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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보잘것없는 곳에 숨겨두신 희망 / 황대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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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남자가 있습니다. 나이 47세. 이름 김영갑. 충남 부여가 고향. 지금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읍 삼달리에 살고 있습니다. 보통 그 나이의 대한민국 남자라면, 아이들 교육 문제로 골머리를 앓거나 직장에서의 명예퇴직을 걱정하고 있을 것입니다만, 이 남자는 전혀 그런 걱정이 없습니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지금은 이 남자를 부양할 가족이 없다는 것이 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남자는 제주도를 오가는 바람을 만지며, 떠오르는 해와 지새는 달을 보며, 억새처럼 휘청거리며 그저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 남자는 사진작가입니다. 아니 이제 사진 작가였다는 표현이 맞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카메라 셔터를 누를 힘이 남아 있지 않아 사진 작업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남자는 20여 년 전에 카메라 하나를 달랑 메고 제주도에 왔습니다. 그리고는 제주도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제주도의 사람과 자연을 찍고 또 찍었습니다. 달도 찍고 별도 찍고 바다도 찍고 산도 찍었습니다. 그가 찍지 않은 것은 제주도에 없는 것입니다. 필름이 떨어지면 막노동을 해서 필름을 샀습니다. 배고픔은 참을 수 있어도 필름이 떨어지면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해안 마을에서도 중산간 마을에서도 마라도에서도 몇 년간 살았습니다. 어느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제주도의 빛과 바람을 그는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훌쩍 흘렀습니다. 이 남자는 이제 밥도 먹지 못합니다. 죽과 같은 유동식으로 천천히 식사를 해야만 합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합니다. 말도 힘들여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이라고도 하는 루게릭 병 때문입니다. 이 병은 정확한 발병 원인도 치료법도 모르는 불치의 병입니다. 확증이 되면 대개 5년을 넘기기 힘들다지요. 한때 75kg이던 그의 건장한 육체는 이제 43kg으로 볼품없이 줄어들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에게는 이제 그의 사진을 아끼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마련한 사진 갤러리가 있고, 그가 몸으로 마음으로 찍은 20여만 장의 필름이 있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그뿐입니다. 그의 사진 갤러리는 폐교된 삼달초등학교를 5년간 임대하여 그가 구상해서 꾸민 공간으로, 2002년 7월 1일에 문을 열었습니다. 한라산의 옛 이름에서 따와 ‘두모악’이라 하지요. 최근에는 관광객이나 입소문으로 전해들은 사진 마니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제주도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몸은 병들었지만 이 남자는 오히려 평화를 찾았습니다. 미친 듯한 열정으로 찍어대던 사진도 더 이상 찍지 못하고, 중산간을 오르내리던 튼튼한 다리도 말을 듣지 않지만, 그래서 돌볼 말 한 마리 없는 제주도의 마지막 테우리(목동) 같은 신세가 되었지만, 이 남자의 가슴에는 회한과 미련보다는, 슬픔과 애착보다는, 마음속의 화해와 고즈넉한 일몰의 평화가 있습니다. 그는 생명이 역동하는 대자연 속에서 20여 년에 이르는 사진 작업을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이 시기하고 다툴 뿐이지, 세상은 정말로 아름다운 곳이라고 그는 우리의 바쁜 걸음을 멈춰 세웁니다. - ‘이어도를 훔쳐본’ 사진가 김영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