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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문 - '小說'하기의 앓음다움'에 부처/김진수 (문학평론가)
1. 두 집 사이 제4의 늙은 兒孩 얘기 2. 두 집 사이 제5의 늙은 兒孩 얘기 3. 두 집 사이 제6의 늙은 兒孩 얘기 4. 두 집 사이 제7의 늙은 兒孩 얘기 5. 混紡된 상상력의 한 형태 1 童話에서 神貨를, vice versa 6. 混紡된 상상력의 한 형태 2 風聞에서 現實을, vice versa 7. 混紡된 상상력의 한 형태 3 相에서 性을, vice versa 8. 混紡된 상상력의 한 형태 4 寓話에서 天機를, vice versa 9. 영합(迎合), 이냐, 순제(殉祭)냐 10. 순제(殉祭)냐, 순난(殉難)이냐 해설 - 바르도에서의 여행, 그것의 꿈꾸기/김명신 (문학평론가) |
朴常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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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유토피아나, 위대한 사회를 살기에 걸맞도록 사람을 지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끝없이 투쟁하도록 지은 것일 것이라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사람을 그렇게 설계하기 위해, 신은 뭘 끙끙대고 고심했어야 할 필요도 없었음이 분명한게, 그가 사람의 코에다 '숨'을, 또는 그의 '뜻'을 불어넣고 있었을 때, 그 '뜻'을 '욕망'의 모양으로 슬쩍 바꿔놓기만 했으면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밑에 구멍 뚫린, 저 '욕망'의 주머니를 뽑아내보라, 그러면 유토피아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알게 될 것을,....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인세의 종말이기도 할라.)
--- p.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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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빙충맞은 소리를 했던(그것이 빙충맞을 소리가 아니면 뭣이겠는가. 인용된(번역된) 대로 따진다면, '생각'하기나 '존재'하기에 '앞서' '나'가 있었으며,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고 고쳐 말한다면, 생략된 주어 때문에, '누가'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인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까닭에 주어를 세우기로 하면, 처음 말하던 그 모순 당착에 다시 떨어지고 마는 비극이 있다. 언어란 개좆같이 빙충맞은 것이구나, 오줌을 누려고 한 다리를 쳐들기로 하면, 태어날 때 세 다리의 개는 없으니, 의젓해서 신사 같으나 개는 아니며, 다리를 쳐들지 않으면 개 같아도 오줌이 다리를 적신다), 어떤 선노의 이 늙은 사미는, 생각이 이만쯤에 이르렀을 때, 이를 간다고 부드득부드득 갈았는데, 이빨이 없는 잇몸들끼리 부딪치는 데서는 얄궂은 소리가 나고, 거품이 일었다. 하여튼지 간에 생각하고 있는 이상 늙은네는 살아 있다. 그리고 살기는 빙충맞게라도 이어진다.
---pp. 52~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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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되지 않는 아름다움, 매혹적인 경전
데뷔작 「아겔다마」에서부터 줄기차게 인간 존재의 문제를 죽음의 관점에서 탐구해온 박상륭의 『잠의 열매...』는, 거대하고 드높은 박상륭 문학의 ‘새로운 지도’라 평가받은 바 있는 『평심』 이후 삼 년 만에 내놓는 작가의 네번째 소설집이다. 「두 집 사이」 연작 네 편과 「混紡된 상상력의 한 형태」 연작 네 편, 그리고 「영합(迎合)이냐, 순제(殉祭)냐」 「순제(殉祭)냐, 순난(殉難)이냐 」 등 총 열 편이 실린 이 소설집에서 역시 박상륭 문학의 진면목은 그 빛을 잃지 않는다.
