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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콜럼버스의 신대륙
콜럼버스의 제안은 현실성이 희박 친구는 언제나 동지 달걀을 세워 보시오 파란만장한 콜럼버스의 인생역정 기지가 번뜩이는 콜럼버스의 선원 무마 방법 추악한 콜럼버스 콜럼버스의 최초 상륙지와 묘지 신대륙의 발견자는 콜럼버스가 아니다 위대한 거짓말쟁이 아메리고 베스푸치 2. 링컨의 노예 해방 노예 해방에 불을 붙인 스토우 부인 링컨 = 노예 해방 부정선거를 자행한 링컨 대통령 부인은 최고급 상복을 입을 의무가 있다 3.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코르시카의 촌뜨기 나폴레옹 프랑스인들을 후련하게 만든 나폴레옹의 신화 여론 조작에 천재성을 보인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독살되었다 증거물로 채택된 나폴레옹의 머리카락 권력무상 4. 자유를 향한 바스티유 점령 프랑스 혁명의 전야 오스트리아 공주의 낭비벽 탈출도 우아하게 루이 17세의 비밀 조작된 바스티유 함락 5.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동상이몽 리빙스턴도 놀란 아프리카 탐험가의 명성 리빙스턴의 아프리카 탐험은 노예 해방을 위해서 낫세포 빈혈증이 노예 사냥의 주범? 리빙스턴의 지도가 보물임을 알아차린 스탠리 원주민 학살장으로 변한 아프리카 자로 재서 분할한 아프리카 지도 6. 인류의조상 필트다운인 성경에도 적혀 있지 않은 불가사의한 화석 차츰 밝혀지는 화석의 진가 아마추어 고고학자 도슨 인류의 오리진 도슨 사망 후 추가 유물이 나오지 않았다 연대 측정방법의 노하우 아직도 가짜 유물 사건은 횡행 7. 갈릴레이의 이단 심판 천재의 반열에 선 18세의 갈릴레이 갈릴레이에게 호의적인 교황청 우군을 적군으로 묘사한 실수 전설의 창고 갈릴레이 갈릴레이의 이단 심판 8. 전율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실존한 빅브라더 전율의 아우슈비츠 유태인들의 피해 유태인 박해의 역사 언론에서조차 가스실의 존재를 믿지 않아 9. 비운의 아나스타샤 공주와 알렉세이 황태자 세상이 바뀌는 것을 거부한 러시아 황제 황제 일가 살해의 전말 아나스타샤 공주의 미스터리 황제 일가를 처형한 장병은 3명이었다 밝혀지는 진실 알렉세이 황태자는 살해되지 않았다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가 밝힌 최후의 날 10. 파라오의 저주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고고학적 발굴의 시작 네브-케펠-라 파라오 저주의 서막 파라오 저주에 관한 과학적 분석 언론의 마케팅 전략, 파라오의 전설 투탕카멘의 아버지 이크나톤 권력 다툼에 희생된 투탕카멘 11. 사상 최대의 상륙 작전 연합군의 상륙지점은 파드칼레 총동원된 독일군 기만 작전 진공관 컴퓨터 콜로서스의 활약 히틀러도 위장술에는 고단자 참고문헌 |
李鍾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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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의 저주에 관한 이야기는 수많은 소설이나 영화, TV 시리즈물로 제작되어 잘 알려져 있지만 과학적인 분석이라는 것은 파라오 저주가 사실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파라오의 저주에 대해서 조사하던 학자들은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한 마디로 파라오의 저주라는 전설은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투탕카멘 파라오의 무덤 발굴과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와는 달리 실제로 그 발굴 작업에 관련된 사람 1천 5백여 명 가운데 10년 이내에 사망한 사람은 21명에 불과했다. 1933년 독일의 고고학자 슈타인도르프는 그동안 신문이 발표한 21명의 죽음을 하나하나 뒤쫓아 분석하였다. 그 결과 나이가 들어 죽었거나 발굴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의 죽음, 또는 우연한 죽음이었다고 진상을 밝혔다. 파라오의 무덤을 최초로 개봉한 장본인인 카터는 18년이나 잘살다가 66세의 나이로 자연사하였고 그와 함께 무덤을 열거나 유물들을 옮겼던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26년 후에 사망했다.
