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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편
Ⅰ. 머리말 Ⅱ. 안학궁의 역사적 배경과 기존의 연구 성과 Ⅲ. 안학궁의 위치와 환경 Ⅳ. 조사내용 Ⅴ. 맺음말 -논문편 전제헌, 안학궁터 발굴의 나날을 더듬어 보며 남일룡, 안학궁성에 대한 몇 가지 고찰 리영식, 안학궁터에서 알려진 고구려 무덤들의 축조연대에 대하여 리광휘, 기와와 질그릇을 통해 본 안학궁의 존속연대 김경삼, 안학궁터에서 나온 수키와 막새 무늬에 대하여 강세권, 평양천도의 역사적 경위 -도판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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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학궁은 평양시의 동북쪽, 대성산 소문봉(해발 239.5m) 남사면 끝에 위치하여, 평양과 대동강을 끼고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427년 이래 평원왕이 장안성으로 왕성을 옮긴 586년 까지 약 160여 년간 고구려의 왕성으로써 기능하였다.
이미 동천왕대인 247년과 고국원왕대인 343년에 평양으로 임시 천도를 한 적이 있으며,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광개토대왕이 자주 평양을 순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고구려인들에게 평양이 고조선의 발원지로써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며, 광개토대왕시기에 이미 평양천도가 국가정책으로 추진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고구려의 남방진출정책의 일환으로, 광개토대왕 때부터 드러내었던 남진을 통한 삼국통일의 의지를 실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의 학자들은 1958년부터 10여 년 간에 걸쳐 대성산성, 안학궁터, 무덤떼 등 대성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들에 대한 조사와 발굴사업을 진행하였다. 일본학자들은 안학궁성 출토 와당의 문양 구성과 태토 및 소성에서 국내성기의 것과 차이가 있고 통일신라기 또는 고려 전중기의 것과 유사성을 보인다는 것을 이유로, 안학궁이 고구려 왕성이 아니라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안학궁이 3기의 횡혈식 석실분 위에 들어섰는데, 이 석실분들의 상한이 5세기말에서 6세기 초이므로 안학궁은 그 보다 늦은 시기로 잡을 수 없으므로, 고려 서경의 궁궐 유적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횡혈실 석실분은 바닥면만이 남아 있으며 횡혈식 석실 구조라고 해서 반드시 6세기 이후의 구조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이번 공동조사로 회청색 승문 암기와, 갈색 승문 암기와 및 6세기 중반 전후로까지 소급되는 연화문 와당이 확인되었고, 안학궁에서 출토된 유물들의 편년을 5세기 중~후반으로 잡을 수 있으며, 안학궁성과 건물지가 초축 이후 순차적으로 건설되었을 것임을 고려할 때, 안학궁의 편년이 7세기 이후가 될 수는 없다. 이번 공동조사에서는 안학궁의 성벽과 건물지, 안학궁내에 있는 고분, 출토 유물을 중심으로 지표·측량·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성벽의 동벽 일부 구간에서는 석축 최하단부가 이전에 확인한 것 보다 0.8m 이하까지 내려간다는 것과 동벽 바깥쪽의 봉적 상태를 확인하게 되었고, 이전에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던 네 성벽의 단면 조사 지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또 일부 구간에 대한 측량 조사와 이전에 작성된 도면을 보정할 수 있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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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역사재단은 고구려연구재단의 업무를 승계하여, 남북이 함께 했던 공동조사 결과를 『고구려 안학궁 조사 보고서 2006』로 발간하였다. 안학궁은 고구려의 평양 시절 왕도로 추정되고 있으나 여전히 남한에서는 이에 대한 접근의 어려움으로 실제적 연구에 한계가 많은 상황입니다. 반면 북한에서는 이미 1958년부터 1971년 동안 여러 차례 발굴 조사를 하여 고구려의 평양 천도 시 왕성이었음을 확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학자들의 경우 안학궁이 고구려성이 아니라 통일신라나 고려 때의 도성이라는 견해를 제기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이번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5~6세기 기와편 및 유물들과 그간 북한에서의 연구 성과를 통해 안학궁이 고구려의 왕성이었음은 명백해졌으며, 단지 천도 이후 곧바로 축조가 되었는지에 대한 여부만이 아직 불확실할 뿐입니다. 따라서 이번 남북한 간 실측 조사 보고를 통해 그간의 학계 논란을 종식시키고, 앞으로의 안학궁 연구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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