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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과백서 상
태조~인조 양장
송준호 ,송만오 공편저
삼우반 2008.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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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머리말
일러두기

태조대의 문과
정종대의 문과
태종대의 문과
세종대의 문과
문종대의 문과
단종대의 문과
세조대의 문과
예종대의 문과
성종대의 문과
연산군대의 문과
중종대의 문과
명종대의 문과
선조대의 문과
광해군대의 문과
인조대의 문과

저자 소개

저자 : 송준호(宋俊浩, 1922-2003)
1922년 전주 출생. 1950년 동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1954~87년 전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1987~97년 원광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지냈다. 1964~66년과 1972~74년, 1997~99년에 걸쳐 하버드 대학교 객원교수와 연구교수를 지냈으며,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 《李朝 生員進士試 硏究》(국회도서관, 1970)와 《朝鮮社會史 硏究》(일조각, 1987)가 있으며, 조선시대의 과거 제도 및 韓中 양국의 전통사회를 주제로 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조선조 500년간의 지배 엘리트 10만여 명에 대한 자료 연구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 신분제 강화설을 주장함으로써 壬亂 이후 신분제가 해체되기 시작했다는 기존의 통설을 유지해온 학계에 일대 충격을 던진 그의 학문적인 입장은 《한국사 시민강좌》 제11집(1992)에 수록된 “나의 책을 말한다”에 잘 요약되어 있다.

특히 그가 하버드 대학의 와그너(Edward W. Wagner) 교수와 평생에 걸쳐 학문과 우정을 나누며 공동으로 작업한 “Wagner-宋 朝鮮文科榜目” 프로젝트는 한국학계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남아 있다.
저자 : 송만오(宋萬午) songcop@hanmail.net
1959년 송준호 교수의 3남으로 전주에서 출생. 원광대학교 한문학과와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사, 전남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한국 近代化에 있어 中人層의 역할》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주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교수로 재직하면서,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실상과 지방 근대화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譯官 高永周와 그 형제들의 개화활동에 관한 일고찰”, “使譯院完議에 대하여”, “조선 후기 頭民에 관한 몇 가지 검토”, “고문서를 통해서 본 全北 淳昌 蘆洞韓氏의 역사”, “1920년대 井邑地域 靑年會의 조직과 활동” 등이 있다.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08년 04월 24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516쪽 | 1138g | 188*254*35mm
ISBN13
9788990745309

관련 자료

문과 시험이 치러지는 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 중에는 흥미롭거나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많은데, 그 몇 가지 경우를 들어본다.

- 양인 신분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지만...
정부 관리를 선발하는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은 원칙적으로 양인(良人) 이상의 신분이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다. 조선 초기 태종(太宗) 8년(1408)에 있었던 다음과 같은 일화가 그러한 원칙을 보여준다.

“이번 생원시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었다. 즉 생원시에 응시한 사람 중에 金寬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러나 그의 신분이 寒微하여 三館, 즉 成均館, 藝文館, 校書館에서 그의 응시를 막았다. 이에 김관이 大駕 앞에 꿇어앉아 “臣은 善州 사람입니다. 지금 三館에서 臣의 祖系가 卑賤하고 寒微하다 하여 쫓아냅니다.”라고 호소하자. 왕은 그를 불쌍히 여겨 “이 사람의 祖系가 만일 良賤을 辨明할 정도가 아니거든 赴試하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즉 김관이 천민만 아니라면 시험에 응시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의 과거에 양인 이상의 신분이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그러나 김관은 합격하지 못한다.” (본문 23-24쪽 No. 007. 太宗 08年(1408) 戊子式年榜에서)