파라오의 관에서 일반적으로 '사자의 안녕을 방해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라'는 문구가 써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투탕카멘의 관에는 정반대로 '왕의 이름을 알리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투탕카멘은 오히려 자신의 무덤이 후손들에 의하여 영광스럽게 개봉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투탕카멘의 저주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세계 각국의 언론사와 카나번사이의 복잡한 이해 관계 때문에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카나번이 발굴하는 데 자금이 쪼달리게 되자, 발굴이 성공할 경우 모든 정보를 독점적으로 보도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런던 타임스 신문사의 지원을 받게 된다. 이것은 당시까지만 해도 유례가 없던 일로, 엄청난 특종을 눈앞에 두고도 다른 신문사를 거쳐서야 기사를 보도할 수 있게 된 전 세계 언론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파라오의 저주는 때마침 카나번이 일찍 죽게 되자 이런 '악감정'을 가진 언론에 의하여 과대 포장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런 기사들이 예상 외의 반응을 보이자 언론은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투탕카멘에 조금이라도 관계되었던 사람이 사망하면 '파라오의 저주를 받은 죽음', '파라오의 복수', '투탕카멘으로 부터 저주를 받은 몇 번째 희생자' 따위의 제목으로 세인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곧바로 파라오의 저주에 대한 수많은 영화가 제작되었고 소설도 수없이 나왔다. 소위 장사가 잘되는 상품을 그대로 두지 않으려는 장사꾼 속성이 파라오의 저주라는 전설을 부채질한 것이다. 실제로 이와 같은 질문을 받은 카터는 '투탕카멘의 저주를 둘러싼 소문은 중상 모략을 위해서 짜낸 착상' 이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파라오의 저주가 있다고 해도 이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얼마 전에 파라오의 저주가 풀렸다고 확언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국립 고대박물관의 어윈 프랭크 박사는 파라오의 저주의 역사가 끝을 맺게 되었다고 했다. 전설에 의하면 투탕카멘은 죽을 때 자신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복수를 하겠다고 했다. 프랭크 박사에 따르면 투탕카멘은 당시 권좌를 노리던 이들에게 계획적으로 살해당했다. 이 때문에 비명횡사한 젊은 왕은 '죽음의 저주'라는 극약 처방까지 동원하여 후대에라도 그 음모가 밝혀지기를 고대했다는 것이다. 1968년 X선을 사용한 머리의 검사에는 작은 뼈의 단편이 발견됐다. 두개골 파열이 흔적이었다. 투탕카멘이 살해되었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해 주는 대목이다. --- pp.250~2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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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프랑스인들이 처형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들이 외국의 보수 세력만이 왕정을 구해 줄 수 있다고 믿고 치밀한 탈출 계획을 세운 후 프랑스를 탈출하려다 발각된 것이 결정적인 이유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들이 프랑스를 탈출하는 것은 당시의 여건으로 볼 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의 실각 후 왕으로 복귀하는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도 마차를 타고 프랑스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당시 목숨에 위협을 느낀 수많은 귀족들이 탈출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탈출에 성공하지 못한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들도 파리를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국경을 넘기직전에 신분이 탄로나서 강제로 송환된다. 이 탈출극으로 왕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고 결국 죽음을 자초했는데 그들의 탈출이 실패로 돌아가게 된 데는 앙투아네트의 왕비 병이 한몫을 단단히 했다. 그녀는 프랑스를 탈출하는 데도 왕비답고 우아하게 처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측근들이 그들이 탈 마차는 작고 속도가 빨라야 하며 물건들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고 권고했지만 막상 마차를 제작하는 단계에서 앙투아네트가 자신의 휴대품을 모두 갖고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녀는 자신의 화장도구, 가구, 식기류, 술도 갖고 가야 하며 변기도 두 개나 설치하도록 명령을 부렸다. 화장실(변기)이 두 개나 갖추어진 것을 보면 아무리 탈출하는 처지라도 프랑스의 왕이 길가에서 용변을 본다는 건 생각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그녀의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다 보니 당연히 거대한 마차가 되고 말았다. 12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에 루이 16세 일가 5명에 7명의 하인이 탈 수 있었는데 요즘 시대로 보면 거대한 버스와 마찬가지의 규모였다. 결국 이러한 거대한 마차에다 수행하는 마차 한 대까지 합세했으니 그들의 이동이 눈에 띄지 않았을 리 없었다. 사실상 그들이 프랑스 국경까지 갈 수 있었던 것도 엄청난 기적이었다. 