한 노인네가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공원을 산책하면서 행하는 몽상과 상념으로 이루어진 「두 집 사이」연작에서, 그 몽상과 상념이라는 것은 박상륭 문학의 핵심적 주제인 ‘전체에의 체험’ 혹은 ‘무(無)에의 긍정적 체험’의 전개에 다름아니며, 「混紡된 상상력의 한 형태」 연작 역시 제목에서 이야기하는바, 동화(童話)에서 신화(神話)로, 풍문(風聞)에서 현실(現實)로, 相에서 性으로, 우화(寓話)에서 천기(天機)로 이어지는, 혹은 넘나드는, 아우르는, '그 무엇'이다. 박상륭의 소설은 종교와 신화가, 거기에 다시 동화와 현실이 섞여들듯, 말 자체가 하나로 묶인다. 그의 소설에서는 '몸'과 '말'과 '맘'이 하나로(뫎), '장소'와 '사물'이 하나로(고 ), '고통'(앓음)과 '아름다움'이 하나로(앓음다움) 엮인다. 이러한 기호들을 비롯한 해독하기 힘든 그의 작품은 그러나, 아름답고 넓어, 우주를 품고도, 우주를 낳고도 남는다. 박상륭 문학이 제시하고 있는 비전은 매혹적이다. 그것은 죽음의 길, 그 고통스럽고 참혹하며 낭자한 ‘몸’과 ‘말씀’의 길이지만, 그의 문학은 기어코 삶과 생명에 대한 사랑을 끌어안는다. 삶과 삶의 터전인 이 대지는, 죽음을 선고받은 처형지, 다시 말해 성욕(창조력)과 죽음(파괴력)의 길항인 ‘상극적 질서’의 격전장이 아니라, 생명을 축복하고 사랑을 찬미하는 존엄성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고뇌의 뿌리인 육신이 다름아닌 신생의 자궁이 된다는 인식이다. 그의 문학은 ‘생명에 대한 사랑’이라는, 인간에게 던져진 이 유일한 가능성에 대한 치열한 탐구인 것이다. 작가에게 '小說하기'가 '앓음다운' 만큼 그의 소설은 읽기(혹은 읽어내기) 역시 앓음답다. 종교와 신화를 아우르는 우주적인 상상력, 그 장대한 스케일, 생명과 존재의 비의를 파고드는 치밀한 사유와 논리, 그리고 화려하면서도 정교하고 정확한 그의 문체는 읽어내기조차 쉽지가 않지만, 그의 소설, 기호와 글자들, 그리고 행간을 읽어내려 애쓰는 동안 어느새 독자는 그의 소설 속에 흠뻑 젖어들게 된다. 박상륭에게 소설은 여러 이질적인 담론들이 공존하는 ‘잡설(雜說)’이다. 여기서 잡설이란 이야기 내용의 잡스러움과 또한 이야기를 하는 방법의 잡스러움을 모두 뜻한다. 하나의 이야기에 여러 다른 이야기들이 마구 끼어든다. 때로 끼어든 이야기들이 주이야기를 훨씬 능가한다. 그 여담들은 소설에 관한 메타적인 담론, 종교적 담론, 혹은 의학적 담론 등으로 그 종류도 다양하다. 여담이 끼어드는 방식 또한 다양하다. 가장 흔히 사용되는 것은 괄호의 사용인데 한 문장 속에 중괄호 대괄호를 겹쳐놓기도 하는 이러한 장치는 작가의 말을 자연스럽게 한 분야에서 그것을 보충한다는 구실하에 다른 담론으로 이동하게 만든다. 그러나 문제는 한 소설 속에 여러 담론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질적인 담론들이 아무 거침없이 서로 뒤엉켜 있다는 점이다. 그의 말의 배설물들은 독자들을 당황하게 할 만큼 낯설고 기이하다. 그것은 소설적 서사가 갖는 일상적인 상상력의 경계를 파괴한다. 무너져버린 상상력의 경계, 동화와 신화, 풍문과 현실, 우화와 천기로 이어지고 뛰어넘는, 작가의 小說하기만큼이나 '앓음다운' 그의 小說을 읽는 즐거움은 역시 그 상상을 뛰어넘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