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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1장. 장생불로의 꿈 1. 생년불만백 2. 신선을 꿈꾸던 진시황제 3. 방사에 미친 한무제 4. 장생불로약 5. 어녀비방 6. 황제들의 평균수명은 41세 7. 낭만과 풍류를 즐기다 2장 풍류 천자 1. 타고난 외모 2. 풍류 황제 3. 영준한 미소년 홍력 4. 유람에 취하다 5. 불심 천자 3장. 황제의 여인과 자녀들 1. 하늘과 땅이 만나다 2. 효현순황후 부차 씨 3. 두번째 황후, 여승이 되다 4. 절세 미녀, 행아 5. 향비에 얽힌 진실 6. 황제의 마지막 사랑 7. 건륭황제의 자녀들 4장 강남 시찰 1. 중국 최대의 황실여행단 2. 제1차 강남시찰 3. 제2차 강남시찰 4. 제3차 강남시찰 5. 제4차 강남시찰 6. 제5차 강남 시찰 7. 제6차 강남 시찰 5장 건륭황제의 식생활 1. 음식 양생 2. 궁중의 식사 3. 음식의 구성 4. 내선방 5. 태화전의 축수연과 국연 6. 건청궁의 가연 7. 천수연 8. 어다방 9. 황제의 음식기호 10. 합리적인 식단 11. 황제가 마시던 술 12. 옥천산 샘물 6장 황제의 양생방식 1. 황제의 의복 2. 생활환경 3. 일과와 생활 4. 다양한 이동방법 5. 생활의 정취 6. 장생불로를 심신 수양으로 삼다 7. 군신 관계 7장 행복한 만년 1. 오복오대당 2. 양심전에서 보낸 세월 3. 태상황으로서의 생활 4. 생명의 만가 5. 유조 부록 역자후기 |
向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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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황제의 인생경영은 어떠했을까?”
풍류 천자의 웰빙 인생을 엿보다 남들보다 오랫동안 건강하게 사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리 인간의 영원한 꿈이자 희망사항이다. 고대 중국의 황제들은 완벽한 조건이 갖추어진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여 일반 백성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그들 중에는 ‘잘 먹고 잘사는 것well being’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고 실천에 옮긴 황제들도 있었지만 과도하게 장수에 집착하여 일찌감치 세상을 마감했던 황제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중국 청나라의 건륭乾隆황제는 89세로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한대의 풍류를 즐기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뚜렷한 주관을 갖고 매사에 절제된 생활과 독특한 섭생수양을 기본으로 하여 행복하고 완전한 삶, 즉 웰빙 인생을 살고자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강남 지역을 여섯 차례나 시찰한 풍류 천자이자 수많은 시를 읊조리며 인생을 논했던 시인 황제에게도 한 개인으로서의 고뇌와 열정 그리고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가슴 아픈 사랑이 하나쯤은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시대의 정치적 상황이나 특정인물이 미치는 영향력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역사적 기록 방식에서 벗어나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귀중한 자료를 바탕으로 건륭황제의 일상을 핍진하면서 개인적인 측면의 내용을 아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국정을 논하는 황제의 근황과 정치, 외교, 정치소식 등 딱딱한 내용을 전하는 18세기 버전의 9시 뉴스라기보다는 하루 두 끼만으로 소식을 고집하며 자신의 건강을 철저하게 관리했던 몸짱 황제의 건강관리법에서부터 사랑하는 여인들에게 살갑고 다정다감했던 황제의 인간적인 모습까지 솔직담백하게 담아내는 한편의 ‘인간 극장’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 건륭황제에 관한 궁금증 - 7문 7답 * 태어날 때부터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던 인간 건륭의 어린 시절은? 