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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_ 새들의 발목에 묻어가는 서해안 염전을 대신하여
천일염이 시작되는 곳 소금 맛은 하늘이 낸다 소금과 소금물의 두 얼굴 염부는 소금눈을 가졌다 꽃나무와 염전 소금창고의 내력 높은 지붕과 낮은 지붕 염전, 그 수평의 계단밭 염전에서 사라진 것들 폐염전의 달빛을 지르밟고 폐염전의 길 소금을 파는 꽃집 수인선 협궤열차와 염전들 서해안 염전 조성 약사 소금의 여러 얼굴들 소금의 정치학 함께 소금을 먹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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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하게 펼쳐져 있는 염전엔 새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정밀한 고요와 퇴락한 분위기와 하늘을 되비추는 염전 물거울 속에서 시간은 소금을 도드라지게 한다. --- p.24
기다림은 어디에서나 여백의 시간을 요구한다. 소금밭의 수면이 낡은 소금창고와 그 위의 하늘 구름을 비추는 동안, 사방은 생각의 고요로 물들어 있다. --- p.62 소금밭은 잡풀이 우거진 채마밭처럼 보이고 당신은 너무 아득한 옛날이 되었다. 공복의 소금창고들이 아직까지 소금 받을 날을 점치고 있다. 당신도 아직 나를 점치고 있는가. --- p.102 윤곽이 뚜렷한 폐염전 바닥에도 어김없이 노을이 끼친다. 무너져가는 해주의 슬레이트 지붕을 소멸과 폐허라는 두 이름을 가진 한 짐승이 밟고 지나간 듯 보인다. --- p.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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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후일담
글을 쓰고 나서도 시인에게 특별히 남는 기억들이 있다. >>소래 폐염전 같은 경우는 해당 지자체에서 생태공원으로 지정해 나름대로 관리를 하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해서 나는 언젠가부터 그곳에 가길 꺼려하는 무의식적인 나를 자주 발견하곤 한다. 관리하는 자연보다 관리하지 않은 자연을 나는 더 선호한다. 아니 더 극단적으로 옹호하는 편이다. 바람이 불면 유난히 연초록 빛깔을 술렁이는 폐염전의 풀들이 마냥 좋기만 한 봄날의 폐염전에서 나는 염전이 갖는 다양한 뉘앙스에 마음이 빼앗기기도 했다. 버려지려면 확실하게 이 정도는 버려져야 하지 않는가 하는 마음속의 쾌재가 어쩌면 쓸쓸하고 또 한끝 쾌활한 슬픔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폐염전 사진을 찍다 보면 이런 물건이 왜 이곳에 와 있는지 의아해질 때가 있다. 단순히 쓰레기를 무단 투척한 것처럼만 보이지 않는 물건들이 염전 여기저기에서 우연히 발견할 때가 있다. 어떤 소금창고 안에서 보았던 팬티와 브래지어 같은 여자 속옷에서부터 염전 바닥 위에 생뚱맞게 자리잡고 있는 PVC 욕조와 식탁의자들, 여자 무릎까지 덮을 듯한 외짝 부츠며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까지 그 종류와 모양은 천차만별로 다양하다. 단순히 쓰레기 투척에 기인하는 것만도 아닌 듯이 보인다. 그런 사진까지 얼결에 찍을 때가 있다. 심지어 소금창고 외벽이나 낡은 문짝에 새로 붙인 듯한 치킨 배달 스티커는 염전이 갖는 휴식처로서의 기능과 배달민족의 철저한 서비스 정신 같은 것에 웃음이 삐져나오게 만든다. 