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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자들에게
┃세모에 책을 버리다_서문을 대신하여 1부 글 속의 책 문학의 ‘이율배반’-칸트를 읽는다 문학의 ‘뿌리’-텐, 토인비를 읽는다 밀란 쿤데라의 가벼움-쿤데라를 읽는다 영혼의 소리-장청즈, 스티에성을 읽는다 인간의 가치-리슈통,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읽는다 가난하긴 쉬워도 부유하긴 어렵다-소동파를 읽는다 성전聖戰과 유희-혜능을 읽는다 발코니에서의 유감-장차오를 읽는다 즉차즉피卽此卽彼-고염무, 치엔종수, 량스치우를 읽는다 야행자의 잠꼬대-니체, 사르트르를 읽는다 성이상학의 상실-D. H. 로렌스, 쿤데라, 헤겔을 읽는다 소설의 무대 뒤-바르트, 브레히트를 읽는다 세계-알퐁스 도데, 알렉스 헤일리, 헌팅턴을 읽는다 불佛과 마魔는 한순간-인 , 허스광, 숑스리, 데이비스를 읽는다 완벽한 가정-체 게바라, 밀로반 질라스를 읽는다 제2급 역사-프레드릭 제임슨, 마르크스, 프랜시스 후쿠야마를 읽는다 낯익은 이방인-토머스, 푸코, 호프스태터, 페소아를 읽는다 국경의 이편과 저편-아리프 딜릭, 백영서, 러셀을 읽는다 공약수, 가건물 그리고 토끼-데리다, 하버마스를 읽는다 인정슈퍼대국-공자, 맹자, 베이컨, 동중서를 읽는다 페소아의 성경-페르난두 페소아를 읽는다 공간-데스몬드 모리스를 읽는다 묵자-묵자를 읽는다 2부 말 속의 책 기호: 문화의 게릴라전인가, 문화의 유희인가 -그람시,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읽는다 언어: 도구성과 문화성이라는 양 날개 -비트겐슈타인, 리우허 등을 읽는다 역사: 현재와 과거의 상호 자극 -정이, 공자, 치엔무, 브로델 등을 읽는다 문학: 문체의 개방과 가까이보기 -아리스토텔레스, 묵자, 제임슨, 천춘, 왕안이 등을 읽는다 ┃옮긴이의 글 ┃게재도서목록 일람 ┃한샤오궁 창작 연표 |
韓少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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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언급된 동서고금의 저자들, 수록된 내용
D. H. 로렌스, 쿤데라, 헤겔, 칸트, 토인비, 리슈통, 가와바타 야스나리, 장청즈, 스티에성, 소동파, 혜능, 장차오, 고염무, 쳰종수, 양스치우, 니체, 사르트르, 롤랑 바르트, 브레히트, 알퐁스 도데, 알렉스 헤일리, 헌팅턴, 인슌, 허스광, 숑스리, 데이비스, 체 게바라, 밀로반 질라스, 프레드릭 제임슨, 마르크스, 프랜시스 후쿠야마, L. 토마스, 푸코, D. 호프스태터, 아리프 딜릭, 백영서, 러셀, 데리다, 하버마스, 공자, 맹자, 베이컨, 동중서, 페르난두 페소아, 데스몬드 모리스 ---나는 셰익스피어를 읽었고 백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나의 그런 애호는 하방下放 시절에 시작되었다. 하향하기 전 나는 몇몇 친구들과 폐쇄된 학교 도서관에 숨어들어 손에 잡히는 대로 책 몇 권을 훔쳤다. 그리고 그것으로 시골 장마철의 어두웠던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 그 아름답던 언어의 세계를 나는 영원히 기억한다. 그런 언어로부터 오늘에 진입하면서, 나는 언어 역시 그런 것임을 깨달았다. 셰익스피어의 언어든 아니든, 모두 인간의 경험과 사유, 감정 속에 침전되어 뇌의 발육과 진화를 추동함으로써 인간관계를 조직하고 인성을 부여한다. … 조각조각 흩어진 복잡한 세계지도 속에서, 우리의 몸은 배반의 이기심을 분비한다. 오로지 진리의 소리, 저 멀리서 맑게 반짝이는 정신만이 국경을 넘고 피부색, 머리색, 생김새의 차이를 관류하여 인류 공통의 영혼을 향할 것이다. 영혼과 영혼이 모두 깨어 있다면.---세계 ---중국은 종이와 활자인쇄를 최초로 발명한 나랍니다. 