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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내 손에 사물(四物)만 있다면 두렵지 않다
1장 나는 조선의 글로벌 광대다, 유랑 그놈 싹수가 있구나 “이놈아, 네가 최고다” | 남사당의 꼬마스타 | 나이가 어려도 프로는 프로 | 부지런하면 입이 호강한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나보다 우리가 먼저다 | “내 것 아닌데 왜 욕심을 부리오” | 9년간의 매니저 겸 파트너 | 자기중심을 잡아라 남사당 전성시대 돈으로 살 수 없는 한 가지 | 세상을 보려면 시장에 나가보라 | “귀신같이 움직이는 구나” | 열정으로 상대를 제압하라 | 상모 돌리는 드러머 인생아, 너는 파도치는 변주가락이다 새로움은 생존의 또 다른 이름이다 | 두려움보다 더 큰 설렘 2장 넓은 시야로 세상을 품다, 열정 유목민, 남산으로 가다 공부가 가장 큰 재산 | 사람은 더불어 살아간다 | 힘들수록 혼자 견뎌라 | 고난을 이기는 법 현장이 최고의 스승 멘토를 찾으면 확신이 생긴다 | 질투를 실력으로 승화하라 | 한 소년의 가슴을 뒤흔든 사내 | 재능에는 반드시 값이 있다 | 잘 노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 | 나의 황당한 일본어 선생 | 글로벌 관객을 사로잡기 위한 비결 | 성공한 사람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높은 곳에 서야 전망이 보인다 경험이 재산이다 | 이념을 이기는 문화의 힘 | 남의 떡보다 내 떡이 더 소중하다 3장 미쳐야 성공한다, 몰입 사회라는 정글 속으로 사막을 묵묵히 건너는 낙타처럼 | 방법은 달라도 목표는 같다 열심과 열정의 차이 그냥 열심히만 살지 마라 | 열정적인 사람의 얼굴은 다르다 | 나의 보물 1호 4장 사막에 길을 내는 사람, 신명 부드러운 카리스마 위험해도 가야할 길이라면 간다 |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적도 친구가 된다 | “맥도널드 먹느니 김밥을 쌉시다” 신명나는 세상, 태산도 두렵지 않다 위기 앞에 주눅들지 마라 | 내 인생 최고의 수업료 | 사물놀이가 태어난 소중한 공간 | 나 아니면 안되는 일을 하라 사물놀이는 내 운명 전통을 붙잡느니 차라리 이단이 되겠다 | 사물밖에 모르는 바보 | 우리의 아름다운 금발 매니저 | 끊임없는 진화와 발전을 꿈꾼다 | 사물놀이 미국상륙대작전 | 몸과 마음, 가락이 하나되는 즐거움 | 우리 아빠는 세계 사물놀이 왕회장 | 역도산과 아인슈타인은 동등하다 | 예인은 마음공부하는 사람 내 이름은 광대, 내 무대는 세계 온몸으로 웅변하라 | 구슬프로 애잔한 비나리의 기억 | “동양의 신이 제우스에게 음악을 선물하다” | 배부르고 등 따뜻해지는 것을 부끄러워하라 | 희망은 하나다 | 악기 사업을 해야 하는 이유 | 내가 가진 것이 곧 경쟁력이다 | 온 지구가 내 집이고 무대다 | 세계인의 난장을 꿈꾸며 에필로그 - 죽는 날까지 신명으로 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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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밝히지 않았던 김덕수 예인 인생 풀스토리
어린 시절부터 해외공연으로 다져온 실력 인정받아 아무리 피곤해도 매일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을 정도로 성실 김덕수의 어머니는 그가 남사당으로 유랑하는 싫어했다. 김덕수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남편 김문학이 남사당패 일원으로 유랑을 하느라 집안일을 돌보지 못해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독 김덕수를 자주 데리고 유랑 길에 올랐던 아버지 덕에 5살에 조치원 장터에서 ‘새미(무동놀이에서 사미승복을 입고 어른들의 어깨를 올라타고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는 꼬마아이)’로 첫 데뷔무대에 오른다. 2년이 지난 1959년 이승만 대통령 시절,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귀신같이 장구를 친다’는 갈채를 받으며 7살의 나이에 대통령상을 거머쥐며 천부적 재능을 만천하에 공개한다. 