더구나 천진한 왕 일가족은 파리를 벗어나자 긴장이 풀려 마차를 세우고 산책까지 즐겼다고 한다. 19세에 프랑스의 왕비가 되어 38세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앙투아네트는 사치스러운 생활과 구설수로 군주제에 내재되어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 pp.103~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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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것은 제 2차세계대전 중에 독일군이 설립한 각종 수용소에서의 유태인에 대한 학살이 일반인에게는 전쟁중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전쟁이 끝난 후 전범 재판을 할 때 나치의 간부들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 p.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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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를 따라다니는 또 하나의 유명한 전설, 피사의 사탑에서의 물체 낙하 실험은 완전히 꾸며진 거짓말이다. 그의 나이 25세 때 피사 대학에서 수학을 강의하던 무렵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 낙하에 대해 무거운 것은 빠르게, 가벼운 것은 느리게 낙하한다고 생각하였다. 쇠공이 솜덩이보다 빨리 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지구의 인력과 공기의 저항 때문에 그런 차이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공기의 저항력이 없다면 무거운 것도 가벼운 것도 동시에 떨어질 것이다.' 공기가 없는 진공 중에서의 낙하에 대해서는 그의 생각이 옳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진공을 만든다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갈릴레이의 제자 토리첼리가 '토리첼리의 진공'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그가 사망한 다음 해인 1643년의 일이다. 진공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공기 저항의 영향은 가벼운 물체에서 더욱 크게 나타나므로 무거운 물체끼리를 비교하면 그들은 거의 동시에 낙하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갈릴레이는 1590년 어느 날 피사 사탑의 7층 회랑에서 직경 10센티미터의 납으로 만든 공과 떡갈나무로 만든 공을 동시에 가만히 놓았다. 납으로 만든 공의 무게가 떡갈나무 공의 2배이므로 과거의 이론에 의하면 납으로 만든 공이 2배나 빨리 떨어져야 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군중들은 두 공이 함께 나란히 떨어지는 것을 보았고 똑같은 시각에 지면에 떨어지는 단 한 번의 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 순간 당시까지의 이론이 틀렸고 갈릴레이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것이 전설의 내용이다. 갈릴레이의 이 유명한 실험의 진위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실험이 왜 일어나야 했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중력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어떤 물건이든 힘이 없으면, 즉 끌든가 밀든가 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자석의 경우 쇠를 끌어들이지만 이 둘 사이를 직접 연결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자력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두 물체 사이를 연결하지 않고도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힘, 즉 중력에 대해 당시의 학자들은 알고 있었다. 이런 중력에 관한 지식은 전쟁에서 대포가 쓰이게 되면서부터 대단히 중요하게 되었다. 포탄이 공중을 어떻게 날아가는가를 자세히 연구하던 학자들은 포탄에 작용하는 힘에는 두가지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는 화약의 폭발로 생기는 힘으로 이 힘이 포탄을 공중 높이 쏘아 올린다. 다른 또 하나의 힘은 포탄을 지표면 쪽으로 당기는 것으로 이 힘 때문에 포탄이 계속 날아가지 않고 지면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 힘을 중력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당시의 유명한 학자인 갈릴레이가 중력을 이해하기 위해 피사의 사탑에서 공개적으로 실헙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은 아니다. 더구나 피사의 사탑은 그가 말한 낙하 실험을 하는 데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피사의 사탑은 약 55.8미터나 되며 그 당시에도 연직선으로부터 4미터 정도나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갈릴레이의 낙하 실험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서 물체의 낙하 실험을 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갈릴레이 자신도 자신의 저서에서 그런 실험에 대해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더구나 그 당시의 실험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의 기록도 전혀 없다. 사실 이탈리아의 유명한 학자인 갈릴레이가 공개적으로 실험을 했다면 그것은 당시에 매우 주목을 끄는 실험이 되었음이 틀림없고 누군가가 자신의 목격담을 적었을 것이라는 것이 갈릴레이 실험을 부정하는 이유이다. 결론은 피사의 사탑 실험은 실제의 사건이 아니라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 pp.172~1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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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항상 진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책은 그 중에서도 크게 세 가지를 다루고 있다.
