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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놀라거나 슬퍼하지 마소서
- 옥중 서한(1932∼1938) 나는 방탕한 남자가 아니오 - 미국으로, 다시 한국으로(1902∼1910) 꽃보다 보낸 마음을 사랑합니다 - 망명의 길… 중국, 러시아, 미국(1910∼1919) 이 몸이 위험한 땅에 들어가더라도 - 상해독립운동(1919∼1924) 오직 혁명을 위하여 신명을 다할 뿐이외다 - 마지막 미주 순행과 민족통일운동(1924∼1932) 언제든 웃으며 지내거라 - 자녀에게 보내는 서한 있어야 할 사람 떠나니_ 안창호와 이혜련을 추모하며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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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별것이 없고 오직 사랑뿐입니다
나나 당신이 다 인생의 하나로서 세상에 와 있는 동안 잘 지내거나 못 지내거나 삶의 시간이 거진 다 지나갔고 이제 남은 기간이 많지 못합니다. 나는 나의 지나간 역사의 그릇된 자취를 더듬어 보고 양심에 책망을 받음으로 비상한 고통을 때때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지나갔으니 후회막급으로 생각을 하여도 별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즉 지나간 모든 것을 다 끊어 보내어 버리고 오직 남아 있는 짧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함이외다. 아무 별것이 없고 오직 사랑뿐입니다. 사랑, 이것이 인생이 밟아 나가야 할 최고의 진리입니다. 인생의 모든 행복은 인류 간 화평에서 나오고 화평은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여 본 바 어떤 가정이나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면 화목하고, 화목하면 행복한 가정입니다. 그와 같이 사랑이 있는 사회는 화평의 행복을 누리는 사회입니다. 사랑을 최고 자리로 믿고, 사랑을 실행하는 사람의 사랑으로 인하여 가정이나 사회에 화평의 행복이 촉진될 것입니다. 가정보다 먼저, 사회보다 먼저 사랑을 믿고, 사랑을 품고, 사랑을 행하는 그 사람 자신의 마음이 비상한 화평 중에 있으므로 남이 헤아리지 못할 무한한 행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즉 나나 당신이 앞에 남아 있는 시간에 우리 몸이 어떤 경우에 있든지 마음이 완전히 화평에 이르도록 사랑을 믿고 행하옵시다. 내가 이처럼 고요한 곳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하던 결과 ‘사랑’ 두 글자를 보내오니 당신의 사랑하는 남편이 옥중에서 보내는 선물로 받으소서. (하략) - 1933년 6월 1일 대전형무소에서 --- pp.35~37 나라를 위하여 죽음도 사양치 아니하느니 나는 내일 도릭 호를 타고 동양으로 가겠소이다. 슬프다. 내가 오늘 수만 리 대양을 다시 건너 고국에 다녀오려고 하는 것은 무슨 경치를 구경하려 함이 아니요, 좋은 친구를 만나서 놀고자 함도 아니외다. 오늘 우리나라가 멸망하고 우리 2천만 동포가 멸망하게 되었는데 무엇이든지 내 힘으로 우리나라와 우리 동포에게 도움이 있게 할까 하여 다녀옴이라. 이 세상에 자기 나라를 위하여 죽는 남자도 많고 여자도 없지 아니하나, 이때를 당하여 우리가 죽음도 사양치 아니할 터이어늘 어찌하여 서로 이별하여 고생하는 것만 한탄하리요. 그대는 아이를 건강하게 기르고 너무 아파하고 심성을 상하게 하지 말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 1907년 1월 7일 오클랜드에서 --- p.98~99 꽃보다 보낸 마음을 사랑합니다 삭도(朔都, 새크라멘토)로 보낸 편지 석 장을 어제 다 자세히 보았고 위로를 많이 받았소이다. 나는 오늘 벼 농장으로 가다가 중도에서 차를 바꾸어 타려고 기다리는 동안 두어 자 편지 하나이다. 보낸 연꽃을 받고 감사하며 옛날 평양 장대제에서 혜련이 보낸 오렌지 꽃을 받던 감상이 더욱 납니다. 나는 꽃보다 그 보낸 마음을 사랑하여 그 꽃을 품에 두었소이다. - 1914년 8월 15일 새크라멘토에서 --- p.167 입을 삐죽하던 당신을 생각하고 혼자 속으로 웃소이다 혜련이! 여러 달 편지를 끊고 소식이 없으니 민망하외다. 몸이 편치 아니한들 그같이 오래 편지를 아니 할까, 나는 편지를 아니 하나 혜련이야 어찌 그럴까 하나이다. 