그래서 출판, 교육이 발달하고 독서인이 아주 많았죠. ‘사농공상’ 중 ‘사’는 유사儒士와 문사文士를 이릅니다. 유럽이나 일본의 군사귀족인 무사武士가 아니죠. 전국시대 독서인들은 ‘육예六藝’를 추구했는데, 그중 활쏘기와 말타기가 있었습니다. 문무겸비였는데, 그 점에서 유럽이나 일본 무사와 비슷합니다. 레이종하이 선생의 말처럼, 나중에 와서 ‘문약화’되었습니다. 몇십 년 일심으로 성현의 책만 읽었죠. 희곡에 나오는 백면서생들을 보면 관리가 되려는 사람 외에는 하나같이 아가씨들과 눈 맞아 연애질만 하잖아요. 그 많은 독서인들이 다 과거를 보려고 하니 처음엔 황제가 기뻐했습니다. 천하의 인재가 다 우리 손안에 걸려들었구나, 하고요. 그런데 나중에 가니 골칫거리가 됐습니다. 그만한 편제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정원외員外’를 설치할 수밖에 없었죠.---역사:현재와 과거의 상호 자극---정이, 공자, 치엔무, 브로델 등을 읽는다 ---질문_ 중국 문학계에는 항상 ‘노벨문학상’에 목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벨상 콤플렉스 같은 것이 번번히 신문을 떠들썩하게 합니다. 그런 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답변_그건 중국 문학계의 자신감의 결핍을 보여줍니다. 노벨상은 분명 많은 우수한 작가들을 고무해왔습니다. 하지만 과실도 있었죠. 이 상을 숭배하거나 저주하는 것, 모두 과민반응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상이 있으니 약간 흥분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독서 에이전시나 작품추천으로 치면 되지요. 하지만 어떤 상도 올림픽 금메달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문학은 체육이 아니에요. 금메달은 있을 수 없죠. 스웨덴은 중국의 성省 하나만 한 작은 나라입니다. 중국 문학을 포함하여 세계문학은 절대 이런 상에 의해 바뀌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상을 주는 기구의 명예가 바뀌겠지요. 그래서 수상이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피곤하고, 또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얼마 전 어느 사장님 말이 중국인이 주재하는 세계적 문학대상을 만들려고 자금을 마련했다고 합디다. 상금을 노벨상보다 더 크게 하겠대요. 제가 관두라고 했습니다. 신중해야지, 고생을 사서 할 필요 없다고요. ---문학: 문체의 개방과 가까이보기 ---듣자 하니 장따치엔(張大千,1901~1984)이 그림을 배우기 위해 피카소를 찾아갔을 때, 피카소가 이렇게 말했다 한다. ---파리에는 뭐 하러 왔나? 파리에 무슨 예술이 있다고. 예술은 자네들의 동양과 아프리카에 있다네……. 이런 것들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이들이 주시했던 양쯔 강과 황허 양안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지금 이곳은 천지를 뒤엎을 듯한 개혁과 재건이 진행 중이다. 모두가 우리에게 필요한 과학과 기술 일체를 서양으로부터 ‘빌려와’ 현대화된 생활을 건설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문학의 뿌리_텐, 토인비를 읽는다 ---서양에서 건너온 공업문명은 중국인의 눈에서 해태를 걷어냈다. 안빈낙도는 썩은 유가의 설교라며 조소와 냉소 속에 폐기되었다. 가난에 찌든 중국인들은 부를 이루는 데 목숨을 걸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회학자들은 ‘발전벽’에 시달렸고, 좌우익을 막론하고 모두 함께 ‘발전’을 성지聖志로 삼았다. 