이제 폐염전은 소금만 만들어내지 않을 뿐이지 도심에서 쫓겨나듯 밀려난 갈 곳 없는 사람들의 배회지처럼 그 마지막 안식처처럼 마지막 편안을 제공하는 곳처럼 보인다. 그래서 폐염전은 소금이 나지 않으면서부터 오히려 외지인들의 출몰로 더 바빠졌는지도 모른다. 은퇴를 모르는 염전의 인생유전 같은 것이 또 그렇다. >>경기 화성시 서신면 공생염전 가는 길. 주변의 크고 작은 염전들은 새우양식장들로 많이 변해 있거나 공단배후지역으로 불도저가 밀어버려서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는데, 간혹 염전을 찾아 간판을 따라가다가 보면 이미 없어진 듯한 염전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그럴 때의 외로움을 밝혀주는 것이 봄날 주변의 배나무 과수원의 꽃불 잔치다. 과수원 언덕 능선을 뒤덮고 있는 하얀 배꽃은 바닷가 언덕배기에 숨어 있는 크고 오래된 바닷고기가 일 년에 한 번씩 자신의 비늘을 지상으로 밀어 올려 놓은 것 같다. 그러면서도 높낮이가 있는 언덕의 배나무 과수원밭만이 높낮이가 있는 게 아니고, 염전도 높낮이가 있는 계단밭이라는 공생염전 한 염부의 무심한 말에서 나는 적잖이 소스라쳤는지도 모른다. 염전이 염전물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차례차례로 흘려주면서 결국엔 마지막 아래 염전배미에서 소금을 일으킨다는 사실. 나는 그 염부의 말에 인간의 출사와 소금의 출사가 서로 다른 사실에 적이 부끄럽고 놀랐다.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 인간들의 출세고 출사인데 반해 소금은 가장 낮은 계단밭 말미에서 소리도 없이 일어나 맺힌다. 그런데 처음에 나는 이렇게 염부에게 물었다. “그럼 맨 위쪽의 높은 데 소금이 맺히겠네요?” 그러자, 뭘 참 모른다는 듯이 염부는 별 타박도 없이 말했다. “아니지요. 맨 아래칸까지 내려온 낮은 밭에서 소금이 나지요. 언제 저 높은 데까지 소금물을 거꾸로 흘리겠어요.” 그래 그렇다, 나는 고갯짓만 할 뿐 별말이 없는 나를 두고 소금밭 저편으로 걸어가는 염부를 뭐라 불러 세울 수도 없었다. 높은 데 오르지 않고 낮은 데서 몸을 일으키는 소금을 두고, 나는 내 머리를 내 주먹으로 친다. 아둔패기여, 소금 먹을 자격도 없는 이 아둔패기여. >>염전에 들었다가 소낙비를 맞는 여름날의 뜨내기를 보기도 하고, 눈발이 휘날리는 겨울날에 하염없이 눈발에 사무치는 폐염전의 풍광에 마음이 쓸려가기도 했다. 추석 가까운 염전에 유난히 커다랗고 둥그렇게 걸린 보름 가까운 달이 염전의 물상들을 또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 비추고 있는 광경에 가슴이 비워지기도 했다. 우박이 치는 여름날에 그 우박이 박공지붕의 소금창고를 누구 없냐고 두들겨대는 소리에 망연해지기도 하고, 진눈개비가 쏟아지는 봄날 염전 갈대밭에서 개개비새 소리에 마음의 진창에 알 수 없는 고요가 질척이는 바람에 한낮에도 괜히 술잔을 들었다 놨다 허천난 듯 목마름을 무엇에 적실까 허둥대기도 했다. 염전에서 폐염전으로, 폐염전에서 염전으로 발길을 옮기는 동안 세상에 이만한 활달한 고요와 쓸 만한 적막이 사는 데도 없고 세상에 이토록 깨끗한 생산의 남루가 없는 곳이 염전이라는 생각으로 오롯해졌다. 그 모두를 다 아우를 수 없는 내 필설이 안타깝고 그나마 그런 염전에 대해 뭐라 말을 건넬 수 있었다는 것이 또한 쓸쓸한 인연의 고마움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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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과 풍경을 응시하는, 시인의 눈. . .