이 사례는 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이지만, 이러한 원칙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조선 500년 역사를 통하여 양인 신분의 응시자가 문과에 급제한 사례는 극히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요컨대 중국의 경우와는 달리 조선시대의 문과는 신분 이동의 통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 과거시험의 스타! 이석형(李石亨)과 이이(李珥)
세종대의 인물이었던 이석형(李石亨, 1415-1477)은 그야말로 과거시험의 스타였다. 그는 세종 23년(1441)에 실시된 생원시와 진사시, 그리고 문과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하는 쾌거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후로 그는 ‘삼장원(三壯元)’이란 호칭으로 불리게 된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최초의 과거 그랜드슬램을 이룩한 셈이다. 이석형에 대해 이 책의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번 문과에서 장원을 한 李石亨은 급제와 함께 司諫院 左正言으로 임명되고 承議의 階資를 제수 받는 등의 파격적인 인사가 있었는데, 이는 그가 이번에 실시한 生員試와 進士試 그리고 문과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한 까닭이었다. 이석형에 관하여 MK[국조문과방목]에 나와 있는 설명을 보면, “我朝生進俱魁 惟公及裵孟厚金絿三人 而公則又魁同年文科 盖國朝一人也”라고 나와 있다.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모두 장원을 한 사람은 이석형과 裵孟厚 그리고 金絿 세 사람 뿐인데, 그 중에서 이석형은 또 문과에서도 장원을 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본문 58쪽 No. 026. 世宗 23年(1441) 辛酉式年榜에서)

이석형을 능가하는 또 다른 과거시험의 스타로서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소과와 대과 및 별시의 초시, 복시, 전시를 통틀어 모두 9차례의 시험에서 장원으로 합격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그는 명종 19년(1564)의 식년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선다. (본문 268쪽 No. 163. 明宗 19年(1564) 甲子式年榜 참조)

- 오자등과(五子登科)
선조 때의 인물인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 1553-1602)은 아들 8명 중에 5명을 문과에 급제시킨다. 이 책의 문과 급제자 명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아들 김연조(金延祖)가 광해 4년(1612) 임자식년방(壬子式年榜)에 급제하고, 같은 해에 치러진 임자증광방(壬子增廣榜)에 김영조(金榮祖)가 급제한다. 이어 김봉조(金奉祖)가 다음해인 광해 5년(1613) 계축증광방(癸丑增廣榜)에 급제한다. 그리고 인조 1년(1623) 계해알성방(癸亥謁聖榜)에 김응조(金應祖)가, 마지막으로 인조 7년(1629) 기사별시방(己巳別試榜)에 김숭조(金崇祖)가 급제한다. 이 책은 “No. 270. 仁祖 07年(1629) 己巳別試榜”에 대한 해설에서 “이번 별시 급제자 중 金崇祖는 그의 다섯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한 경우이다. 다섯 형제란 金奉祖, 金延祖, 金榮祖, 金應祖, 金崇祖를 말한다.”(본문 462쪽)라고 적고 있다.

조선 중기의 선비였던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도 아들들 교육에 힘썼다. 그의 세 아들은 문과에 급제했고, 두 아들은 소과 급제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김진의 집을 두고 다섯 아들이 과거에 급제한 집이라는 뜻으로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김진은 나중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을 이 책의 명부를 통해 확인해 보자. 명종 1년(1546) 병오증광방(丙午增廣榜)에 김극일(金克一)이, 선조 1년(1568) 무진증광방(戊辰增廣榜)에 김성일(金誠一)이, 선조 3년(1570) 경오식년방(庚午式年榜)에 김복일(金復一)이 급제한 것을 알 수 있다.

- 특정인을 급제시키기 위해 규정을 무시한 명종
“No. 101. 明宗 08年(1553) 癸丑別試榜”에는 과거 시험을 통해 스승을 은혜에 보답하는 명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이번 별시는 명종의 친경(親耕)을 기념하여 마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전까지 실시된 151회의 문과 시험 가운데 가장 많은 급제자를 배출했다. 이전에는 증광시에서 간혹 40인을 선발한 경우가 몇 차례가 있었을 뿐 별시에서 33인 이상을 선발한 예는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41인이나 되는 많은 급제자를 선발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이번 별시가 유생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특별히 마련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사실 명종이 친경을 거행한 것은 별시를 베풀기 위한 명분일 뿐이었으며, 진짜 목적은 양종(兩宗)과 선과(禪科)의 복설 등으로 인해 저하된 유생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하여 좀 더 많은 급제자를 선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더 큰 이유가 사실은 따로 있었다. 명종이 신희복(愼希復)이라는 사람을 급제시키기 위하여 규정을 무시하고 마땅히 떨어뜨려야 할 10인을 더 급제시킨 결과 이번 별시의 최종 급제자의 수가 41인이나 된 것이다.