나의 사랑하는 필립, 필선, 수산, 수라가 매우 보고 싶습니다. 이것들은 다 잘 있나이까. 어떤 때는 다 데려와도 좋겠다는 생각까지 불현듯 하나 사정이 그렇지 못 하다고 참나이다. 나는 필립의 이모 신실(김창세 의사의 부인)에게 극진한 사랑을 받나이다. 근본정신이 이름대로 신실信實하고 충성됩니다. 꾀라고는 너무도 없습니다. 나를 아버지 이상으로 믿고 사랑하여 위로되니 혜련의 생각이 자꾸 납니다. (……) 신실이가 내 말을 잘 들을 때 옛날 내가 당신한테 무슨 말을 좀하면 당신은 잘 듣지 않고 입을 삐쭉하면서 나는 생기기를 그렇게 생겨서요, 하던 것이 생각나서 혼자 속으로 웃었소이다. - 1920년 4월 22일 상해 홍십자의원에서 --- pp.201~202 내가 어찌 당신을 그처럼 아프게 하였는지요 당신은 나를 만남으로 편한 것보다 고생이 많았고 즐거움보다 설움이 많았는가 합니다. 이즈음에는 공연히 옛 생각이 많이 나옵니다. 옛날 로스앤젤레스에서 서로 사흘이나 말을 잘 아니 하였거니와 당신이 손가방을 들고 나가겠다고 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에 내가 어찌 혜련을 그같이 아프게 하였던고, 여북이나 마음이 아파서 그처럼 하였을까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기억할는지 모르거니와 우리 둘이 클레어몬트에 가서 당신은 김기만 군 집에서 자고 나는 손양선 군 집에서 자던 때와 이옥형의 혼사 문제로 내가 극단으로 불평 무례한 일을 행하고 서로 헤어졌다가 내가 잠에 들었을 때 당신은 나를 위하여 자지도 못하고 깊은 밤 어두운 방에 들어와 내 자리 옆에 섰던 것이 눈에 선하오며, 당신의 모든 사랑과 동정이 여러 가지로 기억되옵니다. 나를 위하여 20여 년 충성을 다하여 온 당신에 대하여 사랑한다, 만다 하는 것이 서투른 말입니다. 부질없는 말일 뿐더러 도리어 유치한 듯합니다마는 간절한 생각이 가슴속에서 배회하는 때에 붓을 들고 글을 쓰다가 자연히 부질없는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 (……) 아이들에게 편지하게 하소서. 아이들한테 편지 쓰기 좋아하는 습관을 길러 주어서 이 아버지처럼 안 되게 하소서. - 1921년 7월 14일 상해에서 --- pp.225~226 화초를 잘 길러라 나의 사랑하는 딸 수산에게 네가 보낸 편지를 반가이 받아서 자세히 보고 기뻐하였다. 내가 너를 품에 안아서 재워 주던 것이 어제 같은데 지금에는 네가 대학생이요, 영 레이디가 되었다. 수라의 토댄스toe dance를 보던 것이 어제 같은데 중학을 마치고 대학으로 가게 되었으니 세월이 빨리 달아난 것을 깨닫겠다. (……)네 오라버니 필립이도 대학을 다니는 것을 좋게 생각하고 필선이가 그처럼 공부에 힘쓰고 특별히 어머님을 항상 도와드린다니 참 기쁘다. 필영(당시 8세)이가 그같이 활발하게 장난을 잘한다니 매우 기뻐한다만 집 앞 언덕길을 조심하고 연약한 나무에는 자주 오르지 말라고 하여라. 네가 사범과를 택하였으니 가정에 관한 것은 특히 주의하여 연구하기 바란다. 너는 대학을 마친 후 조선에 와서 일해야 할 터인데 조선에 개량할 것이 많은 중 가정생활의 개량이 매우 시급하다. 우리 집 앞 언덕길이 전과 같으냐? 혹 고치었느냐? 연못에 연꽃이 남아 있느냐? 또 토란 나무는? 너희들이 매우 바쁘지만 뜰을 깨끗하게 거두고 화초를 잘 길러라. 이것도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좋은 습관을 양성하는 한 과정이다. - 1934년 10월 1일 대전형무소에서 --- pp.302~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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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는 파이오니어Pioneer다
20세기 초에 이미 37년간 12개국 120개 도시를 종횡했다 2007년 11월 9일은 독립운동가 도산島山 안창호(1878~1938) 선생의 탄신 129주년이다. 완전무결한 인격자이자 사상과 노선에 따라 분열된 상해임시정부의 좌우파를 이끌 유일한 정치적 지도자로 꼽히던 안창호 선생이 20세기 전반 한국 최고의 여행가라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항공 여행이 없던 시대에 증기선으로 태평양을 다섯 번, 대서양을 한 번 건넜고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러시아, 독일, 영국에 이르렀다. 일본, 중국, 미국, 멕시코, 오스트레일리아 등 37년간 12개국 120여 개 도시를 두루 돌아다녔다. 이 모든 여정은 나라가 없던 시절, 해외 한인 공동체를 연결하고 이상촌을 세우려는 발걸음이었다. 