기존의 시집에서 시인 유종인은 특유의 사유로 일상의 풍경과 사물의 이미지를 곱씹으면서 감각적인 서정의 문법을 선보이고, 섬세한 관찰과 발랄한 상상력으로 사물과 풍경에 관계를 맺어주며 그 그늘을 응시한다. 시인의 오감을 통해 지각된 사물과 풍경은 더 이상 무생의 자연이 아닌 개성과 감정을 지니고 태어나서 성장하며 사라지는 나름의 생명을 지닌 ‘숨탄것’이 된다. 소금이나 염전도 숨을 들이마신다. 염전은 해와 바람과 비, 꽃 그늘과 염부의 노동의 도움으로 소금을 낳는 산모이며, 소금은 망망한 바닷물 가운데서 불현듯 징발당해 팔자가 바뀌어 광물로 환생하여 세상 넓은 곳으로 나가길 꿈꾸는 존재가 된다. 더 나아가 소금은 인간의 본질을 궁구하도록 가르침을 주는 종요로운 존재로 상승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무정형의 바닷물에서 정형의 광물질로 탈바꿈하는 소금의 지난한 여정을 작은 경經으로 엮어보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먼저 세상 속으로 떠난 소금들, 텅 빈 소금창고 안에는 몇 자루의 소금과 바닥에 달라붙은 소금버캐만이 어둑한 한낮의 적막 속에서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맛’으로 막연하게 짜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면 소금은 소금의 일생이 아닌 소멸의 일생으로 바수어져 흩어질 것이다. 아, 눈치를 길게 늘이고, 시간을 나름으로 길게 걸려, 저 바닷물이 소금으로 가는 몸을 바꾸는, 그 환생의 정처를 작은 경經으로 꿰어볼 수 있으랴. - 본문 중 19쪽 그늘에 대한 아련한 기억. . . 염전에게 본격적으로 말을 걸겠다고 작심하기 전부터 시인에게는 염전과 그 주변 풍경에 대한 아스라한 기억이 허술하게 지은 건축물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시인이 서해안 소래포구를 들며나며 눈에 넣었던 염전의 첫 이미지는 소금창고에서 비롯된 그늘이다. 소금창고는 그 위세에 걸맞지 않게 주눅 들어 보였고, 소금을 위해서만 비어진 “공간의 적막함으로 태생적으로 그늘져 보였다.” 수사와 장식을 거부한 채 색채주의 시대에서 한 발 비껴서 모노톤으로만 자신을 치장한 소금창고 위에 유년의 기억 속 아련히 남아 있는 ‘날림집’이 오버랩되면서 소금창고는 그다지 낯설지 않다. 평생을 시골 학교 사택에서만 살아온 어머니가 생득적으로 익힌 날림집은 바람이 드나들고 열기가 그대로 전해지며, 연탄가스로 죽음의 경계를 드나들게 했던 그늘진 기억의 바탕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삶이 거기 깃들지 않음으로써 추억의 편안함”으로 바뀌게 되면서 소금창고에서 보이는 그늘은 햇볕 쨍쨍한 염전의 한켠에 자리한 여유로운 휴식처로 편안하다. 소금창고엔 주택처럼 난방을 위한 구들이나 보일러 호스가 깔려 있지 않다. 소금창고 바닥에는 널처럼 이어붙인 마룻바닥만이 기복 없이 전개돼 있을 따름이다. 염전에서 방금 채염된 소금들이 부려질 나무 바닥만 있으면 족한 것이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구멍이나 틈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건축구조가 소금창고엔 만연해 있다. 틈새나 구멍은 얼마든지 있어도 무방하다. 그것을 탓할 만한 생명의 안전과는 무관하게 염전 바닥에서 건져진 소금들은 눈부시고 새하얀 광물질로 무감각하다. - 본문 중 97쪽 폭양 아래 펼쳐진 염전. . . 염전 수면 위에 어리는 소금창고와 꽃나무의 그늘은 협소해서 여유롭다. 그러나 소금이 일어나는 염전에서 그늘은 소낙비와 함께 안타까움의 대상이다. 소금은 “쓰라린 관음의 햇빛과 수많은 단련과도 같은 갯바람”에게서 점지 받아 잉태되는 산물이며, 염전은 하늘에게서 씨를 점지 받아 키우는 ‘자궁’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염전은 뙤약볕 아래 펼쳐져 산고의 시간을 인내하고 있다. 