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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찾아 떠난 젊은이들
한국사 유학생 열전
이강렬
황소자리 2007.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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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부. 고난은 성공을 약속한다
01. 한국 최초 조기 유학생 - 최치원
02. 근세 유학생 효시 - 김대건과 최양업
03. 조선 최초 미국 유학생 - 유길준
04. 한국 최초 미 의대 졸업생 - 서재필
05. 개화의 새벽을 연 - 박에스터와 하란사
06. 한국 최초 미국 대학교 박사 - 이승만

2부. 한국 유학사
01. 가자, 공부하러 중국으로
02. 삼국시대 신라 견당유학생들
03. 신라와 일본 견당유학생들의 경쟁
04. 신라 유학생과 겨룬 발해 유학생
05. 과거 보러 중국 가는 고려 유학생들
06. 장영실도 중국 유학생이었다
07. 사신 따라 중국 간 단기 유학생들
08. 김대건 이후의 천주교 맞춤 유학
09. 한국 근현대사의 문을 연 유학생들
10. 한중일 3국 근대 유학사 비교
11. 한일병합에서 해방까지
12. 해방 이후 근대화 주역이 된 유학파
13. 한국 파워 엘리트로 성장한 유학파

에필로그
참고문헌

저자 소개 1

李康烈

연세대 행정학과, 법학박사(국제인권법). 현 미래교육연구소 소장. 현 한국혈액암협회 이사, 현 종근당 고촌학원 이사, 전 국민일보 편집국장, 대기자, 전략기획실장, 논설위원, 전 연합뉴스 기자, 교육컨설팅 경력 16년, 교육특강 200여 회, 저서 『여덟 명의 평범한 아이들 세계 명문대생 되다』, 『가난한 아빠 미국 명문대 학부모 되기』, 『꿈을 찾아 떠난 젊은이들』, 『나는 아이를 이렇게 키웠다』 등 다수. -저자 블로그 blog.naver.com/josephlee54 -저자 브런치 brunch.co.kr/@josephlee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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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7년 12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95쪽 | 492g | 153*224*20mm
ISBN13
9788991508408

책 속으로

한국사 최초의 조기유학생 최치원
최치원이 아버지 손을 잡고 서라벌에서 지금의 전라도 영산포까지 10여일을 걸어와 중국행 배를 탄 것은 869년. 12살 소년이 걷기에는 다소 먼 길이었으나 그는 불평 한 마디 없이 아버지 뒤를 따랐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 아들과 함께한 많은 시간 동안 아버지 최견일은 아들에게 왜 중국에 유학을 가야 하며, 객지에서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지 가르쳤다. 아버지는 또한 기울어져가는 신라의 정세에 대해서도 아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했다. 총명한 치원은 아버지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깊이 가슴에 새겼다. ---p. 16

최견일은 6두품 관리였다. 그러나 그는 시대를 읽는 감각이 있었고, 특히 자녀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그는 신분사회의 한계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 천재적 자질을 타고난 아들을 신라에서 키워서는 크게 출세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6두품이 진골과 같은 지배계급으로 올라서는 데는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첩경이었다. ---p. 22

근세 유학생 효시 김대건 ·최양업
세 소년의 유학길은 세속의 잣대로 볼 때 결코 축복의 길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유학을 떠난다면 모두가 부러워하고 축복하지만 그들이 걸어간 길은 천길 낭떠러지에 난 소로였다. 고통과 죽음이 입을 벌리고 있는 형극의 길, 신앙이 아니고는 결코 걸어갈 수 없는 길이었다. ---p. 59

김대건과 최양업은 신학생이 되기 위한 공부를 하면서 기초교양 과목을 철저히 배웠다. 지금도 신학생들은 사제가 되기 위해 먼저 철학 공부를 끝마쳐야 신학과정에 들어갈 수 있다. 김대건을 1841년 철학과정을 마치고 신학과정으로 진급했다. 사제가 되기 위한 긴 여정에서 반환점을 돈 셈이다. 조선은 그 당시 굳건하게 쇄국정책을 고수했지만 김대건과 최양업은 서구 학문을 배우며 최고의 엘리트로 탈바꿈했다. 나중에 김대건이 조선 관헌에게 잡혀 심문을 받는 기록에도 나오지만 조선 조정도 학문이 뛰어난 김대건을 살려 쓰고 싶어했다. ---p. 66