비록 삶의 이유를 나라와 민족에 맞추고 살았지만 그는 세계 어딜 가든지 아내에게 편지를 띄웠다. 결혼 생활 37년 동안 안창호의 아내 이혜련(1884~1969)이 그와 부부로 한집에 함께 산 것은 10여 년에 불과하다. 그동안 그녀는 남편이 보내오는 편지를 소중하게 간직했다. 안창호는 로맨티스트다 역사의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도 뜨거운 사랑을 가슴에 품었다 이 책에는 안창호 이혜련 부부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정착 후 보낸 첫 편지(1904년 3월 25일)부터 두 번의 투옥 끝에 병세가 악화되던 마지막 편지(1936년 8월 7일)까지 110여 통의 편지가 담겨 있다. 대한인국민회와 신민회 활동, 중국과 러시아로 망명, 멕시코, 미국 순행과 상해임시정부 참여, 민족통일운동 등 역사적인 행보를 따라가면서 그 이면에 숨겨진 개인의 고뇌와 감정의 편린들을 엿볼 수 있다. 30여 년 동안 안창호는 한결같이 편지 첫머리에 ‘나의 사랑하는 혜련’이라고 썼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조선왕조 말기, 신시가 나오기 한참 이전에 과감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용기는 그의 남다른 면을 보여 준다. 또한 항상 ‘하시옵소서’ ‘바라나이다’ ‘전하소서’ ‘대답하소서’와 같은 경어체를 쓰면서 부부 간의 법도를 지켰다. 안창호는 이혜련이 보내 준 말린 연꽃을 가슴속에 품고 다녔고(p.167), 상해에서 선물로 받은 한국 엿을 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는(p.227~228) 등 편지를 통해 깊은 정을 주고받았다. “나는 내 손으로 가꾼 정원의 화초는 좋다는 말없이 속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외다.(p.233)”라며 무뚝뚝하다가도 “사랑, 두 글자를 보내오니 당신의 사랑하는 남편이 옥중에서 보내는 선물로 받으소서.(p.37)” 뜨겁게 사랑을 고백할 줄 아는 로맨티스트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안창호는 리얼리스트다 현실 삶의 기반 위에서 독립의 구체적인 방략을 찾았다 안창호는 평생 독립운동에 전념하여 가정과 자녀에 대한 직무를 다하지 못하는 남편과 아버지의 심정을 편지로 전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어린 자식을 교육하지 못하면 직책을 잃음(p.138~139)”이라며 자녀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당신과 내가 이름은 부부라고 하나 일평생 단란한 가정생활을 못하였으니 늘그막에 아이들 데리고 한집에 모여 고락을 같이 하는 것”이 소원이라면서 “늙어가면서 아내가 지어 주는 음식이 제일 맛있다고 느낀다. 당신이 지어 주는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p.61)”고 아쉬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죽음도 사양치 아니할 터이어늘 어찌하여 서로 이별하여 고생하는 것만 한탄하리요(p.98)”와 같은 구절에서 보듯이 일생을 가족보다는 나라의 일에 초점을 맞추고 살았다. 노동자들을 만나 해외 현실을 듣고, 젊은 유학생들과 토론하며 조국의 미래를 보았던 기쁨을 아내에게 편지로 전했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이념과 노선 대결에 열을 올릴 때, “사사로운 일을 돌아볼 여지가 없고 오직 혁명을 위하여 최후로 목숨까지 재촉할 뿐입니다.(p.278)”하며 대공大公주의를 천명하고 현실적인 독립운동 방략과 방향을 정했다. 평생 이상촌을 찾아다닌 것도 동포들의 안정적인 생활 기반을 마련하고, 군인을 양성하여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무실역행務實力行의 노력이었다. 무국적자의 험난한 역정과 독립투사의 뜨거운 고뇌, 가족을 향한 간절한 그리움이 담겨 있는 행간을 따가라며 100년 전 치열하게 살다간 한 젊은이의 생생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더불어 그의 거짓 없이 나라를 위한 열정적인 모습에서 ‘나와 남, 이웃과 나라가 나가야 할 길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깊은 메시지를 느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