이때 그를 눈여겨보았던 서울국악예술학교의 기산 박헌봉 교장 선생이 그를 학교로 불러들인다. “이제 정착해서 체계적으로 이론과 실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 기산 선생의 뜻이었다. 남사당패였던 그는 국악예술학교로 가기 전 낙랑 악극단(음악연주과 연극을 겸한 마지막 악극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 어린 아이들로만 구성된 밴드에서 그는 지금의 가수 혜은이와 함께 호흡을 맞추었고, 드럼을 치며 상모를 돌려 큰 인기를 모았다. 김덕수의 서울 생활은 그 시절 대부분이 그러했듯 처절한 고독, 가난과의 싸움이었다. 기숙사가 없어 형의 친구 집에 얹혀살고,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공연을 나가느라 결석한 것을 뒤늦게 알고는 학교에서 생활지원금을 지급받기도 했다. 겨울에는 추위를 이기려 난로를 끌어안고 잠들었다가, 이불을 태워먹기도 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한국민속가무예술단, 리틀엔젤스 활동을 동시에 하느라 공부에 소홀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김덕수는 바쁜 공연 스케줄 속에서도 틈틈이 하루에 일정 시간은 공부에 할애했다. 주로 한자와 수학을 공부했는데, 한자를 틈틈이 공부한 덕에 나중에 일어를 배우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밝힌다. 이미 김덕수는 어린 시절 타고난 끼를 인정받아 수많은 명인들에게 각종 전통악기 연주법과 소리를 전수받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남보다 빨리 전 세계를 무대로 공연을 펼쳐온 그의 경험과 노하우는 그에게 사물놀이의 창단의 촉매제로 작용한다. 한국 전통 민족혼 말살의 위기를 창발적으로 극복한 이 시대 최고의 광대 진정한 전통의 계승은 단순한 지킴이 아니라 새로운 시도와 창조를 통한 열림이다! 1978년, 서울 종로구 원서동의 ‘공간사랑’에 김덕수가 장구를 앞에 두고 앉았다. 그 옆에 쇠를 든 김용배가 보인다. 그리고 북 잽이 이광수와 징을 잡고 있는 최종실도 함께 하고 있다. 꽹과리, 징, 장구, 북 네 가지 악기가 삼도농악과, 웃다리 풍물을 연이어 몰아친다. 객석은 그들의 연주가 끝나자 일순 튼 충격을 받은 듯 조용해진다. 그리고는 이내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사물놀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공연과 신명의 민족음악이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김덕수가 지금의 글로벌 예인의 반열에까지 오른 것은 ‘사물놀이의 창단과 성공’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물놀이는 시대적 상황과 김덕수의 오랜 꿈과 노하우가 빚어낸 전략적 산물이다. 사실 사물놀이가 탄생할 무렵 시대상은 매우 암울했다. 군사정권 시절 꽹과리와 징, 장고, 북은 학생들의 반정부집회 현장에서 집회의 시작을 알리는 포문의 역할을 했다. 그 이유만으로 전통 타악기는 압수품목이 되었고, 실외에서 연주는 금지 당했다. 김덕수는 우리나라의 혼이자 신명 그 자체였던 악기들을 더 이상 밖에서 연주할 수 없게 되자 새로운 연주형식을 개발해야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당시 공간사랑은 시인, 문인, 무용가, 재야 학자들에게 서로의 기운을 주고받는 예술인들의 사랑방 같은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공간 전통 예술의 밤’이라는 프로그램에 올릴 연주를 준비하며 남사당과 전통문화의 맥을 이어가기 위한 가장 최소한의 마지노선인 꽹과리, 징, 장구, 북만으로 연주하는 사물놀이가 탄생한 것이다. 김덕수는 공간사랑에서 사물놀이에 대한 관객들의 열정적 반응을 보며, 그동안 세계무대에서 경험한 호응을 떠올린다. 그는 사물놀이가 한국의 전통문화를 시대에 맞게 창조적으로 계승하면서도 세계를 강타할 문화 아이콘으로 성공하리라고 직감한다. 