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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열면서
한·일 교류와 갈등의 가교 대마도 - 덕혜옹주의 비극적 사랑과 비애가 남은 곳 제1부 “대마도는 본래 계림에 속한 땅” - 대마도를 조선 땅으로 그린 여러 기록들 제2부 “대마도는 조선의 영토이다” - 대마도를 조선령으로 기록한 지도들 제3부 대마도는 일본 땅이라는 기록 - 일본 땅으로 기록한 조선의 자료들 제4부 대마도 정벌로 조선은 무엇을 얻었나? -토벌하고도 빼앗지 못한 헛수고만 한 조선군 출정 제5부 조선에 숙위로 온 대마도 왜인들 - 대마도주, 조선 궁궐에 대마도 왜인 파견 제6부 삼포왜란과 최천종 사건 후의 조·일관계 - 대마도주,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양국관계 악화시켜 제7부 대마도 왜인에 대한 조선의 기미책 - 대마도에 관직·물자 주며 순치하려 노력해 제8부 대마도주 가계에 관한 비밀 - 대마도주와 종씨는 본래 고려인! 제9부 대마도주의 신분과 역할은 무엇이었나? - 일본국 대마주 태수이자 조선의 대일외교 연락책 제10부 대마도 수호 이대경은 누구인가? - 이성계가 이대경에게 보낸 한 통의 서신 제11부 조선 침략의 교두보가 된 대마도 -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의 발판으로 활용해 제12부 이승만 정부의 공허한 외침 - “일본은 한국에 대마도를 반환하라” 제13부 제2차세계대전 종전과 맥아더라인 - 미국과 GHQ, 대마도를 일본령으로 인정해줘! 글을 마치며 사실과 진실로써 새로운 관계 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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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교류와 갈등의 가교 대마도
부산항에서 고속페리로 한 시간 남짓 동쪽으로 달리면 대마도 동북단의 히타카츠比田勝에 이르게 된다. 그곳에서 다시 남쪽을 향해 상대마도와 하대마도의 동쪽 연안을 따라 내려가면 대마도 동남쪽 이즈하라巖原 항구까지는 대략 1시간 남짓 걸린다. 이즈하라 항구에 내려서 선착장과 수선사修善寺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북쪽으로 10여 분 남짓 걸어 올라가면 과거 대마도주의 저택이 근처에 있는 대마도 부중府中 자리가 있다. 대마도 부중이란 과거 대마도주의 통치 중심으로, 거기엔 특별히 의미 있는 유적 하나가 있다. 숱한 세월, 여러 차례 불타고 무너진 것을 다시 세워 지금은 비록 일본풍의 목조 건물로 바뀌었지만, 간단한 건물에 걸린 이름은 친근하게도 고려문(高麗門)이다. 그저 별 생각 없이 이 섬을 찾는 이들이야 고려문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대마도에 사는 일본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가 대마도를 이해하려 할 때, 이 고려문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 왜 고려문이 대마도를 대표하는 이즈하라에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고려시대 대마도는 고려의 땅이었으므로 이곳으로부터 고려의 영역이 시작된다는 뜻에서 세운 상징물이다. 즉 대마도부터가 고려의 영역임을 나타내기 위해 본래 고려에서 세운 표지적 건물이란 뜻이다. 바로 그곳에 고려의 대마도 치소治所가 있었고, 대마도가 고려의 동남단 최변방으로서 고려로 들어가는 관문이란 의미에서 이즈하라에 세웠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대마도 동남단을 벗어나면 일본의 경계로 들어간다는 뜻도 갖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왜인들에게 고려의 경계를 알리기 위한 일종의 랜드마크인 동시에 고려의 통치력이 대마도까지 미치고 있음을 나타낸 기념물이었다. 고려가 대마도를 지배했던 흔적은 이 외에도 대마도 북단의 지명에도 남아 있다. 대마도에서는 가장 높은 산으로서 부산 황령산과 대마도 북단 바닷가 악포鰐浦를 바라볼 수 있는 고려산高麗山이 그곳이다. 그 이름으로 보건대 일찍이 고려인들이 대마도를 고려 땅으로 편입하고서는 고려산이란 이름으로 불렀고, 그것이 오늘의 대마도인들에게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조선 건국세력은 ‘대마도는 본래 계림 땅이었다’며 대마도가 일찍이 신라의 땅이었다고 주장은 했어도 어떻게 해서 그곳이 고려의 땅이 되었고, 어찌해서 또 대마도가 조선의 품에서 벗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대마도는 본래 우리나라에서 말을 기르던 곳이었으며, 한때 공신에게 봉토로 내주어 다스리게 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대마도가 우리의 땅이었음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전한다. 조선 정부는 조선시대 내내 대마도는 원래 계림에 속한 땅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조선국왕과 지배층은 그것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였으며, 그에 따라 조선의 대다수 신민들은 대마도를 조선의 땅으로 알았다. 이런 전통에 따라 우리의 선조들은 대마도 동편의 바다를 조선해朝鮮海로 불렀고, 일본 또한 그리 부르며 지내왔다. 조선의 신민들이 그렇게 알고 지내던 것이 조선 말 고종시대에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일본은 강화도조약 직후인 1877년에 대마번對馬藩3을 나가사키현長崎縣에 편입시켰다. 대마도주를 백작으로 편입하고 난 뒤로 대마도는 지방 호족의 개인 소유지가 아니라 일본의 국유지가 된 것이다. 그 후, 을사보호조약(1905)을 거쳐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 사이에 일본인들은 대마도 동편의 해역을 조선해라는 이름 대신 슬그머니 현해탄玄海灘으로 바꿔버렸다. 이렇게 해서 조선해라는 이름은 지도에서는 물론 우리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1904~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대마도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였다. 그것은 일본 중앙정부의 공권력이 미치는 일본 최변방의 섬이자 한국과의 경계에 있는 일본 국방의 보루 가운데 하나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945년 제2차세계대전 종전 뒤에 맥아더라인이 발표되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대마도가 일본의 영토임을 국제적으로 공인받기에 이르렀다. 이 일이 있은 뒤로 부산과 대마도 사이의 왕래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조선시대 내내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이와 입술 같은 역할을 하였던 대마도는 비로소 작고 힘없는 오지의 섬으로 되돌아갔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일본의 섬 대마도는 수천 년 동안 한국과 일본의 사람과 물자 그리고 문화가 오고 간 통로였다. 왜인들이 이 땅을 드나드는 목구멍과 같은 곳이어서 고려와 조선에서는 인후지처(咽喉之處)라 하였다. 때로는 한일 우호와 선린외교의 가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지만, 우리 한국인에겐 많은 피해와 상처를 안겨준 곳으로 기억되어 있다. 조선조 말, 덕혜옹주의 비극적 사랑과 비애가 아롱진 곳으로서 일본의 5대 오지에 속하는 이 작은 섬 하나를 가지고 대마도주 종씨 일족은 조선을 상대로 많은 것을 얻어냈으며, 또 많은 것을 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