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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태안사 가는 길 2. 사이렌 소리 3. 어느 조각가를 위하여 4. 불그릇을 기다리며 5. 마즈막재 6. 부석사 근처 7.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 8. 사람의 무게 9. 비오리에게 10. 어떤 조곡 11. 어린 예수님께 12. 막지나루 13. 눈물 14. 메밀꽃 필 무렵 15. 푸른 매화를 보러 가다 16.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17. 보수대에 올라 18. 산골편지 1 19. 산골편지 2 20. 산골편지 3 21. 지리산 종주기 22. 베트남 여행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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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등산 북쪽으로 숨어든 지 두 해가 지났습니다.
날 저물어도 더불어 술잔 나눌 이 없으므로 그저 들고나는 산 그림자 길이만 가늠하면서 그 여덟 철을 보냈는데, 그때마다 오히려 내 삶의 길이만 한 치씩 속절없이 줄어들고 있음을 뼈저리게 확인하곤 하였습니다. 손님이 오고 가듯 계절이 바뀔 때마다 스스로 강건하여 흔들리지 않는 법을 배우느라 꽃이 피고 낙엽이 지는 일도 짐짓 저어하며 오래 눈길 주지 않았습니다. 족쇄 찬 발로 걷고 수갑 찬 손으로 밥 먹는다 여겼습니다. 부질없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비어 있음이라고, 며칠 전 끼적여둔 시 한 편은 '네가 없어도 저녁이 오는구나'로 시작하여 '나 혼자 있어도 저녁이 오는구나'로 끝났습니다. 그렇듯, 문 닫아걸고 집에 앉아 내내 길만 생각하였습니다. 참으로 가뭇없는 이야기인 줄 압니다. 길을 가다 문득 내가 지금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고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하여 저 손 뻗어도 아스라이 닿지 않는 억겁의 시간이 지나온 길과 가야 할 길이 되어 앞뒤로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그 영원의 무게에 짓눌려 그만 길 위에 털썩 주저앉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진작 수없이 입술 깨물며 묻고 덮어두었을 바로 그 해묵은 이야기 말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나를 따라와 길 위에 길게 드러눕는 내 그림자! 가령, 내가 한 대여섯 살이나 되어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걷던, 미루나무 두 줄기 사이로 흙먼지 뽀얗게 일던 신작로를 떠올립니다. 가면 틀림없이 거기 혀끝에 살살 녹는 얼음과자와 노릇노릇한 국화빵이 기다리고 있을, 아침 햇살을 따라 걸어갔다가 저녁 어스름에야 지쳐 돌아오던 그 흑백의 시골길을 나는 여태 변함없이 걷고 있습니다. 나는 그 길에서 말미암아 그 길 위에서 번성하였습니다. 아, 그뿐입니다. 이 세상 어느 아득한 곳으로 또 바람 불어 더욱 멀어진다 하여도 나는 결코 그 길의 끝에 닿을 수 없음을 압니다. 끝내 나는 그 길의 아들이요, 도제(徒弟)인 것을. 길 위에서 피고 진 숱한 '낮과 밤'들에게 고맙다고 두 손 모읍니다. 기어이 나도 언젠가는 길 하나쯤 되어 또 떠날 수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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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참 길도 많다. 흙먼지 뽀얗게 일던 신작로부터 코스모스 흐드러진 들길, 첩첩산중 땀 뻘뻘 기어 넘는 고갯길, 황포돛배 춤추며 돌아오는 물길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많은 길 가운데 저마다 하나씩의 길을 간다. 그 길 위에서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그 사람들 또한 괴나리봇짐 걸머메고 강 언덕길 휘적거리는 젊은이부터 애처로이 '이고 진 저 늙은이', 황급히 앞만 보고 내달리는 사람, 산천경개 구경 더없이 팔자 좋게 어정대는 사람까지 각양각색이다.
{푸른 매화를 보러 가다}는 길 위에서 띄우는 시인의 편지다. 길에서도 또 다른 길을 물으며 두리번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시인은 우리의 삶을 돌이켜보고, 지난날 수없이 매듭지은 숱한 인연의 마디들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시인은 길 위에서 지나간 인연의 실타래를 풀어놓고 이웃의 흙내 나는 이야기를 한껏 털어놓는다. 60년 전에 이 땅을 떠난 한 조각가의 천도재를 올린 이야기를 비롯해 8대째 대를 이어 조선 백자를 굽는 젊은 도공과의 인연,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수몰민들이 살아가는 모습 등이 바로 그것이다. 시인은 잠시 동안 삶의 무상함 속에서 맥없이 풀어지는 자신을 깨닫기도 한다. 어두웠던 한 시대의 질곡들이 앞다투어 길을 막고, 고난과 시련의 역사를 헤쳐온 한 사내의 영욕을 가린 차일이 넝마처럼 삭풍에 나부낍니다. 가지 말라고, 갈 수 없다고 펄럭거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이 살아서 꿈꾸었던 이승의 세상을 위하여 붉은 만장 한 폭 세우는 일도 차마 저어하였습니다. 오래 전에 이미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뼈에 새겼지만 오늘은 그보다 더 독한 부끄러움으로 당신의 차디찬 산술을 마십니다. 그러나 소박한 꿈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막지리 사람들을 보면서, 그리고 왜 사는가를 묻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시인은 꿈을 꾸는 아름다운 길을 찾아낸다. 그런 길에서는 사람도 그만 길을 잊고 길도 이내 사람을 본체만체한다는 것이다. 또한 {푸른 매화를 보러 가다}에서 시인은 직접 발로 길을 밟으며 자신의 솔직담백한 심정을 양파 껍질을 한 겹씩 벗겨내듯 단촐하면서 유려한 문장으로 빚어낸다. 겨울비와 저녁과 함께 간 땅끝(土末)에서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는가 하면, 깊디깊은 오지마을에서는 어둠 속에 웅크려 자신을 발견하고, 메밀꽃에 취한다. 지리산에 오르면서 시인은 산이 인간에게 주는 장엄함과 자연의 위대함에 새삼 감탄하고, 베트남에서는 아직까지 남아 있는 전쟁의 상흔과 자본주의로 탈바꿈하는 그곳 주민들의 변화된 모습에 놀란다. 시인은 도회지에서 산골로 내려가게 되면서 겪은 일들에 대해서도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즉 아이들 교육문제로 아내가 반대했지만 아이들에게 고향의 냄새를 맡게 해주고 싶었다는 이야기며, 집에 관한 단상, 그리고 박달재 고갯마루에서 만난 어둠의 알갱이들 속에서 느끼는 편안함 등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