그것은 단순한 객기가 아니라, 그가 코흘리개 시절부터 세계를 돌아다니며 우리의 신명과 한국 문화의 힘이 얼마나 우수하고 큰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온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한국민속가무예술단의 단장직에서도 물러나고, '한국창예주식회사'라는 프로덕션회사의 대표직에서도 사임한다. 그동안의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고 사물놀이에 모든 것을 바친 것이다. 그만큼 사물놀이에 대한 그의 의지는 대단했다. 지금 사람들은 그때의 김덕수에게 ‘시대를 읽는 눈’이 있어서라고 말한다. 하지만 젊은 날 김덕수가 원한 것, 지향한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니었다. 김덕수는 단지 자신이 사랑하는 우리 전통예술이 사라져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가 하고 싶은 일을 밥 굶을 걱정 없이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물론 일부에서는 사물놀이가 파격적이라는 이유로 전통을 무시한 것이라고, ‘이단아’라고 몰아붙였지만 김덕수가 생각하는 전통을 ‘변화’를 담보한다. 시대가 변하면, 전통도 시대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아빠는 사물놀이 왕회장, 세계 방방곡곡에 사물놀이가 울려 퍼지리라 죽는 날까지 무대에서 우리의 신명과 에너지를 전하다 가고 싶다 김덕수에게 즐거운 기억이 하나 있다. 그의 아들이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다. 당시 운 좋게 사립 유치원에 당첨이 되어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재벌가의 아이들이 김덕수의 아들과 함께 유치원을 다녔더란다. “야! 우리 아빠는 사장이야.” “야, 인마. 우리 아버지는 대그룹 회장이야.”라며 각자 자기 아버지 자랑이 한창이었는데, 김덕수의 아들은 “야, 우리 아빠는 사물놀이 왕회장이셔.”라고 당당하게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김덕수는 출입국 카드나 직업란에 당당히 ‘사물놀이’라고 쓴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광대, 예인’이라는 점에 대해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그가 사물놀이를 통해 전통을 재해석한 뒤로 그 자리에 머물렀다면, 지금의 글로벌 광대 김덕수는 없었을 것이다. 전통의 의미를 ‘시대에 맞는 창조적 계승’이라고 했듯이 스스로 그 원칙을 철저히 지켜냈다. 1995년 UN총회장에서 마에스트로 정명훈과 함께 ‘사물놀이를 위한 협주곡 <마당>을 연주했고(사물놀이와 오케스트라 협연), 1987년에는 SXL이라는 프로젝트 밴드를 결성해 세계적인 재즈 뮤지션들인 빌 라스웰, 허비 행콕, 사카모토 류이치와 해외공연을 다녔고(재즈와 사물놀이 협연), 1993년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2집 타이틀 곡 <하여가>에 참여(사물놀이와 힙합의 협연)하는 등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예술 활동을 펼쳐왔다. 지금도 얼마 후 올릴 <예인인생 50주년 기념 공연>에서 비보이들과 함께 공연을 펼치기 위한 연습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비보이들이 김덕수를 찾아온 첫날, 김덕수는 그들에게 남사당의 살판(땅위에서 하는 재주넘기)과 풍물의 자반뒤집기, 벅구놀이의 연풍대를 눈으로 보여주었다. 비보이들은 무척 놀라며 자신들이 하는 행위와 닮아 있음을 인정했다. “너희들 DNA 안에 이미 전통이 들어있다.” 옛것과 새것이 충돌하면서 문화의 발전이 가능하다고 믿는 이 시대 글로벌 광대 김덕수, 그가 이야기 하는 진정한 신명과 글로벌 예인으로서의 성공비결을 담은 ‘50년 만의 첫 책’에서 그동안 듣지 못했던 눈물과 해학의 인생스토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