그들은 경제가 발전하고 물질적 조건이 개선되면 모두가 행복해질 거라고 사람들을 힘껏 설득했다. …이상하게도 행복의 총량이 늘수록 행복지수는 감소한다. 행복과 행복지수는 다르다. 20세기 1970년대, 어느 중국 청년이 봉황표 자전거로 행복할 수 있는 기간이 이년이었다면, 지금은 아마 두 달, 아니 이틀이면 끝날 것이다. ---가난하긴 쉬워도 부자되긴 어렵다---소동파를 읽는다 ---중국어는 세계 인구의 사분의 일이 사용하는, 수천 년의 광대한 전적典籍을 자랑하는 언어이다. 일찍부터 굴원, 사마천, 이백, 소동파, 조설근, 루쉰이 미적 경지로 끌어올린 언어다. 그런데 이제 중국어가 중국인도 돌보지 않는 하등인의 표지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 세계---알퐁스 도데, 알렉스 헤일리, 헌팅턴을 읽는다 ---우리에겐 오늘의 공자와 장자가 없고 오늘의 『이소』와 『단경』이 없다. 우리에겐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대학가가 있지만, 자연과학계의 아인슈타인과 하이젠베르크가 없고 철학계의 칸트와 마르크스, 하이데거가 없으며, 문학계의 톨스토이, 카프카가 없고 예술계의 피카소와 베토벤이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다른 사람의 학설을 잇고 발전시키고 나아가 당당하게 실천으로 연결시키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세계 조류에 영향력을 미친 시대의 문화거장이 없다. 동방의 문화강국을 논하면 그저 말을 얼버무릴 뿐이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학생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엄밀하게 말해, 우리의 많은 학과는 지금껏 서양의 수혈로 명맥을 이어왔다. --- 위와 동일 ---이런 성공은 서양인의 지적 입맛을 키워준다. 그런데 이런 입맛은 더 많은 관성과 자극을 요구한다. 따라서 국내에서는 비굴하다가도 서양인 앞에만 가면 입에 브레이크가 고장났는지 메가폰을 향해 헛소리를 쏟아낸다. 서양에서 굴러먹은 지 오래여서 전문적인 하소연법을 알고도 남는다. 거기에 약간의 우아함도 곁들일 줄 안다. 이를테면 서양인이 좋아하는 불주佛珠를 걸거나 묘족苗族의 그림을 가지고 나온다. 여기서는 문혁 때 온 집안이 붙잡혀가 몰살당했다고 말했다가, 또 저기 가서는 골동품점에서 사온 수제꽃신을 품속에서 꺼내들고 할머니의 유물이라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도 한다. 그들은 서양인들이 고기와 맥주로 포식한 후의 럭비게임이나 오토바이 경주를 보듯 수제 꽃신을 들여다본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충분한 중국 경험이 없는 그들이 진위를 변별할 수 없다는 것을. --- 위와 동일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보면 캄푸치아(캄보디아의 구칭)를 원조하던 백인들 사이에서 격렬한 내분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영어를 알아듣는 프랑스 인들이 고집스레 영어를 거부하고 많은 시간을 들여 다중언어로 협상을 진행함으로써 영어 헤게모니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설가의 익살만은 아니다.---위와 동일 ---이 노란 금지선 앞에서 ‘국가’ 혹은 ‘국가의 쇠망’을 이해해보자. 이번에 나는 한국 서울의 어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입국했다. 대체로 노란 금지선을 순조롭게 넘었다. 회의 주제는 ‘동아시아의 정체성을 찾아서’였다. 재미있게도, 주제는 ‘동아시아’인데 참석한 모두가 서양 음식을 먹고 서양식 호텔에서 묵었다. 이런 일상적인 광경은 대체로 딜릭 선생이 말한 ‘토착화된 전지구화’를 적절히 은유한다. 