신희복은 명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사부를 지낸 자이다. 그는 이번 별시에 응시하여 급제를 받았으나 원래는 낙방해야만 했던 사람이다. 그것은 신희복이 작성한 전시의 시권(試券)이 次中의 성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은 上上, 上中, 上下, 二上, 二中, 二下, 三上, 三中, 三下, 次上, 次中, 次下 순으로 채점되며 이 중 次上 이하는 급제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명종은 신희복을 급제시키기 위하여 次中과 次上의 성적을 받은 사람까지도 모두 급제자 명단에 포함시키라고 지시하는데, 그 수가 10인이나 되었다.

명종이 규정을 무시하고 10인을 더 선발하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그 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법규대로 三下 以上의 성적을 받은 31인의 급제만 인정하고 次上과 次中의 성적을 받은, 그러니까 당연히 탈락시켜야 하는 10인의 이름을 방목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명종은 양사(兩司)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방방(放榜)을 마친 후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신희복의 급제를 취소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본문 248-249쪽)

- 문제 유출, 바꿔치기, 친지 부정 합격, 시험 취소...
조선시대 문과에서도 온갖 부정이 저질러졌고, 그 결과로 심지어 시험 자체가 무효화되고 급제자 전원의 합격이 취소되는 사태가 일어나기까지 했다. 문과에서 발생한 온갖 부정비리에 연루된 가장 악명 높은 인물을 꼽자면 단연 이이첨(李爾瞻, 1560-1623)이 아닐까 한다. 선조 27년(1594)의 문과에서 급제하고 이후 종종 시관(試官)으로 나선 이이첨은 시험 문제를 사전 유출하고 답안지를 바꿔치기하는 등의 수법으로 자식들은 물론 주변 지인들까지 부정 합격시키는 일도 당시에도 유명했다고 한다. (본문 394-5쪽 No. 239 光海 08년(1616) 丙辰謁聖榜 참조)

시관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친지들을 합격시킨 사실이 드러나 시험이 무효화되고 급제자 전원의 급제가 취소된 일도 있었다. “전시(殿試)에서는 16인을 선발하였는데, 그러나 최종 합격자 명단이 발표되자 여기저기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시관들이 부당한 방법으로 자신의 아들 및 조카들을 합격시켰던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수권관(收券官)이 과장을 떠난 이후에 답안지를 제출한 경우도 있었다. 시관들의 사정이 개입된 셈인데, 그래서 사람들은 이번 별시를 “자서제질방(子壻弟姪榜)”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전시에서 부정이 개입된 정황이 밝혀지자 간원들이 시험을 취소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전시는 파방되고 전시 시관들이 모두 파직 당하고 만다.” (본문 440-1쪽 仁祖 04년(1626) 丙寅別試榜에서) 그런데 이때 급제가 취소된 16인 가운데 13인은 이후의 문과시험에서 다시 급제하기에 이른다.

출판사 리뷰

이 책의 개요와 편저자
이 책의 편저자인 宋俊浩 교수는 평생의 지우이자 미국 내 한국학 연구의 권위인 하버드 대학의 와그너(Edward W. Wagner) 교수와 공동으로 모든 문과 급제자와 생원진사시(生員進仕試) 합격자 및 그 친인척 등 10만여 명의 생몰 연도, 본관, 출신지, 거주지, 최고 관직, 인척 관계 등의 정보를 종합하는 “와그너-송 조선문과방목(Wagner-宋 朝鮮文科榜目)”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1966년부터 30여 년간 진행된 이 작업은 그러나 그 완성을 앞두고 와그너 교수가 2001년에, 그리고 송준호 교수가 2003년에 각기 타계함으로써 중단되었다.

이 책《조선시대 문과백서》는 송준호 교수의 3남인 宋萬午 교수가 그 유업을 이어 “와그너-송 조선문과방목”의 후속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부친 송준호 교수가 평생에 걸쳐 정리한 역대 문과 급제자 14,607명의 성명과 본관(本貫), 거주지, 부명(父名) 등 신상 정보를 제시하고 748회 문과시험 각각에 대해 그 실시 시기와 실시 배경, 출제 문제 및 관련 사건을 해설한 노작이다. 방대한 분량의 “와그너-송 조선문과방목”의 축쇄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조선시대 문과백서》는 상/중/하 전3권으로 출간될 예정이며, 상권인 이 책은 (관련 기록이 남아 있는) 태조 2년(1393)부터 인조 27년(1649)까지 250여 년 동안 치러진 300회 시험에 대한 해설과 급제자 5,729명의 신상 정보를 수록하고 있다.

