는 일)를 갖춘 인재를 요구한다. 그런데 워홀은 놀랍게도 이미 한 세기 전에 그 다양성을 실현하면서 진정한 멀티 플레이어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이 책의 주인공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 동유럽에 있는 슬로바키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펜실베이니아의 이민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부터 그림과 영화와 사진을 좋아했다. 어머니는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워홀이 아홉 살 때 카메라를 갖고 싶다고 하자 선뜻 사주고 집 지하실에 암실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는 류머티즘 무도병 때문에 병약한 소년기를 보냈고, 성격은 소심하고 소극적으로 변했다. 청소년기에는 미술교사를 꿈꾸었으나 막상 대학진학을 결정할 무렵에는 광고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어 카네기 공과대학에 입학한다. 대학을 졸업한 뒤 뉴욕으로 가서 잡지 일러스트나 광고 등 상업적인 디자인 작업을 주로 했으며 이 분야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그 후 상업 미술을 접고 순수 미술로 진출하여 새로운 작품 세계를 창출해냈다. 주로 ‘농담 같은 그림’을 그려 거장의 반열에 오른 그는 ‘팝 아트’의 대가로 예술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아주 쉽다. 누구나 한번에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는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경계를 지웠으며, 예술이란 특별한 사람들만의 것이라는 기존의 관념을 뛰어 넘어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 세계의 문을 활짝 열어준 인물로 평가받는다. 회화뿐만 아니라 영화도 많이 남긴 멀티 플레이어 창조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