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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은 항상 열어두는 걸 원칙으로 한다, 아나이스. 대신 옷을 갈아입을 때는 당겨서 일부 닫을 수가 있어. 안은 아무도 못 들여다봐. 물론 감시탑이 있기야 하지만 거긴 아무도 없거든. 야간 간호사 선생님이 근무 중일 때를 빼고는. 그리고 간호사 선생님은 유사시에 중앙 잠금 장치를 이용해 시설 내 문을 전부 잠글 수 있어. 거주자 안전을 위해서!”
옷을 벗던 동작을 멈추자 브렌다가 고개를 젓는다. “속옷까지 다.” 팬티를 벗어 비닐봉지에 던진다. 이 방은 전에 있던 방보다 작다. 복도에서 다시 탕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까 그 남자앤가 보다. 난간을 아주 후려 팰 기세다. “남자애들 방은 대부분 2층에 있어서 문 왼편에 서서 갈아입기만 하면 아래층에서 옷 갈아입는 걸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도록 방문을 열고 지내는 게 여기 규칙이다. 여기 파놉티콘에 비밀이란 없거든.” --- p.33~34 감시탑을 한참 동안 쳐다보면 꼭 벌레처럼 보인다. 창에 반사된 해가 황금빛 홍채처럼 작게 빛날 때면 특히 그렇다. 어젯밤처럼 달이 깃들면 창백한 눈동자를 하고서 줄곧 사람을 좇는다. 층층이, 방방이, 모두가 저 창에 반사된다. 심지어 나도, 나도 저 안에 깃들어 있다. 그런 내 모습을 올려다본다. 지금 난 3층 층계참에 앉아 있다. 가부좌를 틀고 고무공 던져 받기 놀이를 하는 중이다. 공은 곱슬머리 남자애한테서 뺏었다. 브라이언이라는 사이코다. 이 공놀이에서는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받아야 한 번으로 치는데 벌써 170번째다. 공을 떨어뜨리면 돼지가 죽을 거란 뜻. 돼지가 죽으면 날 열여덟 생일까지 철통보안 중경비시설에 처박힐 거다. 그다음은 감옥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멀쩡히 버틸 리가 없지. 열여섯 살까지도 버티기 힘들걸. 그때뜸엔 벌써 죽었을 테니. 그럼 나랑, 돼지랑, 테리사랑,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탁됐던 집에서 만난 제이크 녀석, 목에 줄을 맨 제이크까지 한데 다시 뭉치는 거지. 황천 가기 전 마지막 유치장에서 포커나 치고 앉았을 불쌍한 우리 신세. 그 제이크란 놈은 더러운 개새끼였다. 그런 놈은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쏠리는 말이지만 사실이다. 단지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한테나 분풀이를 하려 드는 작자들이 어딜 가나 꼭 있기 마련이라니까. 공이 어느새 완벽한 리듬을 이루며 척 하고 손에 붙는다. 벌레 눈들이 지켜보고 있다. 저놈의 감시탑, 얼굴을 박살내달라고 아주 애원을 하네. 낯짝에 웃는 얼굴로 낙서를 하고 똥구멍엔 화염병을 박아달라고. --- p.81~82 늘 같은 악몽을 꾼다. 꿈에서 저들은 바늘 끝보다도 작은 점 같은 날 키운다. 극미한 세균 조각에서부터 날 배양해갖곤 방호복과 마스크로 무장하고 현미경에 날 올려놓고 관찰한다. 바보 같은 노래가 갑자기 떠오른다. 이게 무슨 노래였지? 테리사가 불러주던 동요지. 여자아이들은 설탕과 향신료, 세상의 온갖 달콤한 것들로 빚어 만들었다는, 지랄 같은 노래. 내가 세상의 온갖 달콤한 것들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것쯤은, 그때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럼 아나이스는 뭘로 빚어졌다고 봐야 할까요?” “설탕과 설사지 뭐겠어요.” “아니, 농담이 아니에요. 아나이스를 뭘로 만든 거죠?” “세균요. 죽은 외계 괴생물체에서 채취한 세균에서라고요. 됐어요? 그럼 이제 당장 꺼져!” --- p.106~107 어떤 진실들은 그 무게가 얼마나 압도적인지 온 세상과 바다를 합친 무게와도 맞먹는다. 역사 시간에 헤라클레스와 아틀라스에 대해 배웠는데 아틀라스는 세상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던 반면, 헤라클레스는 더럽게 야비했다. 아틀라스는 진실이 뭔지 알았다. 진실이란 조수에 실려 야금야금 밀려 들어오는 것. 밤이면 밤마다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너를 휩쓸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진실은 달이 불러오는 것이다. 밀물과 썰물이 배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바닷물이 쓸려나가면서 해안을 턴다. 곡물과 조가비와 나무와 들판과 집과 마을과 시골 냄새 풍기는 오솔길 들을 앗아간다. 몽땅 싹쓸이해 바다 저 밑바닥으로 끌어내린다. 바다 물결은 이 세상 모든 걸 다 앗아가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을 거다. 언젠가는 세상 모든 게 바다 밑바닥에 이를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도 다시 지느러미를 갖게 될까? 지느러미를 달고 바닷속에 살게 되면 물속을 헤엄치는 것도 하늘을 나는 것처럼 느껴지려나? --- p.433~4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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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이 인정한 작가, 영국 문단 최고의 신성 제니 페이건