이 책의 의의: 조선조 지배층 연구의 기본 자료이자 아이디어의 보고
지난해 7월 로스쿨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을 때, 많은 언론들은 한국 사회에서 정부 관리의 충원 방식이 고려 광종(光宗) 9년(958)에 과거제도가 도입된 이래 1,000년만에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과거제도는 정부 관리를 출신 신분이 아니라 실력을 기준으로 등용한다는 점에서 전근대 사회에서 시행된 가장 획기적인 제도로 평가받고 있으며, 세계사적으로 중국 및 베트남과 더불어 한국만이 시행했다는 점에서 한국사의 자랑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과는 대조적으로 고려시대는 물론이고 조선시대에 대해서도 과거제도 및 그 시행과 결과에 대한 연구는 의외로 활발하지 못한 것이 우리 학계의 현실이라고 한다. 하물며 전문 연구자들이 아닌 일반 독자들의 경우에는 과거시험이 어떻게 시행되었고, 시험에서는 어떤 문제가 출제되었으며, 어떠한 사람들이 급제하였고, 또 그 과정에서 어떠한 일화들이 일어났는지 등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책 《조선시대 문과백서》 전3권은 태조(太祖) 원년(1392)에 처음 시행되어 고종(高宗) 31년(1894)에 폐지될 때까지 조선시대 500년간에 걸쳐 748회가 실시되어 총 14,607명의 급제자를 배출한 문과 과거시험에 대한 각종 정보와 일화를 담고 있다. 748회 실시된 문과 시험이 매 시험별로 어떠한 정치적 사회적 배경에서 치러졌으며, 어떠한 문제가 출제되었고, 어떠한 출신 배경의 사람들이 선발되었고, 또 시험이 치러지는 과정에서 어떠한 주목할 만한 사건들이 일어났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전3권 중 상권인 이 책은 관련 기록이 남아 있는 태조 2년(1393)부터 인조(仁祖) 27년(1649)까지 250여 년 동안 치러진 300회 시험에 대한 해설과 급제자 5,729명의 신상 정보를 수록하고 있다.)

산재해 있는 개별적인 정보나 자료를 하나의 기준에 따라 총망라하여 편찬하는 작업은 그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만, 그 결과로 의외의 사실이나 의미가 밝혀지고 새로운 쟁점이 부각되기도 한다. 조선시대 500년간에 걸쳐 문과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과 인물을 종합 정리한 이 책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우선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문과 급제자 명단은 단순한 합격자 명단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와그너-송 조선문과방목”의 자료를 토대로 이 책에 수록된 명단에는 급제자의 성명과 본관, 거주지 및 父名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와그너 교수와 송준호 교수는 평생에 걸쳐 추진한 작업, 즉 급제자 개개인에 대해 일일이 기존 사료에서 잘못된 부분이나 빠진 부분을 바로잡고 찾아내 채우고 일련번호를 매긴 업적의 산물이다. 그 결과 문과 급제자들 가운데 동명이인(同名異人) 여부를 바로 확인할 수 있음은 물론, 두 번 이상 합격한 급제자들, 급제자들의 동기생 관계 및 지역적 혈연적 출신 배경 등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요컨대 이 책의 문과 급제자 명단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지배 계층의 인맥 지도를 정밀하게 작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 점에서 이 책은 조선조 지배층 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자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전문 연구자들만이 아니라 일반 독자들의 경우에도 이 책은 대단히 흥미로운 독서 대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명문가를 자부하면서도 자기 집안의 문과 급제자가 누가 있으며, 몇 명이나 되는지도 모르는 경우라면 이 책을 통해 그러한 의문을 해소할 수가 있으며, 그 조상이 당대에 어디에 거주하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도 새롭게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보학(譜學)적인 관심과는 별도로 이 책의 매 시험별 해설만 읽는 것으로도 ‘문과’시험이라는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조망하는 새로운 경험을 만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책은 전문 연구자들에게는 새로운 연구 주제를 착안하는 데, 그리고 일반 독자들에게는 역사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본다.