청나라 제 6대 고종황제 건륭은 본명이 홍력弘曆이다. 그는 조부인 강희제康熙帝가 이룩해놓은 태평성대의 시기에 일찌감치 황위 계승자로 결정되었으며 아버지 옹정제擁正帝의 뒤를 이어 25세에 황제가 되었다. 건륭은 어려서부터 당대 최고의 스승들로부터 학문의 근본을 배웠으며 뛰어난 무예실력을 지닌 친왕들에게 궁술과 기마술을 익히면서 문무를 겸비한 황제의 초석을 다질 수 있었다. * 건륭황제는 그 많은 후비들을 어떻게 아무런 갈등 없이 거느렸을까? 청나라의 황제들은 중국 역사상 가장 절제된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그들도 역대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처첩을 두었다. 건륭은 그들 중에서도 ‘양정지도養精之道’의 이치를 가장 잘 이해하였던 황제 중 한명이었다. 후궁에서는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기 위해 갖은 암투와 시기가 끊이지 않았지만 건륭은 속 좁은 여인들을 위엄 있게 제압하고 후궁의 안정을 유지하였다. 특히 정실부인이었던 효현황후의 높은 덕망과 사려 깊은 배려로 불화와 반목이 생기지 않았으며 비교적 편안하고 낭만적으로 후궁을 지켜나갈 수 있었다. * 여섯 차례에 걸친 강남시찰이 건륭의 인생에 미쳤던 의미는? 건륭황제는 여섯 차례에 걸친 강남시찰을 서정과 함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한가지로 높이 평가했다. 서정西征은 중국 서부와 북서부의 광활한 지역을 통일하고 국토를 2만 여리 정도 확장한 업적을 가리키는 말로서, 건륭은 한족을 장악하고 강남지역의 보물들을 확보함으로써 만주족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속뜻이 담겨 있었던 남방시찰에도 그에 상응하는 의미를 두었다. * 건륭황제가 남긴 4만여 수의 방대한 시에서 배울 수 있는 인생철학은? 시를 쓰는 것이 건륭황제에게는 부담이 아니라 일종의 향수였다. 건륭황제는 그저 시가 좋아 즉흥적으로 쓰면서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펼쳐나갔다. 건륭황제에게 시는 생명의 일부분이고 생활의 정취와 기탁이었으며 그가 몸을 놀리고 정을 자양하고 기를 운항시키는 양생법이었다. 시는 그가 매일 해야 할 수양 습관이었으며 건륭은 그 속에 묻혀서 세속을 벗어나고자 했다. * 건륭황제는 어떤 옷을 입고 어디에서 어떻게 생활했을까? 황제의 복식은 상황에 따라서 조복관, 길복관, 상복관, 행복관, 우복관 등으로 다양한데 전용색상인 황금색 외에도 다양한 색상의 옷을 입었다. 건륭 황제는 황자 시절에 낙선당樂善堂이라는 서재에 주로 머무르며 학문을 익혔으며 황제로 즉위한 후에는 양심전에서 주로 생활하였고 1,000여 마리의 금룡이 조각된 태화전의 보좌에 앉아서 주로 정무를 처리하였다. 건륭황제는 등심초 보료가 깔린 단단한 침대를 주로 이용하였는데 여름철에는 상아 돗자리와 참대 돗자리에서 잠을 이루었다. * 건륭황제가 즐겨먹었던 음식과 그의 장수 비결은 무엇일까? 고대 중국의 양생학자들에 따르면 합리적인 음식 구성은 곧 오곡이 서로 섞이고 육류와 채소류가 배합되는 것이었다. 청나라 황실에서 전해 내려오는《선저당膳底?》의 기록에 의하면 건륭황제가 먹었던 음식은 주식 47종, 부식 47종, 더운 요리 59종, 탕류 7종 등이 있었다고 한다. 건륭황제는 주로 오리와 제비집을 즐겼으며 조석으로 열탕면과 죽을 함께 먹었다. 하지만 평소에는 콩제품과 산나물을 거의 매끼마다 빼놓지 않고 먹었다. 건륭황제의 식단 구성은 아주 합리적이었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맑고 담백한 가운데 식욕의 즐거움을 누렸다. 건륭황제에게는 무엇보다도 자신만의 독특한 양생, 장수비결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물四勿’과 ‘십상十常’을 생활 속에서 실천한 것이었다. 사물 식사 시 말을 하지 않는다. 취침 시 말을 하지 않는다. 술에 취하지 않는다. 색에 미혹되지 않는다. 십상 늘 이를 부딪힌다. 늘 침을 삼킨다. 늘 귀를 튕긴다. 늘 코를 문지른다. 늘 눈을 움직인다. 늘 얼굴을 비빈다. 늘 안마한다. 늘 배를 어루만진다. 늘 사지를 뻗친다. 늘 항문을 위로 조인다. * 5대가 함께 살았던 건륭황제의 만년 생활을 어떠했을까? 