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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지금, 여기, 행복을 짓는 사람
1 나는 차츰 나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과 고요에 익숙해졌다 2 나는 모든 물건을 손으로 더듬어 만졌고 모든 움직임을 관찰했다 3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과의 만남은 나를 어둠에서 빛으로 이끄는 다리가 되었다 4 사물의 비밀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내게 사랑을 주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 5 아직 탐험하지 못한 세상을 향해 내 감각을 쓰는 것이 한결 즐겁고 자신만만해졌다 6 이 아름다운 진리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7 이렇듯 살아 있는 일상이 교과서이자 학교였다 8 나는 춤을 추며 크리스마스 트리 둘레를 빙빙 돌았다 9 열차가 보스턴 역에 들어서자 내 앞에 아름다운 동화 속 나라가 펼쳐졌다 10 바다는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고 나는 얼이 빠질 만큼 매혹되었다 11 새롭고 아름다운 세계의 온갖 보물들이 발아래 펼쳐졌다 12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눈송이는 나리고 13 누군가 나를 대신해 말해주지 않아도 내 입을 통해 나간 말이 다른 이에게 전해지다니 14 행복의 절정을 맛보았으니 이제 추락할 일만 남은 셈이었다 15 박람회에서 보낸 3주를 통해 현실세계의 실제성과 진정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16 시간과 주제를 정해놓고 체계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17 청각장애자들도 보통 사람들이 누리는 모든 이점을 맛볼 수 있기를 18 볼 수도 들을 수도 있는 소녀들과의 경쟁에 뛰어들었다 19 대학에 들어가기까지의 온갖 난관과 장애물 20 아름다움과 빛을 향해 활짝 열린 신세계가 내 앞에 있었다 21 활자화된 모든 것은 그칠 줄 모르는 내 독서욕을 잠재울 한 끼 거리 식사였다 22 눈과 귀는 어둡지만 나는 온몸으로 내 주변 상황에 반응한다, 즉 나는 살아 있다 23 많은 뛰어난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는 것은 내 생애의 복된 특권이었다 |
Helen Adams Ke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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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펌프가를 뒤덮은 겨우살이 향기에 이끌려 오솔길을 걸었다. 누군가 펌프에서 물을 긷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물이 뿜어져 나오는 꼭지 아래에다 내 손을 갖다대셨다. 차디찬 물줄기가 꼭지에 닿은 손으로 계속해서 쏟아져 흐르는 가운데 선생님은 다른 한 손에다 처음에는 천천히, 두 번째는 빠르게 ‘물’이라고 쓰셨다. 선생님의 손가락 움직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나는 마치 얼음조각이라도 된 양 가만히 서 있었다. 갑자기 잊혀진 것, 그래서 가물가물 흐릿한 의식 저편으로부터 서서히 생각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돌아오는 떨림이 감지됐다. 언어의 신비가 그 베일을 벗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제야 지금 내 손 위로 세차게 내리꽂히는 이 차가운 물줄기가 ‘물’이라는 것의 정체임을 알았다. 살아 숨쉬는 낱말의 입맞춤을 받은 내 영혼은 긴 잠에서 깨어나 그가 가져다준 빛과 희망과 기쁨을 맛보았을 뿐만 아니라 비로소 자유를 찾았다. --- p.45
우리는 실내보다 야외에서 공부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어린 시절의 수업을 떠올리면 들포도가 내뿜는 향기와 뒤섞여 늘 솔내음이 묻어난다. 나는 야생 튤립 그늘에 앉아 세상 모든 것은 저마다 교훈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음을 배웠다. “사물은 그 유용성으로 하여 아름답다.” 윙윙거리고 붕붕대는 것으로, 한껏 지저귀는 것으로, 활짝 꽃피우는 것으로 제 몫을 다하는, 아닌 게 아니라 그야말로 자연의 모든 것이, 목청껏 울어대는 개구리며 내 손 안에 갇혀서도 기죽지 않고 새된 소리를 내는 여치며 귀뚜라미, 보송보송한 털로 뒤덮인 병아리, 들꽃과 활짝 피어난 층층나무 꽃 그리고 제비꽃과 과일나무, 이 모두가 내 수업의 소재요 주제였다. 나는 터치고 나온 목화열매를 어루만지고 부드러운 섬유와 솜털에 싸인 씨앗을 더듬는다. 