첫째, 역사는 대부분 승리자들의 입장에서 기록이 되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역사적 사실의 일부분을 삭제하기도 일부분을 과장하기도 한다. 그렇게 왜곡된 사실들은 파급효과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면 커질수록 오히려 그것을 사실로 믿으려 하는 속성도 강하게 작용하게 된다. 그래서 처음엔 의심을 하다가도 나중엔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의 '바스티유 점령'이 그 예이다. 두 번째, 사람들에겐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속성이 있다. '필트다운 사기 사건'의 경우, 기존의 뇌의 용량이 작은 원인(原人)과는 달리 뇌의 용량이 큰 필트다운인 화석이 발견되자 사람들은 인류는 다른 동물보다 뇌가 발달된 동물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터라 그 사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말았다. 세 번째로 언론 매체의 조작이다. 사람들이 정보를 흡수할 수 있는 신문이나 방송이 이권과 타협하여 사실을 왜곡할 경우 진실을 밝혀내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이다. '파라오의 저주'가 그 예이다. <세계를 속인 거짓말>은 이런 세 가지 종류의 경우를 다루며 역사적 사실에 대해 좀더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각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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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속이고 당신을 기만한 열한 가지 거짓말!
1. 콜럼버스의 신대륙─콜롬버스는 위대한 신대륙 발견자인가, 아니면 돈에 눈이 먼 노예 학살자인가?
지난 1천 년 동안 가장 위대한 탐험가로 뽑힌 콜럼버스, 그러나 그는 탐험 정신보다는 신대륙지에서 얻게 될 금과 재화를 위해 원정에 나섰던 것이고, 실제로 보다 많은 재화를 얻기 위해 신대륙지에서 원주민들을 착취하고 무자비하게 학살했을 뿐 아니라 노예로 유럽에 팔아넘겼다. 2. 링컨의 노예 해방─링컨은 노예 해방론자가 아니었다. 노예 문제로 남부와 북부가 대립을 보이자 링컨은 미국이 단결을 위해 노예 해방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노예제도에 대해 수시로 그 입장을 바꿨으며 미국의 단결을 위해선 노예제도를 존속시킬 수도, 해방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3.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나폴레옹은 천황을 수시로 조작한 최고의 거짓말쟁이였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유리하게 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늘 전황을 조작해서 발표했다. 자신의 판단 실수로 실패한 러시아 침공도 추운 날씨 탓으로 돌렸으나 나폴레옹이 철수할 당시, 날씨는 따뜻했다. 4. 자유를 향한 바스티유 점령─바스티유 점령은 국가의 자부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프랑스의 자작극이었다. 바스티유 감옥의 공격에 관한 기록은 프랑스 정부가 발표한 내용과 전혀 다르다. 분노한 민중들이 바스티유를 무력으로 공격하기 전에 감옥의 문은 열렸고 감옥에서 갇힌 사람들은 당시 사소한 문제로 들어온 귀족들이었다. 5.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동상이몽─리빙스턴에겐 노예 해방을 위해, 스탠리에겐 아프리카 식민화를 필요했던 지도 한 장 리빙스턴은 노예 무역을 근절시키기 위해선 아프리카와 유럽이 정당한 무역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역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스스로 탐험을 하며 아프리카 지도를 제작한다. 