회의석상에서 적지 않은 훌륭한 발언들이 있었다. … 20세기 역사 속에서 중국 지식계는 ‘동서비교’를 습관적으로 ‘중서비교’라고 말해왔다. 대중화주의의 거대한 꼬리를 숨기기 어렵다. 이런 정황 속에서 백영서는 다음과 같은 의혹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중국에 ‘아시아’가 있는가? ---국경의 이편과 저편---아리프 딜릭, 백영서, 러셀을 읽는다 ---묵자와 그 추종자들은 대체로 우리 지청과 같았다. 들판의 잡초처럼, 거친 옷에 밧줄로 허리를 동여맸고 피부엔 살점이 허벅지엔 솜털이 없었다. 그뿐인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상처투성이였다. 날이면 날마다 산에서 땔감을 캐거나 밭에서 벼이삭을 줍는 그들에게 용모가 대수였겠나? 땀냄새 물씬 나는 곳에서 생활하면서 이 검은 사내는 많은 병서와 노동서를 썼고 역학, 광학, 기하학에 관한 체계적 지식들을 엮어냈다. 명실名實, 이동異同, 지조 등의 문제에 대한 논리분석 역시 한동안 대통이 끊겼지만 후세 명가名家의 원조가 되었다. 동시대 사람들은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실로 비범한 인물이었다.---묵자---묵자를 읽는다 ---전자매체 기술은 이미 많은 신종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를테면, 문화의 거대한 지역성이 약해지기 시작했어요. 예전에 중국 문화는 영국 문화와 많이 달랐는데, 이제는 중국 아이든 영국 아이든 똑같은 옷을 입고, 중국 어머니든 영국 어머니든 똑같이 아이들이 종일 컴퓨터게임에 매달리는 걸 걱정합니다. 아이들에게 하는 잔소리도 똑같고요. 동시에, 문화의 세대차이는 점점 증가합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의 상용어를 못 알아듣고, 동생은 형이 좋아하는 음악을 모릅니다. 이런 상황은 옛날에는 상상도 못했죠. 다시 말해, 전자문화의 전파력이 강하고 파급범위도 넓어서 공간의 벽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시간의 벽을 세웁니다. 기존의 문화연구가 ‘영국 문화’, ‘중국 문화’, ‘후난 문화’, ‘쟝수 문화’ 같은 공간 획분에 주의했다면, 이제는 ‘80년대 문화’, ‘90년대 문화’, ‘구九삼대 문화’, ‘신新삼대 문화’ 같은 데 주의해야 할 거예요. 사회과학원도 지금까지 ‘영국 연구소’, ‘프랑스 연구소’가 있었다면, 이제는 ‘80년대 연구소’, ‘90년대 연구소’ 같은 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기호: 문화의 게릴라전인가, 문화의 유희인가---그람시,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읽는다 ---저는 현대인의 생활이 풍요로워지기는커녕 나날이 빈곤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졸업하면 대학을 가고 그리고 넥타이 매고 사무실에 나가면서 평생 책이랑 컴퓨터랑 씨름합니다. 가장 최신 유행의 기어와 나사못, 아니면 기껏해야 지식확성기나 지식복사기가 될 뿐이죠. 대출 받아 집 사고 돈 벌어 차 사고 결혼해서 애도 낳고 싶어합니다. 인생궤적이 그렇게 정해져 있는 거죠. 지금 엘리트들의 성공한 생활이라는 게 이렇게 유형화되어 있습니다. 현대인은 옛 고인처럼 ‘만 권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걸어’ 자유롭게 이 세계를 해석하기 어려워졌습니다.---위와 동일 ---영어를 말하는 국가 중 부자나라가 많아요. 특히 미국은 구매력이 강해서 일당 백, 일당 만이죠. 그러니 정보산업 시장에서 매력이 있죠. 대량의 영어 소프트웨어가 만들어지는 건 아주 당연합니다. 셋째로, 영어는 그 운용범위가 확대되면서 민족과 문화를 초월한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화성이 약해지고 도구성은 증가했어요. 