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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교阿嬌―금옥을 지어 그녀에게 주리라
2-1 흉노匈奴―국토의 기본 윤곽을 확정하다 2-2 현량賢良―정신문화의 시스템을 구축하다 3-1 서역西域―실크로드를 열다 3-2 신선神仙―하늘의 아들, 스스로 신이 되려 하다 4-1 반혼返魂―스러져가는 꽃의 설화 4-2 망사望思―아들을 그리워하다 맺음말―시스템 구축의 제왕학 연표와 색인 옮긴이 후기 |
Kojiro Yoshikawa,よしかわ こうじろう,吉川 幸次郞
요시카와 고지로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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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한 사료와 문학적 상상력을 교직하여 엮어낸 한 편의 장대한 서사시
이 책 『한무제』는 독재군주로 절대 권력을 장악했던 인간 무제의 활달하고 적극적인 삶의 면면들을 생생한 필치로 그려내면서 정치적, 문화적으로 위대한 족적을 중국 도처에 남긴 무제의 치세를 흥미롭게 그려낸 요시카와 고지로의 중년 작품이다. 성장에서 제국을 완성하기까지 파란만장했던 무제의 일생을 사료와 문학적 상상력을 교직하여 저자의 재능을 십분 발휘한 한편의 장대한 서사시라고 하겠다. 문사철文史哲을 통섭統攝했던 저자의 탁월한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 가운데 하나다. 2000여 년 전, 무제라는 인물을 소재로 그가 이야기하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패전이라는 황폐한 현실 속에서, 대중들의 한낱 소일거리로 쓴 작품만은 아닐 것 같다. 참고로 이번에 번역 텍스트로 사용한 책은 1988년 7월에 나온 제43쇄다. 이와나미 서점에서 『한 무제漢の武帝』 원서가 처음 출간된 것은 1949년 12월 20일. 그러니까 군국주의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지 4년여, 1904년생인 저자 요시카와 선생이 왕성한 저술 활동을 벌이던 40대 중반의 작품이다. 방대한 저작들 가운데 고작해야 너덧 작품을, 그것도 주마간산으로 읽은 나로선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일이다. 머리말이나 저자 후기 같은 글을 마련해 두었더라면 저자의 의중을 조금이나마 알아차릴 수 있었을 터이나, 타계 후 30년에 가까운 지금으로선 실현 불가능한 몽상일 따름이다. 다만 요시카와가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이토 도가이伊藤東涯의 『제도통制度通』을 교정, 복각하는 작업에 힘을 쏟았는데, 그 『제도통』은 일본과 중국의 국가체제와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제도를 종합적으로 비교해서 일본의 제도가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밝히고 일본의 모든 제도가 본래 중국에서 기원한다고 주장한 책이다. 그리고 “요시카와가 이 책을 교정했던 것은 이미 군국주의나 편협한 국수주의와는 노선이 달랐다. 그의 작업은 …… 중국을 얕보고 침략해서 세계대전을 일으킨 세력에 대하여 비판의 뜻을 드러낸 것이었고” “근대 이후 중국에서 오경五經의 규범적 가치가 상실되어 혼란을 겪고 있는 상태를 목도하고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가치를 회복시킬 것을 주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권 논리를 받아들인 면도 있었으나, 요시카와는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 재편 그리고 일본의 패권주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중국의 문명을 예찬하고 숭배하기까지 했으므로 일본 제국주의 논리와는 부합하지 않았다. 전쟁 이후 요시카와는 중국 문화 속에서 개별성을 찾아내고 동양적 휴머니즘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더욱 학문을 진척시켰다. 중국의 문화, 문명을 존중하려는 태도는 교토대학 중국학의 문화, 문명 중시 노선을 잘 반영한다고 하겠다”는 말에서 그 일단을 읽을 수 있다(심경호, 『위대한 아시아』). 물론 이 책에서도 요시카와의 입장이 엿보이는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마지막 ‘맺음말’에서 요시카와는 이렇게 말한다. “맹자가 생존하던 시대의 실제 정치가 전국칠웅戰國七雄의 격렬한 대립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은, 얼핏 생각하면 이런 시대적 기운과 배치되는 듯 보인다. 다만 그나마 7개 이상 난립하던 많은 나라들이 일단 7개의 강국으로 정리되어 서로 쟁패를 겨루게 된 것이라고 본다면, ‘7’이라는 숫자는 결국 완전한 ‘1’ 곧 하나의 국가로 수렴되어가는 과정이었다. 대망大望의 ‘1’ 그것을 일단 하나의 형태로 실현한 나라는 진나라 시황의 제국이었다. 무제가 태어나기 100년 전, 중국 전토는 황제가 파견한 관리의 손을 거쳐 통치되고 동일한 법률의 적용을 받는 시절을 한 차례 경험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 제국秦帝國이 단기간에 멸망하고 만 것은, 황제가 가진 ‘권력’을 행사하는 일에는 급급해하면서도 백성들의 경의를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권위’는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권위를 수반하지 않는 권력은 중국에서도 무력했다(밑줄은 옮긴이). 하지만 진 제국의 상속자로 등장한 한나라 고조의 제국은 그런 권위를 갖추고 있었다. 진 제국의 붕괴 뒤에 일어난 내전을 평정하고 다시금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은 백성들의 경의를 흡수하기에 충분했으며, 일인 황제의 통치가 인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하다는 신념을 강화시켰다. 고조가 진 제국의 실패를 교훈 삼아 가급적 관대한 정치를 펼치는 데 애썼던 사실, 3대 문제文帝, 4대 경제景帝가 모두 어진 정치를 수행했던 사실은, 결국 이 같은 일반의 신념을 더더욱 공고히 만들어주었으며, 황제의 권위를 제고하는 데 유효하게 작용했다. 그런데 무제는 그러한 권위를 할아버지로부터 계승한데다가 여기에 다시 한 가지 권위를 더 보탰다. 황제는 인간 문화의 주재자요 대표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실제 행동으로 인간들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황제야말로, 중국인들이 그토록 학수고대하고 있던 바였다. 무제는 그런 인민의 거대한 여망輿望에 부응했던 것이다”라고 ---역자 후기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