역사적으로 기록된 태상황들의 비참한 운명을 잘 알고 있었던 건륭황제는 건륭 61년에 황위를 가경제에게 넘겨주고 태상황으로 물러난 뒤에도 황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퇴위 후에도 여전히 양심전에 머무르며 건륭은 74세에 현손(손자의 손자)까지 보게 되는 장수를 누리며 5대가 함께 사는 복을 누렸다. 그는 말년에는 불면증으로 고생하기도 했지만 다양한 양생법을 실천하여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시와 풍류를 즐기면서 여생을 마무리하였다. ■ 본문 내용 인생이 백 살을 넘지 못하거늘 진시황, 한무제, 당태종 등 역대 중국의 황제들은 모두 장수를 꿈꾸었지만 방사들의 술수에 속아 선약에 빠져들었으며 장생술을 과도하게 집착하여 대부분 단명하고 말았다. 진시황 때부터 1911년 청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장장 2,100여 년 동안 중국에는 총 335명의 황제가 등극했는데 그들의 평균 수명은 고작 41세에 불과했다. 그 중에서 60세 이상은 36명 정도로서 청나라의 건륭은 89세까지 천수를 누리면서 그들 중에서도 가장 장수했던 황제였다. 비록 헌원軒轅씨 황제黃帝가 111세까지 장수를 누린 것으로 전해지기는 하지만 이것은 고대 신화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다.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건륭황제는 조선시대의 세종대왕과 유사한 위상으로서 ‘봉건시대의 전성기’에 중국을 성공적으로 통치한 황제였다.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여 훌륭한 소양을 갖추고 확고한 정치적 배경을 바탕으로 건륭은 정말로 모든 것이 가능했던 그야말로 황제 중의 황제였다. 하늘과 땅이 베필로 만나다 청대의 황제들이 후비와 동침하는 경우에는 태감이 시중을 들고 그 시간을 관리한다. 매일 저녁때마다 황후는 어느 후비가 시침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각각의 후비들은 모든 푸른 패쪽을 갖고 있는데 그 위에 그녀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황제가 저녁식사를 할 때 경사방의 태감은 후비의 패쪽을 큰 쟁반에 놓아 선택에 맡기는데 이것을 ‘선패膳牌’라고 한다. 황제가 식사를 끝내면 경사방의 태감은 그 앞에 무릎을 끓고 선패를 높이 든다. 가령 의향이 없으면 황제는 “물러가거라”고 말하며 그렇지 않으면 패 하나를 택하여 다른 태감에게 건네준다. 이 태감은 황제가 점찍은 후비를 알몸 상태로 담요나 붉은 솜이불에 감싸서 어깨에 메어 황제의 침궁으로 들여보낸다. 그러면 황제의 발끝 쪽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동침하는 것이다. 태감은 창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너무 오래 지체되면 “시간이 되었사옵니다.” 라고 높이 외친다. 황제가 이를 아랑곳 하지 않으면 잠시 후에 한 번 더 외친다. 그리고 세 번째로 다시 외친다. 그러면 황제가 태감에게 후비를 메어가도록 한다. 그런 연후에 태감이 황제에게 “남길까요?” 라고 묻는다. 황제가 “남기지마라.” 고 답하면 총감 태감이 메어나간 후비를 쫓아가 엉덩이에 있는 혈자리를 눌러 정액을 전무 흘려버리게 한다. 가령 황제가 남기라고 말하면 태감과 기거 주관이 이를 상세히 기록한다. “모월 모일 모시에 황제가 아무개 비와 동침했다.” 중국최대의 황실여행단 건륭황제는 조부인 강희제를 본받아 강남지역을 여섯 차례나 시찰했다. 강희제가 강남을 방문했던 목적은 자신의 통치권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건륭의 재위 당시 청 왕조는 이미 100여년의 건국 역사를 자랑하며 정권이 확고해진 상태에서 민심이 안정되고 천하태평한 시기였다. 따라서 건륭황제의 남방 시찰은 중국 역사상 가장 방대한 규모의 황실여행단인 셈이었다. 건륭 연간에 진행된 여섯 차례의 남방시찰은 건륭 16년, 22년, 27년, 30년, 45년, 49년에 각각 이루어졌다. 남방시찰시 황제의 이동거리는 하루에 약 60리 정도였다. 시찰 행렬이 이르는 곳마다 지방 관리들은 당시의 명승고적과 인문, 풍정 등을 밝힌 상세한 지도책을 곧바로 올려야 했다. 그리고 일정한 간격으로 행궁을 건설하고 행궁 밖에는 황포성, 몽고포 등 크고 작은 장막을 지었다. 