영국 최고의 사실주의 영화감독 켄 로치 영화화 결정! “난 실험이다. 난 감시 대상이다. 싸울 때도, 섹스할 때도, 자위를 할 때도, 저들은 날 지켜본다. (……) 저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다.” 소설 『파놉티콘』은 청소년 보호시설 ‘파놉티콘’에 배치된, 폭력과 마약에 절어버린 열다섯 살 소녀 아나이스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매 책장을 넘기기가 무섭게 거친 욕설과 날카로운 힐난들이 날아드는 이 소설은 우리가 아는 문학의 범주에 넣기에 너무나 낯설고 세고 강렬한, 불편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으로, 신예 작가 제니 페이건은 명망 높은 「그란타」 지가 선정하는 ‘영국 최고의 젊은 작가들’로 선정되었으며, 될성부른 작가들의 등용문으로 여겨지는 워터스톤즈 서점의 ‘워터스톤즈 11’에 이름을 올렸다. 무엇이 한 소녀의 거친 욕설을 최고의 문학적 성취로 만들어놓은 것일까. 절망에 빠진 소녀를 통해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되짚는 과감한 시선 ‘파놉티콘’이란 일종의 원형감옥이다. ‘모두 본다’는 의미의 그리스어를 원형으로 하며, 영국의 철학자인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놉티콘의 구조는 이중 원형으로, 바깥 원에는 수용자들이 배치되고 안쪽 원에는 감시탑이 배치된다. 모든 수용실은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지만, 수용자들은 감시자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감시자의 감시를 받지 않을 때조차 자신이 감시받는다고 여기게 된다. 이 ‘파놉티콘’ 양식에 맞춰 지어진 ‘시설’에 소녀 아나이스가 입소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나이스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 그리고 이런 처지의 청소년들이 대개 그렇듯 여러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나쁜 어른들을 만나고, 험한 일을 겪고, 폭력과 약물에 길들여진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나이스는 정작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경찰관을 공격한 혐의로 이 ‘파놉티콘’에 배치된다. 아나이스는 파놉티콘 내에서도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연대를 형성하고 몰래 들여온 약물을 복용하는 듯 제멋대로인 듯하지만 정작 자신의 알몸을 감출 권리조차도 얻지 못한다. 늘 ‘감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문단과 독자들에게 도전장을 던진 위대한 데뷔작 숨을 곳 없는 이곳에서 아나이스가 유일하게 자유로워지는 장소는 바로 그녀 자신의 ‘머릿속’이다. 소설은 걷잡을 수 없는 아나이스의 공상과 도무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그녀의 말과 행동, 그리고 기억을 바쁘게 오가며 전개된다. 제 아무리 24시간 지켜보는 감시자라 해도 아나이스의 머릿속까지 꿰뚫기는 힘들 테지만 독자들은 자유롭게 아나이스의 내면을 탐색한다. 그 쾌감이 이 소설이 선사하는 첫 번째 감각이다. 머릿속에서 아나이스는 다양한 사람이 된다. 상상 속 도시인 ‘파리’에 가서 여느 사람들 틈에 섞이기도 하고, 보통 아이들처럼 진짜 가족을 갖기도 한다. 원한다면 누구든 될 수 있는 공상 속이지만 그녀가 원하는 삶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기만 한다. 아나이스의 의식을 따라가던 독자는 어느덧 자신의 삶 속에 내재한 아나이스의 집요한 시선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걸 믿니? 네가 생각하는 현실이 진짜라고 생각해?’ 아나이스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일상의 면면을 조롱하며 당돌한 질문을 던진다. 휴식으로서의 독서가 아닌, 질문과 대답, 토론이 이어지는 적극적 독서를 경험하게 되는 것. 이것이 이 소설이 선사하는 두 번째 감각이자 작품의 문학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지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놉티콘’은 소설의 내용적 배경일 뿐만 아니라 형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중의 원형감옥 파놉티콘에서는 소수의 감시자가 다수의 죄수를 감시할 수 있지만, 실상은 다수의 죄수가 소수의 감시탑을 둘러싸고 감시자를 감시하는 형국이다. 마찬가지로, 아나이스의 내면을 탐색하는 독자는 처음에는 그녀의 내면을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소설이 중후반부를 향해 달려가면서부터는 자신의 상식에 당돌한 질문을 던지는 소녀의 집요한 시선에 불편함을 느낀다. 이 ‘시선의 역전’이야말로 원형감옥 파놉티콘의 본질이라 할 것이다. 아나이스는 소설 속에서 여러 어른들을 만난다. 위탁가정에서 만난 어른들과 경찰관, 그리고 법 집행인들……. 대개 질이 나쁜, 세상의 더러움을 모아놓은 것 같은 어른들의 모습이다. 어쩌면 아나이스에게는 그것이 곧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 속에서 아나이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반항을 선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하루하루는 자연스럽게도 더 나쁜 방향으로만 흘러간다. 그럼에도 그 속에는 희망의 싹 같은 것이 보인다. 가장 추악한 현실 속에서 발견한 희미한 빛 같은 것. 이 소설이 선사하는 세 번째 감각은 이 소설을 이겨낸 독자들을 위해 준비된 일종의 선물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