모방 신부가 조선 천주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계획한 ‘맞춤 유학’이 절반의 성공으로 끝난 것은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김대건과 그 친구들의 유학이 성공을 거두고 그들이 조선 천주교회의 사제로 공식 활동했더라면 한국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의 포교활동이 발전된 서구 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p. 78

조선 최초 미국 유학생 유길준
유길준이 갑신정변 발발 소식을 듣고 그토록 충격을 받았던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그와 뗄 수 없는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 당일 쿠데타 주도 세력에게 칼로 난자당한 뒤 천우신조로 피신, 알렌 선교사에게 치료를 받고 목숨을 건진 민영익은 유길준이 보빙사 사절로 미국에 올 때 특명전권공사로 모셨으며 자신이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은인이었다. 동시에 갑신정변을 주도한 세력들도 모두 친구이자 동지였다. 세상의 인연이 선연과 악연으로 교직돼 있다곤 하지만 이렇게 얽히고설키기도 힘들 것이다. ---p. 85

전권대신 민영익은 1883년 11월 10일 뉴욕 항을 떠나 귀로에 올랐다. 그는 수행원으로 따라온 유길준에게 미국에 남아서 새로운 문물을 더 익히고 돌아오라고 했다. 유길준을 국비 유학생으로 남겨 개화 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p. 108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유길준이 품었던 조선 개화의 꿈과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는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배에서 모스 교수에게 긴 편지 한 통을 보냈다. 그 편지에서 자신이 조선에 돌아가 어떤 역학을 할지에 대해 썼다. ---p. 116

한국 최초 미 의대 졸업생 서재필
서재필은 샌프란시스코에 남아 노동을 하며 공부를 했다. 지체 높은 양반이었던 서재필, 과거시험에 합격까지 한 그가 일당 2달러를 받고 가구상 광고지를 붙이기 위해 하루에 40여리 길을 뛰어다녔다. 양반으로 어려운 노동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서재필이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간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p. 132

당시 군의사령부 도서관에는 일본과 중국의 의학 잡지가 많이 있었으나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사람이 없어서 자료들이 그냥 방치되어 있었다. 도서관측은 이를 정리할 사람이 필요했다. 조선에서 한문을 배워 과거에 합격을 하고, 일본에서 유학을 했던 서재필만한 적임자는 없었다. 그는 일본어와 중국어 시험에 합격하고 곧바로 도서관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서재필은 워싱턴 DC에서 일자리를 구한 후 시내에 있는 코크란 대학에 등록해 일년 동안 정규과정을 밟았다. 수업은 저녁 6시에서 밤 10시까지였다. 서재필은 일년 후인 1889년 가을학기에 콜롬비아 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136

그는 해방과 함께 진주한 미군정의 요청으로 1947년 7월 1일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후 많은 이들은 그가 대통령으로 출마해주기를 간청했으나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조용히 미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굳힌 터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옛 제자인 이승만에게 5·10 총선에 불참한 김구, 김규식 등 남북협상파를 끌어안을 것을 권유했다. ---p. 150

개화의 새벽을 연 박에스터와 하란사
1909년 4월 28일 경복궁에서는 고종의 지시로 윤치호와 김필순이 주관한 관민합동 ‘초대 여자 유학생 환국 환영회’가 열렸다. 열여섯 살 때부터 일본, 벨기에,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을 거쳐 음악과 미술을 배우고 관립 한성고등여자학교 선생으로 부임한 윤정원과 1900년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한국 최초 여자 의사로 활동 중인 박에스터 그리고 1906년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상동교회 영어학교 교사를 하고 있는 하란사를 위한 자리였다. ---p. 144.

