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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시간이라고 했다. 하늘과 바다에 잇닿아 세 시간이면 족히 닿을 수 있는 땅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가기까지 꼬박 스물여섯 해가 걸렸다. 떠나던 날의 흥분과 격정이 여전히 심장 한구석에 돌올한데, 세월은 매정했다. 가차 없었다. 소년은 청년이 되고, 청년은 장년이 되고, 장년은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는 노년의 삭은 몸이 되었다. 누구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지나버린 젊은 날을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애당초 후회를 모르는 천품이 애달프지 않다. 후회는 미련이다. 지난날 가졌던 것과 가지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어리석은 속셈이다. 처음부터 아무 것도 가진 것 없고 갖고파 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소용없는 주먹구구다. --- 본문 중에서
우리는 물러설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이들이었다. 싸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몸을 돌아 저항의 핏줄과 반역의 피톨이 굼틀거리며 흘렀다. 편안히 살지 못할 것이었다. 편안히 죽지도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 번연한 과정과 결과를 몰라서 남들이 피하는 험로를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대신 가라고 할 수도 없고 뒷전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볼 수도 없었다. 그 길 끝에 마침내 가고픈 그곳이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을 헤쳐 가야만 끝끝내 그곳에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 하지만, 하지만 이 세상에 나를 믿어주던 그이가 더 이상 없다면 나는 무엇을 푯대 삼아 달려야 하나. 무릎이 저리다. 아버지의 머리는 식은땀에 절어 쉰내를 풍긴다. 척척하다. 그래도 행여 내 무릎을 벤 아버지가 불편할까봐 엉덩이 한번 들썩 못한다. 곤한 잠에 빠져든 아버지의 표정은 한없이 평화롭다. 집요하게 괴롭히던 병마도 잠시 꿈자리를 비껴간 모양이다.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군입을 다시는 걸 보니 꿈속에서 감주라도 드시나. 나는 여태껏 아버지께 술 한 잔 안주 한 접시 사드리지 못했다. 이대로 아버지를 떠나보내면 영영 그럴 기회를 얻지 못할 테다. 굵은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아버지 콧등에 맺힌다. 그래도 아버지는 미간조차 찡그리지 않고 꿈결에 내 손을 더듬어 찾는다. 삭정이 같다. 겨울 산의 나목마냥 헐벗고 앙상하다. 눈물범벅이 된 내 뺨을 닦아주던 크고 따뜻한 손은 어디로 갔나. 혈기 왕성한 젊은 아버지는 어디로 사라졌나. --- 본문 중에서 서른이 다 되도록 나는 여자를 몰랐다. 하지만 신붓감에 대해서는 확고한 견해가 있었다. 남들이 따지는 인물이나 집안 따윈 아랑곳없었다. 다만 나와 뜻이 맞는 여자라야 했다. 그리고 그 뜻을 맞추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이 있었다. 첫째는 재산을 따지지 않을 것. 어차피 나는 가난뱅이 무일푼에 앞으로도 부자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둘째는 학식이 있을 것. 그동안 여자들은 종신형을 받은 죄수처럼 집 안에 갇혀 보고 듣는 것이라곤 백 년 전의 그것, 천 년 전의 그 소리였다. 밥 먹는 방석, 옷 입은 베개, 숨 쉬는 송장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절반이니, 그 절반이 바뀌지 않는다면 세상을 영영 바꿀 수 없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조건은 당사자와 직접 만나 서로 마음이 맞는지 확인할 것. 내가 얼마나 못생겼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상대가 어떤 눈빛을 가졌는지도 보아야 한다. 