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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안용복 공(公)의 발자취를 추적하며
울릉도. 독도 주요 약사 안용복, 그는 누구인가 관련 주요 인물들 제1부 1692년 양국 어민들의 첫 만남 제2부 1693년 안용복과 박어둔의 일본 연행 제3부 우리땅 울릉도, 귀국령 죽도 제4부 영의정 남구만과 대마도주 종의진의 고집 대결 제5부 일본의 힐문 4개조와 개전 협박 제6부 울릉도 단념이냐 전쟁이냐. 일본 막부의 선택 제7부 1696년 안용복의 2차 일본 돌진 제8부 대마도의 안용복 죽이기 대공세 저자후기 / 거짓과 진실 사이에서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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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인 1692년(조선 숙종 18년) 3월, 안용복은 박어둔 등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울릉도에 산삼과 전복을 채취하러 갔다가 거기서 일본 요나고 출신 어민들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693년(숙종 19년) 그들과 울릉도의 영유권 문제로 서로 말다툼을 하다가 결국 일본 어선에 동승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 일을 계기로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 문제가 양국 간에 현안문제로 제기되어 양국이 협상을 벌였으나 그 협상이 바로 난항에 들어가, 1695년 6월 협상이 완전 결렬되고 한일간에는 전쟁의 먹구름까지도 짙게 드리워지게 된다. 한편 울릉도 섬을 포기할 것이냐 아니면 전쟁이라도 해서 뺏을 것이냐의 기로에 선 대마도에서는 이 문제를 일본 중앙정부에 보고하고 중앙정부로 하여금 직접 결정하게 한다. 이 문제를 다루게 된 일본 중앙정부는 울릉도에 대한 모든 사실관계를 확인한 후, 1696년1월, 전쟁 대신 울릉도 영유권 포기를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울릉도 포기 결정은, 당시 울릉도에서 80년간이나 전복잡이를 해 왔던 일본 어민들과 관련 지방에게는 커다란 실망과 아쉬움을 주는 것이었다. 또한 일본의 울릉도 포기 결정을 조선 측에 통보하는 임무를 맡은 대마도에서는, 울릉도를 포기해야 한다면 다른 어떤 대가는 받아 내어야 한다고 획책하게 된다. 이 때문에 대마도에서는 일본 측의 울릉도 포기 결정을 조선 측에 바로 통보하지 않고 시일을 끌며 늦추게 된다. 한편, 이러한 일본측 동향을 알 길 없는 조선 측에서는 긴장감 속에서 현해탄을 지켜보게 되는데, 그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이 안용복의 두 번째 일본 방문이다.그의 두 번째 일본 방문은 1696년 5월 이인성(李仁成), 뇌헌(雷憲) 등을 대동하고 “양도(兩島) 감세장(監稅將)”이라는 조선 정부고관을 사칭하여 일본에 돌진하는 형태의 것이었다. 그의 일행 11명은 울릉도와 독도를 거쳐 일본의 오키섬, 요나고, 톳토리에 가서, 이번에는 각종 증거물(본서 275면)까지 제시하면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주장한 뒤, 그 해 8월 강원도 양양으로 귀국한다. 안용복의 2차 방문에 놀란 대마도는 서둘러 일본정부의 결정을 조선측에 통보하는 절차에 들어가면서도 안용복의 대범함과 집요함에 질려서, 그를 조선 조정에 중상하여 조선조정의 손을 빌려 그를 죽이려고 획책하게 된다. 이리하여 안용복 일행은 귀국 직후 바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된 후 국문을 받게 되는데, 처음에는 조선 조정은 그의 일본방문의 성과를 이해하지 못하여 그들을 가혹하게 대우하나, 뒤에는 어느 정도는 그 업적을 인정하여 다음해인 1697년 3월 안용복을 석방하게 된다. 한편 안용복의 석방에 분노한 대마도측은, 울릉도 · 독도가 조선측 영토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문서화 협상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는데, 그에 따라 문서화 작업에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어 최종 마무리는 1699년 1월에야 끝나게 된다. ---줄거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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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고 울릉도 ·독도를 지켜낸 한 사나이의 이야기
- 안용복을 전설적인 영웅에서 실증의 세계로 모셔오다. 17세기를 살았던 대학자 이익(李瀷)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안용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안용복은 영웅호걸이다. 미천한 일개 군졸로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계책을 내어 강한 적에 대항하였다. 왜인들의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代)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하였으며, 한 고을의 땅을 회복하였다. 이는 중국 한(漢)나라의 장수 부개자(傅介子), 원(元)나라의 사신 진탕(陳湯)이 한 일들에 비해서도 더욱 뛰어난 업적으로, 걸출한 자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그에게 상(賞)을 내리기는커녕 형(刑)을 내리고 나중에는 귀양까지 보내어 그의 뜻을 꺾고 그를 무함(誣陷)하기에 바빴으니, 애석하구나.」 안용복은 일개 미천한 신분의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왜인들의 울릉도 출어(出漁)에 분격하여 스스로 일본으로 달려가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를 제기하여 조선의 입장을 관철시켰으며, 그의 그러한 활약이 밑거름이 되어 오늘날과 같은 한일간의 국경이 확정될 수 있게 한 인물이다. 저자들이 이 책을 쓰기 위하여 이용한 조선 측의 자료로는 "조선왕조실록",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과 같은 조선정부 공식기록과, 나아가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등이 있고, 일본 측의 자료로는 죽도기사(竹島紀事), 돗토리번정사(取鳥藩政史), 대마도매일기(對馬島每日記) 및 기타 수많은 자료들이 있는데, 저자들은 이들을 바탕으로 가장 역사적 진실에 가까운 울릉도 독도 영유권 문제와 그 협상의 시말을 조사한 후, 그리고도 결여되어 있는 사건과 사건들 사이의 연결고리들을 저자들의 역사적 상상력으로 흥미있게 채워 넣고 있다. 예컨대 일부 일본 학자들은, 안용복의 2차 일본 방문시(1696년) 대마도주를 일본 관백(=당시 일본의 국정 최고책임자인 막부 쇼오군)에게 고소하는 고소장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는데도 안용복이 마치 그런 고소장을 제출한 것처럼 허위로 조선조정에 진술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조선측 기록인 승정원일기 기록(1696년 9월 27일자와 10월 23일자)을 제시하며, 안용복 진술이 진실이며 더구나 그 고소장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까지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은 1696년 9월 25일 있었던 조선조정 국문에서, 안용복의 진술이 왜 조정 관료들을 그토록 경악케 했으며, 당시의 조정 관료들이 무엇을 오해하였는지도 처음으로 분석하였다. 즉 당시의 조선조정에서는, 대마도주를 일본 관백에게 고소하는 고소장을 철회함에 있어, 오키섬 도주의 아버지가 보낸 사람들이 하소연하여 안용복이 들어준 것으로 오해하여, 만약 그 고소장 제출 소동이 향후 대마도에 알려지면 양국 관계가 심히 악화될 것이라 우려한 것 때문이었음을 밝힌 것이다. 조선 조정의 이런 터무니없는 오해로 안용복 등은 심한 옥고를 치르고 이인성(李仁成)은 억울하게 목숨까지도 잃게 되는데, 이 책에서는 당시의 급박하게 돌아간 조선조정의 동향을 상세히 분석하고, 아울러 안용복에게 고소장 철회를 애걸한 사람이 대마도주의 아버지 종의진(宗義眞)이 보낸 사람들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규명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