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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 그게 시작이었다 편집장님, 편찮아 보이세요 내일 사표를 내자 2 갑자기 망가져 버린 나 차 안에 아들을 내버려 두다 사표가 수리되다 아버지인 당신에게 투자한다 3 아들과 처음 떠나는 긴 여행 압박이 서서히 시작되다 아이와 놀아두지 않으면 후회할 거야 0 4 퇴직 그 남자의 연봉은 얼마인가 아빠는 귀찮은 존재일 뿐 5 아빠는 무직이니까 아들의 작은 손을 오랜만에 잡고 도대체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 6 공황장애라는 진단을 받고 왜 계속 나빠지기만 하는 걸까 처음 가 본 병원 도심 한복판의 심리 상담소 아빠는 나를 제일 좋아해 7 도로 아미타불 집에는 돈이 없다 무직이니까 일은 안 합니다 8 1년 만에 타는 지하철 스위치를 찾아라 아내는 내 손을 잡았다 9 직장인의 유통기한 무직이었던 부부의 비밀 이야기 아들은 다 알고 있었다 10 스위치를 끄다 알아차림 그리고 새로운 결심 11 다시 비행기에 오르다 마지막 도전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시간 12 가족의 인연 아내가 쓰러졌다 아빠는 여기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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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둬.” 아내는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회사를 그만두는 이유도 묻지 않았다. 표정을 살폈지만 별반 동요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별다른 말없이 그만두라고 하는 것이 더 불안했다.
“아직 다른 계획은 없어, 당분간 무직이야. 나 벌써 마흔이 넘었어. 다음 회사야 금방 구하겠지만….” 나는 쉴 새 없이 주절댔다. 아내는 내가 하는 말을 막았다. “다음 일자리 말이야, 1년 안에만 구해줘.” 그 말을 남기고 화장을 하러 세면대로 향했다. ---p.21 사표를 썼다.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다. 진짜 이유는 알리지 않은 채 회사를 멋있게 정리하고 싶었다. 상사에게든 인사담당자에게든 내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솔직하게 말했다면, 장기 휴가를 받거나 부담이 적은 부서로 이동시켜 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내 곳곳에서 “그렇게 유난을 떨면서 일 중독자로 살더니 망가졌다”고 수군댈 것이 뻔했다. 그런 식으로 비웃음을 당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유명 월간지의 잘 나가던 편집장인 채로 퇴직하고 싶었다. 이 와중에도 이런 걸 마음에 두는 인간이니까 몸에 이상이 생긴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몸에 이상이 있다고 소문이 나면 더욱더 회사로 돌아올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p.21 “아이가 크는 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야. 같이 놀아두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히 후회해.” 그때마다 나는 “그래.”라고만 말하고 항상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 아내는 늘 이렇게 말했다. “좀 있으면 상대도 안 해줄걸? 지금 제대로 대화하지 않으면 나중에 당신이 아이를 혼낼 때, 들은 척도 안 할 거야.” 상대해 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아주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섯 살이 될 무렵부터 아들은 나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p.68~69 하루하루의 삶은 조용했다. 휴대전화도 거의 울리지 않게 되었고, 수신되는 메일 수도 줄어들었다. 썰물처럼 빠진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임을 실감했다. 그것이 나는 참을 수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없어지는 것 같아.” “지금은 푹 쉴 것. 그래서 여유가 생기면 가사나 육아를 할 것. 그걸 지금의 일이라고 생각해.” 아내의 말에 “응, 그랬지.”라고 나는 대답했다. 의외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쉬는 것이 일이었다. 그래, 그것을 위해 퇴직한 것이었다. ---p.87 “아빠, 귀찮게 하지 마.” 아들에게 ‘귀찮다’고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 고약한 말버릇, 나는 분노했다. “지금 아빠한테 귀찮다고 했어? 그 말버릇은 뭐야?” “싫어. 아빠 절로 가!” 아들이 갑자기 나를 발로 찼다. “귀찮다고 하지 않나 발로 차지 않나, 이거 뭐야? 너무하는 거 아니야?” “진짜 귀찮단 말이야.” 아들은 울면서 할아버지 방으로 도망쳤다. 정작 울고 싶은 건 나였다. 없는 돈에 호화로운 여행에도 데려가 줬는데 귀찮다니, 해도 해도 너무한다. ---p.90~91 숨을 헐떡이며 아들이 테니스공을 가져왔다. 공을 건네받으면서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공이 어디로 가는지 잘 아네.” “아빠, 나는 여섯 살이니까 눈이 좋아.” “그렇구나. 