일체의 거짓 없이 마음을 털어놓고 대화를 나눈 뒤 스스로 선택을 해야 한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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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인간적인 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어린 시절, 청소년기, 결혼, 부모, 독립운동 등 김구의 삶을 작가만의 관점으로 소설화했다. 김구의 업적보다는 인간적인 고뇌, 사상적 배경, 김구 관련 자료에 근거한 다양한 상황 묘사(작가의 상상력)가 부각된 편이다. 중반부까지는 김구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후반부에는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일화를 소설적으로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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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가 김별아 장편소설
아름다운 꿈과 거대한 슬픔의 공존 김구의 삶을 통해 시대의 안녕을 묻는다 “청년이여, 세상을 포용하되 담대하라!” 혼란의 시기, 민족의 등불 김구를 소설로 만나다 * 역사의 거인 김구를 다시 읽다 건국, 제헌 60주년 기념 ‘존경하는 정치인’ 설문조사 8위, 전국 인문·사회계열 교수가 뽑은 ‘20세기 한국의 정신사에 영향을 끼친 인물 10인’ 선정, 네티즌이 뽑은 ‘지폐에 들어갈 위인’ 등 2008년 김구를 기억하는 시민들의 가슴은 여전히 뜨겁다. 일제강점기 국가와 국민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김구는 정치인이기 이전에 이성과 감성이 조화로웠던 이인이자, 닮고 싶은 대한민국의 큰 어른이다. 신민회 사건으로 일제에게 17년형을 선고받을 무렵, 잔혹한 고문으로 하루에도 몇 차례씩 죽었다 깨어나 그가 괴로워했던 것은, 육신이 아닌 조국의 안위였다. “저 왜놈 경찰은 이미 먹은 나라를 삭히려기에 밤을 새거늘 나는 제 나라를 찾으려는 일로 몇 번이나 밤을 새웠던고 하고 스스로 돌아보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고, 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것과 같아서 스스로 애국자인 줄 알고 있던 나도 기실 망국민의 근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니 눈물이 눈에 넘쳤다.” --- 《백범일지》중에서 이렇게 한국독립투쟁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백범 김구의 생애를 쓰는 동안 작가 김별아는 줄곧 묻고 또 물었다. 왜 그렇게 살고 왜 그렇게 죽어야 했냐고. 오직 끝없는 질문 속에서만 그를 이해할 길을 찾을 수 있기에, 이미 안다고 믿었던 답들을 거듭 묻고 재차 확인했다. 그의 생애는 《백범일기》를 통해 일반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하기에 작가 김별아는 《백범일기》를 읽은 사람들과 아직 읽지 못한 사람들을 동시에 가상의 독자로 상정하고 소설작업을 했다. 알아야 할 것들과 기억해야 할 것들 사이에 오욕과 질곡의 역사 속에 우뚝 선 거인에 대한 질문을 놓아두었다. 왜 우리는 오늘 그를 읽어야 하는가? 그는 왜 다시 살아나야만 하는가? * 생생한 내면의 기록으로 다시 태어나다 작가 김별아는 한국독립투쟁사의 지난한 기록을 최대한 사실에 근접하게 서술하는 한편, 지나치게 숭조적(崇祖的)인 정리를 지양하고 투사이자 교육자이자 사상가인 백범 김구의 생애를 관통하는 인간적 면모를 그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 절제된 감정의 행간에서 그의 뜨거운 진정을 읽고자 애썼다. 육중한 침묵 속에서 그의 우렁우렁한 웅변을 듣고자 귀를 기울였다. 그럼에도 못다 쓴 진실은 이제 《백범》을 읽는 독자들의 몫이 아닐까? “이십 년 전에 나는 대학의 새내기로서 그의 시대를 읽었다. 그때 나를 장악했던 감정이 분노였다면, 이십 년 후에 다시 그것을 읽는 나를 지배한 감정은 슬픔이다. 슬픔은 분노만큼 뜨겁지는 않지만 낮고 질기고 도도하다. 그것은 물처럼 유유히 흐르며 역사의 파랑에 휩쓸린 나약한 인간들을 적신다. 그리하여 슬픔도 마침내 힘이 된다. 나는 그 자잘한 상처 같은 시간 속에서 변한 것들과 변하지 않은 것들을 동시에 기꺼워한다. 기어이 슬퍼하고 기꺼이 슬퍼하기 위해, 나는 좀 더 배우고 쓰고 살아내야 한다.” - 〈작가의 말〉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