저 깊은 그늘의 바다 속 바닷물은 난치와 느티로 불리는 염전 증발지 계단밭 배미로 올려져 폭양 아래 적나라하게 제 자신을 드러내 졸여지면서 그늘의 성질을 벗고 하얗게 변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금의 맛을 하늘이 결정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바닷물은 종종 염전 근처에서 놀다가 영문도 모른 채 염전 저수지에 갇힌다. 무명의 바닷물을 끌어들이는 것을 염부들은 ‘받는다’라고 하지만, 내게는 채홍사採紅使의 무심한 징발처럼만 보일 때도 있다. 좋은 바닷물을 받는 기준이 따로 있는가는 과문하여 들은 바가 없으나 굳이 미모와 교양을 겸비한 여인네를 골라내는 채홍사의 행위와 견준다면, 염전이 벌여 있고 거기에 닿아 있는 바다, 그 바닷물 전체를 무작위로 받아들여도 큰 낭패는 없을 것이다. - 본문 중 17쪽 움직일 구름조차 없이 정밀한 고요 속에서 시간도 정지한 염전의 풍경 너머로, 시인의 눈은 고체의 거울 같은 수면 아래 일어나는 무수한 움직임을 투사한다. 차츰 염도가 높아지는 짠물과 그 속에서 굵어지는 소금 알갱이. 급기야 시인의 눈은 뙤약볕 아래 적나라해진 염부의 고단한 노동에까지 건너간다. 갑자기 퍼붓는 소나기로부터 속수무책인 “하늘이 내는 농사” 앞에 염부의 노동은 묵묵할 따름이다. 그래서 “묵묵히 알고 지키며 거둬들이는 순박한 채홍사 같은” 염부는 산모의 역할이 아니라 산파의 역할을 짊어진다. 그저 하늘이 결정하는 소금의 맛을 미리 집작할 수 있는 연륜을 가질 뿐. 그래서 인고의 시간을 기다리는 그들은 채염 단계를 “소금을 받는다”라고 말하는 것일 게다. 물소금에 벼린 고무장화의 세월만큼 염부들도 늙거나 병들어간다. 염부들은 나이를 먹기보다 둑방을 넘어온 소금기 가득한 갯바람 속에서 나이를 삭혀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염부의 나이는 보이지 않고 그의 몸에 깃들인 소금밭 주변의 환경들이 물소금처럼 녹아들어 있다. 염전, 아니 소금창고 주변에 있는 소금자루 운반용 컨베이어 시설의 쇳덩이 부분도 붉게 녹슬고 부풀게 해 고장을 일으키는 소금기의 위력이면 나이든 염부의 관절 마디에도 소금기는 더께 진 불순물처럼 슬어 있을 게 분명하다. - 본문 중 57쪽 햇빛 아래에서 하얗게 일어나는 소금꽃. . . 청소년기의 시인은 부자父子가 함께할 수 없는 허허로움을 “더 큰 허허로움이 있는 곳으로 찾아다님으로써 메워보려고” 소금밭을 찾았고, 그때 버석거리는 소금 한 줌을 주머니에 넣어 집으로 갔다. 하얗게 몸을 일으키는 소금은 중풍에 든 아버지에게 긴요한 비약일 거라 여겼다. 끝내 아버지 입 속으로 흘려 넣지 못한 채 버려진 호주머니 속 소금은 시인에게 죽음의 그늘을 걷어내는 생명의 상징이라는 의미로만 남았다. 시인에게 소금은 죽음과 소멸을 연상시키는 그늘로부터 탄생과 부활을 연상시키는 눈부신 햇빛 아래에서 몸을 일으켜 새하얀 광물로 부활한 메시아인 것이다. 액체의 바닷물에서 고체의 딱딱한 광물질로 탈바꿈한 부활의 상징. 현신의 과정에서 졸여진 광물질은 짜다. 짜기만 한 듯한 소금의 맛은 하늘의 결정에 따라 수많은 짠맛으로 달라지는데, 세상의 일들이 썩지 않고 제 맛을 잃지 않도록 소금만큼은 “여전히 하늘이 맛을 보고 내놓는 신神의 선물이다.” 소멸과 퇴락의 반대편에 자리하는 생명의 맛. 그리하여 이 땅의 모든 숨탄것들은 짠맛에 생래적인 기호를 갖는다. 봄은 빨라지고 소금창고 옆에 핀 개복숭아꽃은 야릇한 대비를 이뤘다. 칼라로 찍어도 흑백처럼 찍혀져 나오는 한 소금창고 외벽 귀퉁이에 핀 개복숭아꽃은 시간이 나름대로 이 궁벽한 갯가에도 흐르고 있다는 징표처럼 가혹했다. 그 가혹한 진분홍의 꽃잎마저 바닷바람에 날려 염전 물 위에 떨어져버렸다. 