대단하네.” “그리고 아빠는 마흔한 살이니까 뭐든 알고 있어서 좋아.” 뜻밖의 상황에서 아들이 나를 칭찬했다. 아들에게서 칭찬받은 것이 아마 처음인가. “내가 뭐든 안다고?” “응. 아빠는 다 알아.” 그렇게 대답하더니 쿨하게 돌아서서 코트 가운데로 쪼르르 달려갔다. ---p.126 “아빠, 괜찮은 거야?” 아이가 내 일로 걱정하고 있다. 나는 아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오늘은 괜찮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긴 하지만 실제로 그랬다. “왜?” 아들은 아직 안심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진심으로 대답했다. “너랑 같이 있으니까 괜찮아.” “나랑 둘이 있으면 일곱 시간 안 멈춰도 괜찮아?” “괜찮아.” 그러자 아들은 잠시 뜸을 들이다 선뜻 말했다. “아빠는 나를 제일 좋아하는구나?” ---p.161 된장국을 먹지 못하니까 학교에 가지 않겠다. 이것이 등교 거부의 이유라니, 무언가 엄청난 비밀이나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정이 아들의 입에서 흘러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된장국이었다. 책가방을 맨 아들이 길 위에 서 있다. 학교를 향한 자세로 아들은 눈물을 흘린다. 손바닥을 얼굴에 대고 눈물을 훔치고 있지만, 닦는 속도보다 더 빨리 눈물이 쏟아진다. 나는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결단을 내렸다. “오늘은 된장국을 안 먹어도 돼. 급식 시간이 되기 전에 아빠가 학교로 데리러 갈게. 친척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지금 아빠랑 시골에 가야 한다고 말을 꾸며 봐야겠어.” 아들의 부은 눈이 나의 얼굴을 본다. “와 줄 거야? 정말?” ---p.2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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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른아홉까지는 순조로웠다
나는 30대에 잡지 편집장으로 취임했다. 유명한 잡지였고 내가 맡고 나서 잡지의 판매 부수가 쭉쭉 늘기 시작했다. 기쁘다기보다 긴장감이 앞섰다. 내가 마음을 내려놓으면 성적이 금방 추락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휩싸였다. 일하는 시간은 더욱더 길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컴퓨터를 켜고 일에 힘썼다.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 일을 계속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나는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다. 나의 정신 상태가 이상해졌다는 사실은 회사의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일자리는 잃어도 자존심만은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가족이라면 따뜻하게 맞아 주리라고 기대했는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아내와 대화하는 시간은 하루에 몇 분 되지 않았고,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은 나를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자존심을 위로해 주는 것은 가족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착각이었다. 잘못이 나에게 있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최근 몇 년 동안이나 집에 붙어 있지를 않았으니까. 퇴직 후의 일은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다. 전직이고 창업이고 생각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나의 처지는 순식간에 달라졌다. 직업 없음, 수입 없음, 게다가 정신 상태도 이상해졌음. 그뿐인가, 가족마저 등을 돌렸다. 2. 내일 사표 내러 갑니다 “저 내일 사표 내러 가요.” 나이가 지긋한 주인은 웃는 표정을 한 채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곧 얼굴에 웃음을 띠고 내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리며 물었다. “이제 뭐 할 건데?” 나는 짧게 대답했다. “백수.” 주인은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 “아들은 어떻게 할 건가? 아직 유치원생이잖아?” 너무 진지해서 조금 슬퍼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서야 내가 얼마나 무모한 결심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러나 가방 안의 사표를 내지 않고 끝낼 생각은 없었다. 평소보다 술을 두 잔 더 부탁했다. 주인은 눈꼬리가 처진 온 화한 표정으로 돌아가 말없이 술을 술잔 가득 따라 주었다. “전어로 만들어줄까? 아직 안 먹었지?” “네.” 희미한 은빛의 전어초밥이 나무판에 놓였다. “전어라는 건 손질하고 소금을 뿌릴 때가 가장 중요해. 그때가 포인트지.” 주인이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전어를 소쿠리에 놓은 다음, 밤에 서리가 내리는 것처럼 소금을 뿌리면 돼.” 