간단하게 배우기 쉽고 규범 활용도 쉬워서 인문위기, 경제발달의 시대에 아주 적합합니다. 지금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영어가 있어요. 필리핀 영어, 뉴질랜드 영어, 인도 영어, 남아프리카 영어, 미국 흑인영어 등등, 서로 다 다릅니다. 영어는 그 최대 공약수를 취해, ‘월경적’ 영어가 되었죠. 이미 원래의 영어가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영어의 소스를 빌린 준세계어죠. 영어의 간화簡化 버전이랄까요. 어떤 프랑스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에게 말하기를 ---영어가 어떻게 언업니까? 도구죠라고 했는데, 아마 그런 뜻인 것 같아요. 그런 극단적인 발언에야 동의하기 어렵지만, 문화로서의 영어는 도구로서의 영어와 분명 다릅니다. 그런 최대공약수 식의 영어, 그런 세계적·도구적 영어는 오랜 시간 동안 강세를 지킬 것이고, 나아가 약소언어들을 무참하게 궤멸할 겁니다. 리루이는 ‘영어제국주의’라는 말을 했는데 그런 수사에도 일리가 있습니다.------언어: 도구성과 문화성이라는 양 날개 ---일반적으로 소어종 문화는 쉽게 양극화됩니다. 쇄국을 하거나 소실되어 동화되거나입니다. 지금 영어가 소어종들을 하나씩 먹어가고 있죠. 하지만 대어종 문화는 규모가 방대하고 내부에 광활한 번역과 출판 공간이 있습니다. 쇄국하기도 쉽지 않고 동화도 잘 안 됩니다. 외래문화의 강력한 충격을 받아도 문화변천과 재생이라는 장구한 과정에서, 결국 나도 아니고 남도 아닌, 또 나이기도 하고 남이기도 한 것으로 변하게 되죠. 이건 정상적인 문화의 진화입니다. 인류의 문화를 건설하는 데 좋은 일이지 나쁜 게 아닙니다. 인류문화는 상호교류와 다양성을 원합니다. 다양성은 교류의 전제이죠 ------언어: 도구성과 문화성이라는 양 날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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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0여 년의 시간 속에 쓰여진 글들이지만, 지금도 유효한 문제의식과 이제는 문제의식조차 빈약해진 우리의 문학계에도 큰 울림이 있는 글들이다. 또한 사회주의체제 중국이 실제로는 최대의 번역대국이라는 점(국내의 출판상황은 별개로 치자면), 동서양의 수많은 고전들, 문제작들을 읽으며 작가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존재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한국과 중국은 제도와 발전 경로는 다르지만 서로 이웃사촌간이다. 전통을 공유하고 있고 전지구화·정보화 시대의 각종 지적 난제에 함께 맞서고 있으니, 졸업 후 다시 만난 동창이자 이별 후 재회한 반려다. 당연히 서로 돕고 의지하여 사상을 공유해야 한다. …한국독자들의 비판과 가르침을 기다리며, 이웃나라 중국의 사상적·문화적 현황을 이해하는 데 이 책이 작은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이제라도 우리 시대의‘거인巨人’중 하나가 한국에 번역된다는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왜 중국문학 관련 연구자들은 그에게 아낌없이 ‘거장’ ‘명저’라는 찬사를 바치는가. 모옌이 북방의 작가라면, 한샤오궁은 남방의 작가다. 그러나 그는 후난의 작가도 중국의 작가도 아닌 세계적 작가다. 그의 작품들은 이미 수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2000년에 출간된 『산상의 소리』는 그해 프랑스 독자들이 선정한 ‘10대 도서’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2년 프랑스 문화부는 그에게 문예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한샤오궁은 우리 시대 대표적 ‘거인’ 중 하나다. 