그러나 자신의 목적을 이뤄주길 부탁하며 리빙스턴이 건넨 지도를 <타임즈> 기자 스탠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는 데 철저히 이용한다. 6. 인류의 조상 필트아운인─선사시대의 과학 중 가장 유명한 조작 사건 선사시대의 과학은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조작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 그중에서도 특히 필트다운 사건은 가장 유명한데 누군가가 원인(原人) 두개골과 오랑우탄의 턱뼈를 가공하여 붙인 것이었다. 너무나 그럴듯한 이 화석으로 인해 선사시대 고고학은 무려 40년 동안 감쪽같이 속았다. 7. 갈릴레이의 이단 심판─갈릴레이 시대의 사람들도 지구가 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갈릴레이는 이단심판에 회부되어 심한 박해를 받고 자신의 발견을 누설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서약서에 서명을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 그 시대 사람들도 지구가 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교황청에서는 지구가 돈다는 과학적인 증거를 갈릴레이에게 요청했고 갈릴레이가 그 요청을 거부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이다. 갈릴레이는 그 유명세만큼이나 많은 왜곡된 전설을 만들어낸 과학자이다. 8. 전율의 아우슈비츠─수용소에 끌려가는 유태인조차 알지 못했던 아우슈비츠의 만행 나치의 철저한 정보유출 통제로 세계는 물론, 독일의 간부뿐 아니라 가스실로 끌려가는 유태인조차 자신들이 학살될 거라는 걸 알지 못했다. 9. 비운의 아나스타샤 공주와 알렉세이 왕자─알렉세이 왕자는 총살당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마지막 공주 아나스타샤와 황태자 알렉세이는 죽지 않았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자신을 아나스타샤라고 말하는 여자가 나타난다. 그러나 러시아 황실의 측근들은 러시아 황제가 외국 은행에 예치한 재산 때문에 그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20년 동안 재판이 벌어지고 유전자 감식 결과 그 여자는 공주가 아니라고 밝혀진다. 1988년엔 자신이 알렉세이 황태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이미 죽었지만 그 자녀들의 유전자 감식 결과 러시아 황실 가족들과 같은 유전자를 가졌음이 밝혀졌다. 과연 그는 러시아의 마지막 황태자일까? 10. 파라오의 저주─파라오의 저주는 언론의 마케팅 전략 파라오의 저주를 부른 투탕카멘은 10세에 파라오에 등극하여 20세에 죽은 비운의 왕이다. 왕가의 게곡에 묻혀졌던 왕 중에 가장 나중에 발굴된 투탕카멘의 무덤엔 엄청난 양의 유물들이 들어 있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어서 이 무덤에 관계된 사람들이 하나둘씩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면서 세계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론 판매부수를 늘리기 위해 각 방송사와 신문사가 과대포장해서 보도한 것일 뿐이고 실제로 발굴에 참여했던 1천 5백 명의 사람 중 죽은 사람은 21명밖에 되지 않았다. 11.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사상 최대의 거짓말 전쟁, 노르망디 상륙작전 제2차대전은 독일과 연합군이 서로를 속고 속인 전쟁이었다.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연합군이 교묘하게 상륙지점을 속여 승리한 전투이다. 이 작전엔 숨은 공로자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독일의 모든 문서 암호를 풀어낸 최초의 컴퓨터 콜로서스이다. 하지만 영국은 아직까지 그 존재를 노출하지 않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