옥수수대를 스쳐 나지막하게 불어오는 바람결과 긴 잎사귀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목초지에서 뛰놀던 망아지를 붙들어 입에 재갈을 물릴 때마다 녀석은 성난 몸짓으로 콧김을 내뿜었다. 아, 녀석의 숨결에 묻어 있던 클로버의 향긋한 냄새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 pp.61-62 한마디로 말해서 문학은 나의 유토피아요, 나는 그 나라의 당당한 국민의 한 사람이다. 내가 나의 유토피아인 책의 나라에서 내 친구들과 친교를 나누는 데에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내 육체적 장애 따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 친구들 또한 내게 말을 거는 일에 조금도 거북해하거나 당황해하지 않는다. 내가 배우고 깨달은 것이 무엇이든 그들의 큰 사랑과 자비에 견준다면 하등 중요치 않은 것들일 뿐이다. --- pp.192-1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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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지금, 여기, 행복을 짓는 사람 외부세계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감수성이란 녀석은 어쩌면 아이러니하게도 결핍을 먹고 자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 신문기사를 읽으면서도 ‘여기 또 나의 이런 생각을 확인케 해주는 풍부한 감수성의 소유자가 있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 ‘한 발의 디바’로 알려진 가수 레나 마리아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그녀는 우리가 흔히 사지(四肢)가 멀쩡한가 물을 때의 그 사지 가운데 단 하나만이 온전한 사람입니다. 두 팔은 없고 한 발은 짧답니다. 열아홉 살 때 세계장애인 수영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이름을 알린 그녀는 이후 스톡홀름 음악대학을 졸업하면서 본격적인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1988년 우리나라에서 열린 장애인 올림픽에 수영선수로 참가한 것을 계기로 이후 가수로서 한국을 방문한 것만도 벌써 일곱 차례나 된다는군요. 다음은 그런 그녀의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 자체가 내게는 즐거운 모험이에요. 나는 행복해지기 쉬운 사람이랍니다.” 아기의 탄생을 지켜보며 흔히 우리는 새로운 생명체의 사지가 멀쩡한지를 묻는 것으로 한 인생의 행, 불행을 가늠하려 드는 우를 범하곤 합니다. 탄생뿐 아니라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각종 사고며 질병을 겪게 될 때도 우리는 마찬가지 어리석음을 저지르곤 하지요. 참으로 다행인 것은 이런 우리의 어리석음을 바로 보고 꿰뚫어 깨닫게 해주는 스승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레나 마리아도, 그리고 여기 이 책 『헬렌 켈러 자서전』을 통해 소개될 헬렌도 한목소리로 말합니다.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곧 우리 인생의 행, 불행을 결정하는 척도입니다.” 어린 시절 한때 헬렌은 발성법을 배우기 위해 뉴욕에 머문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추억을 상세히 이 책에 남겼는데 그 내용을 보면 그녀의 감수성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녀가 머문 뉴욕 농아학교에서는 전교생이 날마다 센트럴 파크를 산책했나 봅니다. 헬렌이 뉴욕에서 가장 좋아했던 이곳, 센트럴 파크는 뉴욕 맨해튼 한가운데 자리한 공원으로 동서로 약 800미터, 남북으로 약 4킬로미터 정도의 넓이입니다. 물론 어마어마하게 큽니다만 9개월 동안 날마다 산책한다고 생각해보세요. 한 달을 30일로 잡아 270일 동안 날마다 센트럴 파크를 산책하는 셈이죠. 그렇게 가정했을 때 우리 각자의 감상은 잠시 접어두고 이쯤에서 헬렌의 감상을 들어볼까요? “넓디넓은 공원 어디 한 군데 즐겁지 않은 곳이 없다. 공원에 들어설 때마다 매번 듣는 거지만 늘 듣는 그 풍경묘사가 나는 참 좋았다. 어느 곳을 보나 아름다웠고 뉴욕에 머문 9개월 동안 단 하루도 똑같은 날, 똑같은 풍경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날마다의 각기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혹 오늘이라는 한 날이 여러분에게는 어제와 다를 게 없는, 내일이라고 해서 달라질 게 없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일상의 반복 가운데 단지 또 하루일 뿐이었나요? 