황실 남행 일행은 강남에 들어선 후 주로 수로를 이용하여 전진하였는데 황제, 황태후, 황후가 탄 배를 ‘안복루安福?’ 또는 ‘상봉정翔鳳艇’이라고 불렀다. 선대의 행진은 인력으로 끌었는데 이런 인부들은 모두 세심하게 선별된 병사들이었다. 황제의 어선은 3,600여명의 인부가 필요하며 한 팀은 600명으로 구성되어 각각 여섯 무리로 나뉜다. 황제를 위하여 힘쓰는 일은 이들에게는 일생의 영광이었으며 타인의 부러움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그들을 ‘용수염장정’이라고 불렀다. 황제의 음식 제비집은 건륭황제가 가장 즐겨먹던 음식이었다. 건륭이 먹은 제비집은 카나리아가 둥지를 틀면서 그 타액으로 응고시켜 만든 일종의 건축재료였다. 알을 낳은 카나리아는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계속 타액을 이용하여 둥지를 틀고 그것도 모자라면 피라도 아끼지 않는다. 카나리아는 벼랑 위와 암석 동굴 깊은 곳에 둥지를 틀고 자신의 정력을 집중시켜서 만든 그 진귀한 타액을 응고시키는데 그 맛이 천하일품이어서 최고의 영양식품으로 꼽힌다. 제비집 중에서 투명한 것은 상등품으로 ‘백연’이라고 하고 안에 핏줄기가 있는 것은 ‘혈연’ 이라고 하고 갈색이며 소량의 털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모연’이라고 한다. 황제의 식단에는 오리 또한 빠지지 않았는데 늙은 숫오리를 큰 솥에 던져놓고 끓이면 그것으로 절반은 끝난 셈이다. 먼저 좋은 샘물로 오리를 깨끗이 씻는다. 그리고 그곳을 24종의 조미료를 넣은 물에 넣는다. 간을 맞춘 오리를 도자기 탕관에 넣고 그 탕관을 물이 가득 찬 큰 시루와 가마에 넣은 후 뚜껑을 꼭 닫는다. 그리고 과일나무 등을 땔감으로 사용하여 약한 불로 사흘간 연속해서 찐다. 오리는 노랗고 맛깔스럽게 보여서 먹기도 전에 벌써 입에 군침이 돌며 입에 넣으면 살살 녹을 정도로 부드럽다. 이외에도 건륭은 속칭 ‘권두채拳頭菜’라고도 불리는 산나물의 왕인 고사리를 즐겨 먹었는데 당송시기의 많은 문인들은 고사리의 맛보고는 너나할 것 없이 시를 써서 찬양하기도 했다. 이에 고사리의 가격이 많이 올라서 귀중한 산나물로 부상했으며 황실의 미식 대열에 올랐다. 그리고 이후부터 공물로 진상되었으며 황실의 필수 요리재료가 되었다. 황제의 전용의복 황제의 옷은 명황색, 금황색을 위주로 하는데 황색은 황제의 전용 색상으로 그 누구도 사용할 수 없다. 단 황제가 하사한 것은 예외이다. 그러나 황제의 옷이 황색뿐인 것은 아니다. 하늘에 제사 지낼 때에는 남색을 입으며 태양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적색을 입고, 달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백색을 입는다. 황제의 윗도리와 치마에는 12장의 무늬가 그려져 있다. 상의에는 해, 달 성신, 용, 꿩 등 6장이 있으며 치마에는 종이, 수초, 불, 쌀가루, 보(?:흑백이 엇갈린 도끼무늬), 불(?: 흑청이 엇갈린 무늬) 등 6장이 수놓아져 있다. 황제의 곤룡포 위에는 발이 다섯인 금룡을 수놓았는데 정면에 4마리, 두 어깨 앞뒤로 각각 1마리가 있으며 일, 월, 만수 등 전문과 오색구름 등을 수놓았으며 용포의 아래에는 팔보 무늬와 벼랑과 바닷물을 수놓았다. 생명의 만가 만년에 이르러서도 건륭황제는 여전히 건강했다. 그렇지만 불면증이 악몽처럼 그를 괴롭혔다. 그는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불면증을 치료하고자 애썼다. 건륭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꽃을 감상하고 고기를 기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조석으로 달리기를 했으며 낮에는 불경을 베껴 쓰고 정심주를 읽었으며 취침 전에는 호흡으로 기를 운행시켰다. 그 결과 큰 효과를 보아 태상황 때부터는 잠을 잘 이루게 되었는데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건륭은 만년에 천명을 누린 셈이었다. 그는 풍류에 넘친 일생을 보냈으며 자식복도 많았다. 또한 그의 문치와 무공은 제왕들 속에서도 전무후무했다. 임종 시에도 아주 대단해서 죽어서도 떳떳할 수 있었다. 건륭은 25세에 황제로 등극하여 60년간 재위하였는데 뒤를 이어 태상황으로 지내면서도 여전히 황궁을 집정하여 총 64년 동안 천수를 누리고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