순간 푸른 밤, 달빛을 머금은 서리가 흩날리는 광경을 상상했다. 그러자 사표를 가지고 흥분했던 기분이 꽤 진정되기 시작했다. 3. 아빠랑 나만 가는 거야? 그럼 나 그냥 엄마랑 집에 있을게 사표를 제출하고 처음 맞는 주말 아침, 나는 아들에게 당일치기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아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나는 말하기 전부터 설렜다. 또박 또박 말대꾸도 잘하고 키도 훌쩍 컸지만, 그래 봐야 유치원생이다. 아빠가 어디 가자고 하면 엄청 흥분하면서 따라나설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들의 반응은 정말 뜻밖이었다. “아빠랑 나만 가는 거야? 그럼 나 그냥 엄마랑 집에 있을게. 엄마랑 놀고 싶어.” 나는 당황했다. “왜? 왜? 네가 좋아하는 곳에 데려갈게. 아마 재미있을 거야.” “아마, 재미있을 거라고? 그럼 재미없을 수도 있다는 얘기잖아.” “뭔 소리야? 억지 부리지 마.” “억지 부리는 게 뭐야?” “어쨌든 암말 말고 그냥 따라와!” “아빠랑 둘이서만 간다고? 어쩌지….” 회사를 떠날 결심을 하면서 제일 먼저 해보고 싶었던 것이 아들과의 여행이었는데 초장부터 벽에 부딪히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너 말이야. 할아버지나 엄마랑 놀러 갈 때는 즐거워하잖아. 근데 왜 아빠가 가자고 하니까 그렇게 시큰둥해?” 4. 남자는 계속 달려야 한다 사표가 수리됐다. 그 주에 나는 교토에 갔다. 편집장이 되기 전부터 오랫동안 도움을 받았던 작가에게 퇴직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고 두 시간 동안 쓴소리를 들었다. “잘 생각해 봐. 지금 나이에 회사를 1년이나 쉬면 다음에 복귀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 다시 편집장 자리에 앉을 수 있을 것 같나? 이 일을 다시 안 할 게 아니라면 버텨야 해.” 여기서도 나는 진짜 퇴직 사유를 말하지 않았다. 사표가 수리된 이상, 처음 계획했던 대로 가족과의 시간을 핑계로 내세울 작정이었다. “남자는 계속 달리는 게 중요해. 중간에 멈추면 상품 가치가 떨어져.” 백번 동의한다. “달릴 수 없을 때도 있어요.” 속 모르는 얘기라고, 목구멍에 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만두었다. 아끼는 인생 후배에게 열정적으로 이야기해주는 작가를 말리고 싶지 않았다. 고마운 일이었다. “여태껏 다 포기하면서 달려왔는데 고작 여기서 그만두나. 너무 아까워.” “그렇게 아까운 걸까요?” 취기가 올라오는 데다 날카로운 질책을 잇달아 받은 나는 갈수록 마음을 주체할 수 없게 되었다. “다 때가 있는 거야. 한창때에 멈춰버리면 앞으로의 인생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이 말이 가슴을 깊이 찔렀다. 말문이 막힌 나에게 작가는 여러 번, 반복해서 타이르듯 이야기했다. 취할 대로 취한 나는 입을 다문 채 작가의 말을 받아들였다. 확실히 이것은 인생을 포기하겠다는 것과 같다. 다시는 최전선에 설 수 없겠지. 그러나 흐릿한 의식 속에서 다른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처럼 몸 상태가 나빠져서 노선을 변경한 사람들은 모두 불행해졌을까? 일을 그만두면 그것으로 인생이 정말 끝나는 것일까. 5. 천만 원만 줘 아내에게서 확답은 아직 받지 못했지만 내 진심을 최소한 전달할 수는 있었다. 조금 반성도 했다. 천만 원은 너무했나. 하지만 이렇게 엉뚱한 계획이라도 세우지 않으면 매일 초조하고 불안한 생활을 할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끝나버릴 것처럼 막막하고 갑갑했다. 아들과 친해지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이게 당분간 내 유일한 목표이자 생각할 거리가 될 것 같았다. 이조차 없으면 무엇을 계획하며 살 것인가. 아득했다. 뭔가 숙제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아내는 이미 출근한 뒤였다. 그런데 머리맡에 뭔가가 있었다. 통장과 현금카드였다. 긴말 없이 즉각 행동에 옮기는 아내였지만 솔직히 예측하지 못했다. 놀란 나는 서둘러 아내에게 전화했다. 혼잡한 출근길 소음에 섞인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투자야. 당신한테 투자하는 거라고.” “투자? 무슨 말이야?” “아버지 자리에 투자하는 거야.” “알아듣게 얘기해 줘. 내 여행과 투자가 무슨 상관이야?” “제대로 된 아버지가 되어 줘. 그것 때문에 천만 원 투자하는 거니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럼 어디에 써야 하는 거야? 여행에 다 써도 되는 거야?” “쓰는 건 당신이니까 그 돈이 어디에 써야 하는지 나는 몰라. 하지만 투자를 하는 거니까 제대로 된 성과를 만들어 와. 그것만 잊지 마.” “알았어.” 감상에 젖어 눈이 촉촉해지려는데 아내답게 마무리가 확실했다. “당분간 우리 저축은 없어. 당신 퇴직금은 주택 융자금을 갚아야 하니까. 나로서는 마지막 투자야.” “천만 원, 다 써도 정말 괜찮은 거지?” 재차 확인하며 소심하게 구는 나를 향해 아내는 말했다. “글쎄?” 괜찮다는 답변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날아갈 듯 가벼웠다. 어떤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아들과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내게 그것은 단 하나의 계획이자 단 하나의 희망이었다. 마흔한 살의 봄, 여섯 살 아들과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