한낮의 염전 물 위에는 하얗게 피기 시작한 소금꽃과 수시로 날아드는 개복숭아 꽃잎이 서로 어울려 놀았다. 바다를 떠난 바닷물이 피우는 꽃인 소금꽃과 제 나뭇가지를 떠난 개복숭아 꽃잎이 묘한 인연으로 바닥에 소금이 엉기기 시작하는 함수 위에서 마지막 춤을 추었다. - 본문 중 36쪽 달빛 아래 스러져가는 염전. . . 그늘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폭양 아래 드러나 있던 염전에 그늘이 드리우고 있다. 제 주소가 있으나 내비게이션도 찾기 힘든 길의 바깥에 있으며, 현지인들조차 염전 있는 곳을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염전의 현재 처지는 그 지역의 사람들도 “촌스럽고 뒷전에 감추고 싶은 쇠락한 현지처”처럼 보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렇듯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면 급기야 폐염전이 되어 기억 속에서도 사라질 터이다. “꽃나무는 꽃을 활짝 피우고 꽃잎을 버림으로써 열매의 풍성에 다다르지만 염전은 뭍의 세상으로 소금을 꾸준히 대주면서도 그 근거와 존립을 약속받기는 어렵다.” 이러한 염전의 쇠락은 중국산 저가 소금의 공세에 밀려 점점 설 자리를 잃어 화원 한켠에 웅크리고 있는 ‘염공’의 궁색해진 처지와도 맞닿아 있어 뜻밖의 장소에서 소금을 만난 시인의 마음은 편치 않다. ‘신의 선물’인 소금은 이제 천덕꾸러기가 되어 “국적 불문의 광물”로 소금창고의 음침한 그늘 속에서 쌓여가고 있다. 소금은 음식과 식량을 갈무리하고 북돋우는 맛의 근원이다. 그런데 그 기반시설이 무너지고 퇴락해 소멸의 길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우리네 생활의 기반이 불안한 “중년의 맛에 들었다는 실존적 지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화원에 몸을 의탁하여 더 넓고 깊은 세상의 중심부로 나아가길 꿈꾸는 변두리 화원의 유리창은 그렇게 염공이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처럼 가끔 번득거렸다. 유리창 한켠에 붙어 있는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사람들이 문자에 기대어 존재를 확인받고 그 생각의 높낮이와 정리를 주고받는 도구로 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오래전부터 서려 있구나 싶었다. 지금 자신을 불러주고 사가려는 사람이 드문 화원 한켠에서 막 꽃대를 올리고 꽃망울을 터뜨리려 하는 풍란 한 분盆과 ‘생각하는 공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 본문 중 183쪽 미약하나 꺼지지 않을 소금의 빛. . . 옆구리가 터지거나 짓뭉개진 염전의 둑길에, 군데군데 이빨이 빠지거나 틀어진 염전 바닥의 타일 틈으로,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숨탄것들이 하나둘 소리 없는 발길을 들여놓는다. 소금물 말고는 아무것도 들지 않던 염전이 폐전이 되면서 들어찬 미물들은 “무채색의 평면 공간”을 “색색의 입체 공간”으로 채워나간다. 폐허는 그저 인간 세상에 잣대를 두고 불리는 공간일 뿐, 자연에 잣대를 두면 그 공간은 수많은 생명들이 모여드는 재건의 공간이다. “사람이 비워둔 염전을 자연은 어떻게든 채워준다.” 누군가에게 소멸과 퇴락은 또 다른 누군가에겐 생명과 창조인 것이다. 그리고 “갯가의 소금밭은 이제 뭍의 묵정밭처럼 그 종류를 헤아리기 힘든 펀더기로 돌아가려 한다.” 늦여름 붉나무에 꽃들이 핀 뒤 그 수수 알맹이 같은 열매가 달린 걸 보고 소금을 떠올리는 사람이 요즘 얼마나 되겠는가. 