그가 태어난 1950년대 초반은 동아시아에 냉전의 기류가 고조된 때였다. 한반도엔 한국전쟁이 휩쓸고 중국엔 대약진운동의 구호 속에 사회주의의 승리가 높이 구가되던 때. 또한, 우리가 미국의 원조와 새마을운동을 통해 자본주의 진영의 중진국 단계에 진입하고 있을 때, 그들은 문화대혁명이라는 극좌의 급류를 버텨내고 있었다. 마침내 탈냉전시대가 도래하여 자본주의·신자유주의의 전지구적 동질화가 급속화하면서, 오랫동안 각자의 길을 걸었던 두 나라가 한 길목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인접해 있지만 너무도 다른 현대사를 거친 사회의 지식인이 쓴 독서일기가 지금 우리에게 공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에서 저자가 겨냥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격정이 휩쓸고 간 자리, 포스트모더니즘의 폐허 위로 추락한 인성이며, 열정이 사라진 시대의 문화다. 1980년대 중국 지식계가 밀란 쿤데라에게서 사회주의 독재에 대한 비판만을 읽어냈을 때, 한샤오궁은 그 속에서 대중의 키치 본능에 대한 조롱과 혐오를 보아냈고 그것이 묵살된 채 쿤데라가 포스트모던한 기호로 ‘가볍게’ 소비되는 문화 풍조를 질타했다. 체 게바라나 밀로반 질라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돌이켜보면, 한국 독서시장에서 쿤데라나 게바라는 어땠는가. 현재 문학이 죽어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문학의 뿌리를 찾자! 현재 소설이 죽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독자가 죽어가고 작가가 죽어가며 인간의 영혼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개방 이래, 중국의 작가와 인민은 철저하게 서로를 배반했다. 인민은 화려한 매체에 현혹되어 문학에 등을 돌렸고 작가들은 신념과 이상을 자본에 팔아넘겼다. 이런 시대, 산문은 죽어가는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을 정신의 요람이다. 문화가 상품이자 기호로 한없이 가벼워진 이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그는 묵묵하게 문화의 ‘뿌리’를 찾아나선다. 이 책에 수록된 「문화의 ‘뿌리’」(1985)는 당시 서구문화이론을 탐식하는 데 여념이 없던 중국문화계에 발신한 선언적 강령이다. ‘문학의 뿌리를 찾자!’ (서구가 아닌) 중국 전통으로부터 현대로 가는 길을 찾자는 이 주장은, 지금 보면 5.4신문화운동, 사회주의 30년, 그리고 문화열까지 지난 100년 동안 반(反)전통주의로 일관해 온 중국현대문화의 주류에 대한 도전이자 문제제기다. 그의 문제작 「빠빠빠」(1985), 『마챠오사전』(1995) 들에서 보이는 후난 방언에 대한 천착은, 단일한 언어체계로 환원되지 않는 원시적 다성성(多聲性)의 세계를 펼쳐보임으로써 중국 문화의 거대한 중심부를 교란하는 게릴라전이다. 소설에서 보여준 그런 실험적 시도에 대한 밑그림과 해설은 이 책 곳곳에도 상세하게 드러나 있다. 물론 그가 말하는 ‘뿌리’는 유교적 전통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규범적 질서로부터 비껴나 신화와 무속, 이단으로 충만한 민간의 세계이며, 한샤오궁에게 그곳은 후난의 농촌이다. 초나라 굴원이 광인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울부짖다 멱라강에 투신해 죽은 바로 그 언저리. 그는 거기서 태어났고 문혁 땐 그곳 농촌에 하방되어 지청(知靑) 활동을 했다. 한샤오궁에게 후난은 창작의 수원水源이며 영원한 고향이다. 그리고 그는 현재 그곳으로 들어가 집을 짓고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