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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남명학파 의병활동의 역사적 의의 ∥ 이수건(전 영남대학교 교수, 작고)
제2장 남명학파의 남명사상 계승 양상 ∥ 이상필(경상대학교 교수) 제3장 조선 중기 남명학파의 활동과 그 역사적 의미 ∥ 신병주(건국대학교 교수) 제4장 남명학파 성쇠과정의 정치사회적 특성과 사림의 동향 ∥ 박병련(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제5장 선조·광해군대 남명학파의 정치운영론 ∥ 설석규(경북대학교 교수) 제6장 조선 중기 남명학파의 학통강화운동과 정치사적 의미 ∥ 김강식(동명대학교 교수) 제7장 남명학파의 문학에 나타난 작가의식의 이중구조와 의미지향 ∥ 정우락(경북대학교 교수) 제8장 남명학파의 자득을 강조하는 교육 계승 ∥ 사재명(마산여고 교사) 제9장 남명학파의 서원건립운동 ∥ 송준식(한국국제대학교 교수) 제10장 남명학풍이 강우지방 교육문화에 미친 영향 ∥ 한상규(동주대학 교수) 제11장 남명사상이 후대에 끼친 영향 ∥ 박홍식(대구한의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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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은 말을 가리는 법이 없었다. 그의 글에 「민암부民巖賦」라는 것이 있다. 여기서 그는 백성을 물에, 임금을 배에 비유하면서 물은 배를 띄우는 것이지만 성난 물은 배를 뒤엎을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또 한 상소문에서는 당시 수렴청정 중이던 문정왕후를 구중심처의 과부로, 갓 즉위한 명종을 어린 고아로 부르면서 밝은 정치를 촉구하기도 했다. 가히 불경에 가까운 말들이다. 의義를 위해 죽겠다는 남명이었기에 가능한 말들이었다. 그는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만나면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직언하였으며, 일체의 공소한 논의들을 거부하고 오로지 유자로서의 올바른 몸가짐과 사회적 실천 문제에만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성은 그의 제자들에게로 이어졌다. 남명학파의 인물들은 스승의 정신을 이어받아 당시에 성행하던 고담준론에 관심을 주지 않고 오직 실천에만 힘썼다. 실제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일어나 의병을 이끌었던 경상우도의 의병장들은 거의가 남명 조식을 사사한 인물들이었다. 광해군 시대의 북인정권을 영도한 정인홍,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곽제우 등이 대표적인 남명문하의 의병장들이다. 남명사상의 정수는 ‘경의협지敬義夾持’라는 말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경敬과 의義를 한 몸에 지닌다는 뜻이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 가운데 ‘경’을 강조한 이들은 유학자들은 남명이 아니라도 많았지만‘의’를 강조한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유학의 실천성을 담보해 주는 ‘의’는 조선의 유학사에서 남명 조식과 그 문하생들에 의해 드디어 빛을 볼 수 있었다. 내 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기탄없이 직언하는 것도, 국가의 위기에 홀연히 떨쳐 일어나는 것도 모두가 ‘의’의 정신이 있기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남명학파는 조선시대 중기에 퇴계학파와 더불어 영남사림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던 학파이다. 정인홍, 곽재우 등이 보여 준 의병활동에서도 드러나듯이 남명학파의 실천적 정신은 조선시대 선비정신의 전형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면면히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역사에서 그들의 학문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광해군 시대를 이끌었던 북인세력이 인조반정과 더불어 패퇴하면서 남명학파 또한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북인정권의 리더인 정인홍의 과감하고 강직한 성격은 다른 한편으로 비타협적이고 독선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은 타 학파에 대한 억압으로 나타나 남명학파의 몰락을 더욱 부채질하게 되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추대하며 등장한 새로운 정권은 정인홍 등에 의해 정립된 남명 조식의 위상을 격하시키고 실록을 고쳐 쓰기도 하면서 이른바 숙정 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남명학파의 인물들은 『남명문집』을 재삼 개정하여 문제시되는 내용들을 수정하거나 삭제하기도 하고 퇴계학파나 율곡학파로 전향하기도 하는 등 다양하게 생존의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이런 와중에 남명사상이 온전하게 전해질 리는 없었다. 이 책은 남명학파에 대한 평가 속에 담긴 온갖 선입견과 정치적 색채 등을 지워 내고 그들이 있어야 할 온당한 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