어쩌면 한 세기 혹은 몇 세기가 흐른 후에 갯벌에 펼쳐진 묵정밭 같은 염전 터를 보고 소금을 떠올릴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자연에 기대서 소금을 찾던 시대가 사라지면 그것은 곧 자연에 대한 상상력의 고갈로 연결될 공산이 크다. 단순히 소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소금을 연출해낼 자연의 힘이 인간의 내부에서도 사라질지 모른다. - 본문 중 87쪽 제 소임을 다한 염전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소금은 여전히 사람의 살이에서 종요로운 존재이다. 변하지 않는 성질의 금처럼 소금도 변하지 않는 성질과 성분으로 수천 년 이상 인류의 역사에서 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소금은 단순히 짠맛을 내는 음식의 첨가물만이 아니라 의학, 건축 등 여러 분야에도 고루 쓰이고 있다. 소금은 산 자의 체액에서 0.9퍼센트를 차지하고 여러 병증의 치료제로 기능하는 등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치와 필요 속에서 섭취되고 이용되었다. 급기야 화폐와 교환의 척도로까지 쓰였고, 나아가 대외적인 교역의 필수품으로까지 쓰일 정도로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물질이었다. 소금 때문에 전쟁도 일어나고, 한 문명의 흥망에 단초가 되기도 했다. 소금은 인류를 살게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죽고 죽이게도 하는 야누스적인 광물인 것이다. 이러한 소금은 시인의 눈에는 퇴락과 소멸의 그늘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하는 존재다. 우리가 사람의 됨됨이를 두고 ‘짜다’ ‘싱겁다’고 평하는 데에는 소금의 존재에 기반을 둔 분별심이 자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인에게 소금은 조화를 보여주며 생명이 탄생하는 섭리를 일깨우는 메시아인 것이다. 더럽혀지지 않은 태초의 말씀이다. 어쩌면 소금의 맛은 별 차이가 없는지도 모른다. 분별의 깊은 맛은 그보다 더 짜고 쓸지도 모른다. 아무리 싱거워도 소금은 깊을 수 있고 아무리 짜도 넓은 혜량의 입맛에는 단맛일 수도 있으니까. 나마저도 그 분별의 사유에만 묶인다면, 소금을 치지 않은 음식에도 짠맛을 탓하는 게 아닐지 모른다. 그렇게 많이 소금을 품고도 바다는 한 번도 소금의 맛을 탓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나름의 정도를 가늠하며 소금을 독약처럼 또는 보약처럼 저도 모르게 나눠 먹고 있는 게 아닌가. - 본문 중 279쪽 사진 프레임 속에서 일어나는 소금. . . 염전에 대한 시인의 생경한 고찰은, 사진가 박현우가 지리한 장마 동안 해 뜬 날을 기다려 찍은 사진으로 보다 생생해진다. 사진은 염전이 그 혼자만이 아니라 주위의 여러 조력자들과 관계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고요한 염전의 물거울 속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움직임과 그에 보태지는 고된 노동을 포착하고 있다. 또한, 폐허가 된 염전에서 함수초가 뚫고 자라나 또 다른 의미에서 자연에 폐허가 없듯, 사진에 곁들여진 시인의 시와 같은 짧은 단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짧은 시가 되어 정지한 프레임의 숨은 움직임을 드러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