이 글 첫머리에 말한바, 결핍을 영양분 삼아 무럭무럭 자라는 감수성이란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필요하고 또 중요한지 잘 알면서도 그러나 감히 ‘그러니 우리 이제 결핍의 자리에 가 서자’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여 여러분께 이 책 『헬렌 켈러 자서전』을 권합니다. 헬렌은 래드클리프 대학 2학년일 때 영작문 교수 찰스 타운센드 코플런드로부터 그녀가 사는 남다른 세상을 써보라는 권유를 받고 이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레이디스 홈 저널』이라는 잡지에 연재하는 것으로 발표되기 시작했는데 막상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내려니 편집에 어려움을 겪던 중 이를 딱하게 여긴 친구들이 하버드 대학 영어 강사이자 『유스 컴패니언』 편집자로 일하고 있던 존 앨버트 메이시를 소개해줘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헬렌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며 작업하기 위해 수화 알파벳까지 배워가며 편집을 도왔고, 이들 연재물은 헬렌이 대학 3학년이던 1903년, 더블데이 페이지 출판사에서 <내가 살아온 이야기(The Story of My Life)>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이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이 즐거운 모험이 되도록, 우리 모두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길잡이 역할을 훌륭하게 해주리라 기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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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의 삶, 그녀 자신의 기록
세상에 나온 지 열아홉 달 만에 시력과 청력을 모두 잃은 헬렌 켈러, 그녀는 설리번 선생님과의 만남을 계기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어둠과 고요의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펌프가야말로 긴 잠에서 깨어나 비로소 그녀의 영혼이 자유를 찾은 자리다. 사람들의 손과 입술을 더듬고 점자로 책을 읽으며, 그녀는 장애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탁월한 지성과 재치를 발휘하는 여성으로 성장했다. 대학에도 들어갔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삶을 최초로 정리한 것이 대학 2학년 때, 이 책은 바로 그 기록이다. 우리가 놓치는 세상의 비밀을 알려준 헬렌 켈러 헬렌 켈러를 모르는 이는 드물다. 어린 시절 한번쯤 아동용으로 요약한 전기를 읽어본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줄거리만 파악해서는 이 책의 장점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풍부하고 상세한 묘사가 가득한 글을 쓸 수 있는지, 두 눈 멀쩡히 뜨고도 볼 것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천지요, 두 귀가 잘 뚫렸으면서도 중요한 건 듣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인 이 세태에 헬렌 켈러의 존재는 그래서 더욱 눈부시다. 혹자는 헬렌 켈러의 책이 오직 타인의 눈?코?입?귀?손을 빌려 외부로부터 주입된 지식에 의해 쓰여진, 허구의 세계를 그리고 있을 뿐이라며 폄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잃어버린 감각 대신 촉각과 후각, 그리고 상상력과 영감이 그녀로 하여금 정상인들보다 훨씬 더 깊고 풍부하게 세상을 이해하게 만들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기에 더욱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다. 세밀화처럼 꼼꼼하고 섬세한 묘사는 그리하여 가능했다. 정상인이기 때문에 놓치고 지나가기 쉬운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과 신비를, 헬렌 켈러가 붙잡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과 자연과 세상에 대한 무한한 사랑 물론 헬렌 켈러는 세상 사람들이 그녀에게 붙여준 이미지처럼 동화 속 세상에 사는 아리따운 기적의 소녀로만 살지 않았다. 그녀는 장애인들의 대모요, 현실을 직시한 사회주의자였다. 20대, 아직 대학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헬렌이 쓴 이 책에서도 그 단초가 엿보인다. 그리고 후일 헬렌이 벌인 활동은 모두 인간과 자연과 세상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읽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