쉽지 않은 유학생활이었지만 총명했던 박에스터는 일년여 만인 1896년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신입생 300명 가운데 최연소였다. ---p. 152

하란사는 1906년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는다.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였다. 그녀는 졸업 즉시 귀국해 1906년 11월 시작된 상동교회 영어학교 교사직을 맡아 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랜튼 부인을 도왔다. 또한 하란사는 민족운동에도 참여했다. 고종의 밀지를 받아 1919년 6월 파리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의친왕을 밀사로 파견할 준비를 하기도 했다. ---p. 160

한국 최초의 미국 대학교 박사 이승만
밀사로서의 역할을 끝낸 이승만은 귀국을 포기하고 자신이 가고자 했던 길을 찾는다. 기록들을 보면 이승만은 미국행을 택했을 때 이미 그곳에서 공부할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그는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한국 내 저명한 미국인 선교사들로부터 무려 19통의 추천서를 받아놓았다. 선교사들이 써준 추천서에는 한결같이 이승만이 정치범으로 7년 간의 감옥생활을 하면서 40여 명의 동료 죄수들을 개종시킨 사실과 그가 조선의 기독교계 거물로 성장할 것이니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p. 174

이로써 그는 1909년 8월 하버드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동시에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박사논문 작성에 들어가 그 이듬해인 1910년에 집필을 끝냈다. 이승만은 1910년 6월 14일 프린스턴 대학교 졸업식에서 윌슨 총장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리나라 유학사에 또 하나의 기록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이승만은 명시상부하게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한국인 첫 번째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이다.

---p. 179~180

출판사 리뷰

해방 전후사에서 김구와 함께 큰 족적을 남긴 우사尤史 김규식은 거리에 버려진 고아였다. 그런 아이가 선교사 언더우드에게 발견되어 그의 집에서 자랐고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한 독립운동가로 거듭났다. 연세대학교 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지낸 백낙준은 평북 정주의 가난한 농부 아들이었다. 그 역시 선교사의 도움으로 유학, 예일 대학교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국 교육계의 큰 별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최초로 씌어지는 한국 유학사留學史
교육은 힘이 세다. 굳이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는 대의를 앞세우지 않더라도 달갑지 않은 사회·경제적 세습의 고리를 끊고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교육이다. 오늘날뿐이랴. 과거에도 교육은 위력 있었고, 그 사실을 아는 부모들은 필사적으로 자식을 넓은 세상으로 보내 가르쳤다. 거기에 야심찬 젊은이들의 꿈은 배움의 영역을 무한 확장시키는 추동력이었다. 미지의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자기 삶의 무대로 만들고 싶은 젊은이들은 끊임없이 ‘지금 이곳’을 박차고 나아갔다. 우리나라 해외 유학留學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 책 《꿈을 찾아 떠난 젊은이들》은 매우 흥미로운 ‘한국사 속 유학생 열전’이자 국내 최초로 씌어지는 ‘해외 유학사留學史’이다. 저자 이강렬은 최치원에서 이승만까지 배움을 위해 해외로 떠났던 여덟 명 선각자들의 유학생활을 재구성해 보여주는 한편 삼국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돼온 1300년 유학사를 조리 있게 들려주고 있다.

《꿈을 찾아 떠난 젊은이들》은 1부와 2부로 구성돼 있다. 1부 ‘고난은 성공을 약속한다’ 편은 미래를 위해 기꺼이 오늘의 고난을 자처했던 한국 유학사 선구자들의 삶을 소개하는, 일종의 열전이다. 2부 ‘한국 유학사留學史’는 신라시대 불법을 구하러 떠난 원광법사로부터 21세기 대한민국 파워엘리트로 성장한 유학파의 현황까지를 시대별로 정리한, 테마 역사서로 구성돼 있다.

떠나자, 갑갑한 현실을 박차고 더 넓은 세상으로!
예나 지금이나 유학의 직접적인 계기 중 하나는 현실과의 불화다.
우리 역사 최초의 조기유학생이라 할 만한 최치원. 지금으로부터 꼭 1,138년 전인 869년, 당시 열두 살이었던 최치원이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가는 쪽배를 탄 것은 6두품이라는 신분의 한계 때문이었다. 완고한 신분사회 속에서 천재 아들이 꿈을 제대로 펼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던 아버지 최견일은 위험천만한 길을 떠나보내며 아들에게 말했다. “10년 공부하여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하지 않을 것이다.” 과연 명민한 아들이었다. 최치원은 유학 6년 만에 당나라 빈공진사과에 장원급제했고, 저 유명한 〈토황소격문〉으로 신라 청년의 패기를 천하에 알림으로써 아버지의 믿음에 보답했다.