정기 시험보다 부정기 시험이 훨씬 많았다! 도대체 왜?
많은 자료를 종합하면 의외의 새로운 쟁점이 부각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이 책은 조선조 500년간에 걸쳐 치러진 문과 관련 정보를 총망라하고 있는 만큼 그 활용에 따라 앞으로 여러 가지 쟁점이 제기될 소지가 다분하다. 여기서는 이 책에 의거하여 새롭게 검토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중요한 한 가지 문제를 조선시대 과거제도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함께 소개하기로 한다.

조선시대의 과거에는 문과(文科, 혹은 大科) 외에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혹은 小科, 監試, 司馬試), 무과(武科), 잡과(雜科)의 네 종류가 있었고, 정기시(定期試)와 부정기시(不定期試)의 구분이 있었다. 정기시는 3년마다 한 번씩 실시하는 식년시만이 있었으며, 이 때 생원진사시, 문과, 무과, 잡과가 개설되었다. 그 중 문과의 예비 시험 성격인 생원진사시는 초시(初試), 복시(覆試, 혹은 會試) 두 단계로, 문과는 초시, 복시, 전시(殿試)의 세 단계로 시험을 치렀다.

한편 이 책의 본문에 자주 보이는 별시(別試)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인재의 등용이 필요한 경우에 부정기적으로 실시된 특별 과거를 말한다. 세자의 탄생 · 입학 · 관례 · 책봉, 임금의 친경(親耕), 부태묘(附太廟), 명나라 황제의 등극, 명 황태자의 탄생과 책봉 등의 경우에 실시하였으나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어 빈번하게 실시되기에 이른다. 식년시와 달리 문무과만 열고 생원진사시와 잡과는 개설하지 않았으며, 초시와 전시 두 단계의 시험에 의하여 급락(及落)을 정하였다. 별시는 또 넓은 의미로 식년시 이외의 모든 부정기시를 총칭하기도 하는데, 국왕의 즉위나 30년 등극을 기념한 증광시(增廣試)나 기타 알성시(謁聖試), 정시(庭試), 춘당대시(春塘臺試) 등이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 과거, 특히 문과에서는 부정기시인 각종 별시가 정기시인 식년시에 비해 빈번하게 설행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총 748회의 문과가 치러져 14,607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그중 식년시 문과는 160여 회 실시되어 6,000여 명의 급제자를 배출한 반면에, 각종 별시는 580여 회 실시되어 8,500여 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문과 실시 회수에 있어 정규 시험이 약 22%, 비정규 시험이 약 78%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급제자 수에서도 비정규 시험의 급제자가 2,500여 명 더 많은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부정기시가 빈번하게 치러진 점은 중국의 경우와 비교해 대조적이다. 명청(明淸)대 중국에서도 과거(조선의 문과에 해당하는 진사과)는 3년에 한 번씩이라는 원칙 하에 운영되었다. 그런데 명대의 경우 치세 270여 년(1368∼1644) 동안 진사과가 총 90회 실시되었지만, 비정규 진사과 설행은 단 1회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이러한 각종 별시는 어느 정도 설행의 예측이 가능한 증광시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지방 유생의 참여가 거의 불가능하거나 극히 어렵게 운영되었다. 사전에 충분한 예고 기간도 없이, 그리고 각 지역별로 실시하는 초시를 생략한 채 처음부터 서울에서 한두 차례의 시험으로 급제자를 선발하였기 때문이다. 원래 각종 별시는 국가에 크고 작은 경사가 있을 때마다 그 경사를 기념해 유생들을 위열(慰悅)한다는 명목으로 실시하는 이른바 ‘경과(慶科)’였다. 그런데 그 설행 배경에는 조정(朝廷) 기구를 통한 기존 관료들의 압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즉 문과의 실제 운영은 서울과 인근 지역에 기반을 둔 기득권 양반층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각종 별시가 거의 예외없이 그런 정치적 사회적 배경에서 설행되었다는 사실을 바로 이 책의 매 시험별 해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부정기 시험이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은 왕권(王權)이냐 신권(臣權)이냐 하는 오래된 문제와 관련하여 조선시대 국왕의 통치권이 양반관료층의 견제 하에서 대체로 허약했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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