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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 난 건 처음이었다. 결국은 하나의 교훈으로 남았지만 그다지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병간호를 해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늦게까지 남아서 나와 함께 체스를 두며 놀아주었다. 엄마와 나누던 독백마저도 소홀히 한 셈이었다. 에르미니아 고모는 내게 턴테이블과 음악을 들을 때 사용하라면서 노란색 흔들의자를 선물해주었다. 마달레나는 점심식사를 방으로 가져다주었고 체온을 재겠다고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내 이마에 키스를 해댔다. “아프니까 좋은데.” 저녁 무렵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처음에는 그렇지. 근데 사람들은 금방 지치거든. 동정심은 물고기랑 같다니까. 셋째 날에는 꼭 상해버린단 말이지.”
--- p.47 “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해야지. 초등학교부터 끝내고.” 고모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부모 극성에 못 이겨 나오는 그런 사육장 거위 같은 애들하고는 섞이지 않는 게 좋아. 혼자서 공부할수록 자기만의 스타일을 더 키울 수 있는 법이야. 피아노 잘 치는 아이들은 많아. 중요한 건 자기만의 음악 세계를 끄집어낼 줄 알아야 한다는 거지.” “바흐처럼?” 나는 밀어붙였다. 한번 발동이 걸린 고모의 열광하는 모습은 내게 짜릿함을 선사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좋았다. --- p.84 중학교 삼 년 동안 내가 음악실에 들어간 건 몇 번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일주일만 더 견디면 그걸로 끝이었다. 음악실에 들어갈 일은 더는 없었을 것이다. 학기가 끝나가던 그 시기에 내가 아파서 드러눕기라도 했더라면 누군가가가 나를 그 방으로 유혹할 수 있는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설계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에 기회란 그저 우연히 다가올 분이다. 멋진 인생을 산다는 것도, 살 만하다거나 살기 괴롭다거나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형편없다거나 하는 것도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우연히 그날 열쇠구멍에 고스란히 꽂혀 있던 열쇠 하나 때문에 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고, 게으름 때문인지 매사에 소홀한 탓인지 아니면 몸이 너무 무거워서인지 그날 청소부 아주머니 알비나가 실수로 꽂아둔 그 열쇠 때문에 나는 모든 걸 망쳐버렸다. 내가 음악실에 들어갈 생각을 한 건 그날 아침 열쇠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두서없는 생각이었다. --- p.152 ‘인생이란 세월이 흐르는 것도 무시하고 간직하기만 해야 하는 귀중품이 아니야. 삶은 우리 손안에 망가진 채로 되돌아오기 일쑤야. 그리고 그걸 고칠 수 있는 부속품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 가끔은 그냥 부서진 채로 가지고 있어야 해. 어쩌면 없어진 걸 같이 만들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삶이란 우리 앞에 놓여 있고 우리 뒤에도, 위에도, 우리 안에도 있는 거야. 당신이 한쪽으로 물러서 있는다고 해서, 눈을 감는다고 해서, 주먹을 불끈 쥔다고 해서 삶을 멈출 수는 있는 건 아니야. 당신은 혼자가 아니야. 우리와 다시 시작해. 우리가 여기 있잖아.’ --- p.1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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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못생겼다. 진짜로 못생겼다.”
한 선남선녀 부부 사이에서, 스스로 “인간이란 종에 대한 하나의 모욕이고 무엇보다도 여성에 대한 모욕”이라고 여길 만큼 못생긴 여자아이 레베카가 태어난다.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아버지는 딸을 외면하고, 어머니는 우울증에 걸리고, 어떤 이웃도 곁을 주려 하지 않는다. 어느 날 우연히 레베카가 피아노에 천부적 재능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그녀는 몇몇 사람의 도움으로 조심스럽게 바깥세상을 향해 걸음을 내딛기 시작하는데……. 《못생긴 여자》는 신인 작가만을 대상으로 하는 이탈로 칼비노상의 2010년 수상작이자, 이탈리아 최고 권위 문학상인 스트레가상의 2011년 최종후보작이다. 시선을 잡아끄는 소재와 구성에 문학으로 들려주는 사회적 메시지까지 겸비한 《못생긴 여자》는 삽시간에 이탈리아 서점계를 매혹시켰다. 특히 마치 피아노 소나타를 글자로 옮겨놓은 것처럼, 강약과 고저가 뚜렷한 문장과 리드미컬하고 화려한 구성에 찬사가 쏟아졌다. 여기에, 지중해의 해풍처럼 신선하면서도 따사로운 문학적 표현들이 감동과 기쁨을 배가하고, 개성 넘치는 캐릭터는 작품에 강력한 생동감을 부여한다. 삶의 안내자가 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인네인 척하는 이웃집 할머니, 뚱뚱하고 수다스러워 사랑받지 못하지만 진심으로 주인공의 친구가 되어주는 루칠라, 삶의 대부분이 수수께끼에 휩싸여 있는 에르미니아 고모 등 모든 인물이 각기 매력을 뽐낸다. 너무나 익숙한, 그래서 더욱 아픈 이야기 《못생긴 여자》는 ‘못생긴 여자가 어떻게든 예뻐졌고, 모두 행복하게 살았다’라는 식의 단순한 해피엔딩을 따르지 않는다. ‘사람은 외면보다 내면이 훨씬 중요하다’라는 식의 식상한 도덕적 교훈을 주입하려 들지도 않는다. 작가는 겉모습으로 한 인간을 평가절하하고 외면하는 세상에 절망하지 않고 맞서는 레베카의 이야기를 담담하고 차분하게 그려낸다. 그 이야기는 단순한 픽션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우리는 ‘보이는 것이 모든 것’인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겉모습을 보기 좋게 만들기 위해 병원을 찾거나 시간과 돈을 쏟아 붓는 세상에서, 우리는 사람마다 키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으며 콧대가 높을 수도 있고 낮을 수도 있다는 ‘상이점’은 무시한 채 동일한 ‘지향점’만을 추구하고 있다. 그 지향점에서 거리가 먼 사람을 희화화 또는 도태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뿐, 한 생명의 존재 자체가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좀체 주목하지 않는다. 그래서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못생긴 여자》는 너무나 익숙하고, 익숙한 만큼 더 아프다. 저마다의 삶을 긍정하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생의 찬가! 레베카뿐만 아니라 《못생긴 여자》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각자 상처나 비밀을 안고 살아간다. 누군가는 유전적 결함 때문에, 누군가는 잃어버린 것 때문에, 누군가는 가질 수 없는 것 때문에 남몰래 고통을 감내한다. 레베카는 이런 타인의 고통을 알아가는 와중에 자신의 아픔을 조금씩 지워간다. 소설 바깥의,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결점 없이 완벽한 인간이나 고독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없다. 벨라디아노는 ‘못생긴 여자’로 표상되는 어느 인간 군상을 통해, 모든 삶에는 각기 단점과 아픔이 있으니 서로 단단히 기대고 보듬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오는 듯하다. “난 불행하지 않아. 완전히 불행한 건 아니지. (…) 그냥 그게 내 인생일 뿐이야”라는 레베카의 마지막 말이, 마치 어떤 형태의 삶이더라도 긍정하고 끝까지 살아내라는 묵직한 외침처럼 울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