한국 최초 미 의대 졸업생인 서재필의 삶도 시대와의 불화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양반가의 자제로 태어나 18세에 문과 3등으로 급제하고, 일본 군사유학을 다녀온 서재필. 그러나 김옥균과 함께한 갑신정변 실패 후 그는 멸문지화를 피해 가까스로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캘리포니아 해안에 표착한 쓰레기 같이 외롭고 가여운 존재’로 전락한 그는 오로지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막일을 했다. 그런 고난 속에서 한국인 최초 미 의과대생으로 거듭나고, 귀국해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또 한 번 떠밀리듯 미국으로 망명한 뒤 62세에 다시 의과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재개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가슴 뭉클한 휴먼드라마다.

꿈은 그 꿈을 꾸는 사람의 몫이니…
야망은 쉽지 않은 유학길을 개척하는 가장 강력한 추동력이었다.
1909년 4월 28일 경복궁에서 ‘초대 여자 유학생 환국 환영회’라는 행사가 열렸다. 척화파가 득세하던 그 시절, 개화의 좁은 문을 일찌감치 박차고 나간 신여성들이 있었으니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한국 최초 여자 의사로 활동중이던 박에스터, 1906년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상동교회 영어학교 교사를 하던 하란사가 그들이었다. 더구나 이들은 결혼 이후 미국 유학을 감행한 ‘선각자’였다. 엄존하는 관습의 틀을 과감히 깨버린 두 여성도 대견하지만, 아내의 파격적 열정을 이해하고 희생적으로 뒷바라지했던 남편들의 결기가 더 놀랍다. 그들이 없었다면 한국 여성 유학사는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한국인 최초로 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 1904년 미국 밀사로 파견될 무렵 그는 19통에 이르는 추천서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한국 내 저명한 미국인 선교사들을 찾아다니며 받은 추천서에는 하나같이 이승만의 독립운동 경력과 기독교적 신념을 보증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직후 조지워싱턴대를 거쳐 하버드와 프린스턴을 오가며 모종의 딜을 시도하는 모습은 성취욕 강한 청년 이승만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예견케 한다.

그런가 하면 시대와 종교에 대한 소명의식이 유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근세 서양 유학의 효시라 할 김대건과 최양업의 마카오 유학은 종교적 부름에 따른 험난한 여정이었다. 한국 최초로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했던 유길준의 삶도 근대화라는 시대적 요구와 소명의식이 맞물린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공부가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한 채 좌절된 사실은 두고두고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꿈꾸고, 행동하고, 역사가 되다
책의 2부 ‘한국 유학사’ 편은 국내 처음 소개되는 해외 유학사라는 점에서 더욱 각별하다.
불법佛法과 유학儒學을 배우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 삼국시대 청년들, 당나라 빈공진사과 장원 자리를 놓고 발해와 신경전을 펼친 통일신라의 유학생들, 세종이 장영실을 중국으로 유학보낸 이유, 한국 최초 미국 대학 졸업생인 변수를 필두로 근대화의 물꼬를 튼 유학생들, 한국의 파워엘리트로 성장한 유학파 활약상과 21세기 한국의 유학정책 등이 원고지 400여 매 분량으로 충실하게 집약되어 있다. 특히 한중일 3국의 근대 유학정책을 비교하고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간 교육정책이 이후 각국의 운명을 어떤 모습으로 바꿔놓는지 서술하는 내용은 25여 년 신문사 기자생활을 해온 저자의 분석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저자 이강렬 씨는 자녀를 미국에 유학시키고 있는 대한민국 가장이다. 《가난한 아빠 미국에서 아이 공부시키기》 등 세 권의 전작에서 이 시대 성공한 자녀교육의 구체적 역할모델을 펼쳐보였던 그는 이번 책 《꿈을 찾아 떠난 젊은이들》을 통해 교육, 구체적으로 해외 유학이 갖는 가치와 파워를 한국사 속 인물들을 통해 다시 한 번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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