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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내며
글쓴이의 말 1. 준비된 희망의 불씨 조아세? 조아세!/ 안티조선의 산실 안터마을/ 사람들의 숨결이 가득한 집/ 희망의 불씨를 지피며 2. 일탈과 방황의 시절 행복하십니까?/ 그의 과거를 알고나 있습니까?/ 옳지만 하지는 마라?/ 자유인이기를 갈망한 이단아/ 더 이상 불행하게 살지는 않겠다 3. 새로운 도전,〈옥천신문〉 주말 여론을 이끌다/ 황금미꾸라지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가슴속에 새긴 222명의 이름/ 낮은 곳에서부터 소통하다/ 낡은 언론 관행과의 싸움/ 주민 여러분께 사죄드립니다 4. 풀뿌리 언론의 희망,〈옥천신문〉 지역 권력 감시자로 나서다/ 도깨비 같은 〈옥천신문〉/ 줄기차고 집요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등잔 밑을 밝히다/ 성공의 핵심 비결은 바로 고객 감동/ 26원 31전의 기적/〈옥천신문〉을 떠나다 5. 언론개혁의 기치, 옥천전투 새로운 형태의 언론개혁운동이 태동하다/ 조선바보의 독립군/ 민들레 홀씨가 되어/ 옥천의 불씨가 가히 조선 들판을 사르리라/ 새로운 대안언론〈여의도통신〉/ ‘한국판 롤콜’을 꿈꾸다/ 풀뿌리 옥천당의 정치 실험 6. 행복한 세상을 위하여 안터마을을 찾는 사람들/ 꽃두레마을 추진위원회 결성/ 아깨다 마을 만들기/ 다시 풀뿌리로 돌아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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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를 불태우기 위해서는 단 한 점의 불씨만 있어도 충분하지요.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터에서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불씨만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그 어느 날 작은 바람이 불어도 한 점의 불씨가 광야를 다시 활활 타오르게 할 수 있을 겁니다.” --- p.40
“언론을 일컬어 흔히 세상을 비추는 창(窓)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현대를 살아가는 대중은 이 창을 통해서 소통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가장 기본적인 이 소통의 도구가 왜곡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 청춘을 불행으로 이끌었던 바로 그 부조리와 모순, 불합리한 괴리 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때부터 나는 왜곡된 창, 즉 언론을 바로잡는 것이 우리 시대의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 p.69 “내가 〈옥천신문〉을 창간해 주민의 소통을 돕고, 안티조선의 시대적 흐름에 동참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실제로 안티조선 운동을 하면서 나는 신명을 찾았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알게 됐습니다. 내 자신이 존엄한 존재라는 것도 알았지요. 이제 더 이상 내 자신을 학대하며 살아가는 ‘청개구리’가 되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어요.” --- p.70 왕도(王道)는 따로 없었다. 정도(正道)가 유일한 정답이었다. 실제로 〈옥천신문〉은 언론의 정도를 걸었다. 촌지와 계도지를 거부했고, 성역 없는 과감한 보도로 지역 권력 핵심 세력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으며, 그 무엇보다 먼저 주민과 독자를 신문의 주인으로 섬겼다. --- p.134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싶다면 이 세상의 실개천과 실핏줄과 실뿌리부터 바꿔야 합니다. 내가 지금 안터로 돌아온 이유도 이런 실뿌리 정신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이슬 속에도 우주의 섭리가 들어 있습니다. 내 가정과 마을을 소통의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면, 이 세상도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여기에는 대전제가 있지요. 나 자신이 먼저 행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한한 에너지의 원천이 돼야 합니다. 그런데 정 기자, 행복하십니까?” --- p.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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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희망 그리고 묵직한 감동이 빚어낸 사람들의 이야기, 그 세 번째
많은 사람들이 이제 고전적인 의미의 지역 공동체는 사라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역 곳곳에서 새로운 대안을 만드는 움직임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 중심에는 자신의 삶을 던져서 지역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들 부와 명예를 좇아 대도시로 몰려들고 있을 때, 그들은 도시를 떠나 지역에 자리 잡고 미래를 향한 큰판을 벌이면서 끊임없는 노력과 거침없는 도전으로 우리 사회의 굳건한 뿌리를 키우는 아름다운 에너지가 되고 있다. 우리 시대의 희망을 찾으러 나서는 지역 인물 탐구 시리즈 ‘희망을 여는 사람들’은 토종벌 총각 김대립, 김제 남포리의 상록수 오윤택에 이어 충북 옥천에서 「옥천신문」을 창간하여 풀뿌리 언론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오한흥을 세 번째 인물로 선택했다. 오한흥, 그는 누구인가 ‘58년 개띠’로 충북 옥천군 옥천읍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서른 살이 되던 해인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자 운명적으로 옥천 지국장을 맡았다. 길고 깊은 방황의 시절을 보내던 그는 당시 40여 명에 불과한 옥천의 「한겨레신문」 독자들과 만나면서 ‘사회적 개안’을 하게 되었다. 그 후 풀뿌리 언론의 성공 모델인 「옥천신문」을 창간하고 키웠으며, 보수 성향이 강한 지역 옥천에서 「조선일보」 절독운동을 성공시켰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입법전문 정치주간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했으며, 이제는 자신이 살고 있는 안터마을을 보다 건강한 생태마을로 가꾸기에 여념이 없다. ▶풀뿌리 언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불어닥친 민주화 열풍은 지역 차원에서 지방자치제(1991년) 실시와 풀뿌리 신문(1988년)의 탄생으로 귀결되었다. 이때 오한흥은 충북 옥천에서 1987년 청년애향회 창립을 주도하여 초대 회장을 맡으면서 석 달에 한 번씩 ‘애향회보’라는 소식지를 발행해 회원 동정, 지역 소식을 실어 주민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었다. 바로 「옥천신문」 창간을 위한 일종의 준비운동인 셈이다. 그런 와중에 1988년 12월 충남 홍성에서 「주간홍성」(「홍성신문」의 전신) 창간되었고, 이에 자극을 받은 오한흥은 마침내 1989년 1월 30일 옥천지역신문 창간준비위원회를 꾸렸다. 정기간행물등록법상 필요한 자본금 5천만 원을 마련하기 위해 군민주(郡民株) 모금 방식을 도입했고, 이에 지역 주민 222명이 공동 출자에 참여했다. 당시 옥천은 YMCA나 농민회 조직조차 없었던 지역사회운동의 불모지였다. 이런 지역에서 신문을 발간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며, 창간을 해도 망할 가능성이 높다는 부정적인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옥천신문」은 그런 시각을 보기 좋게 누르고 주민들에게 당당하게 인정받는 신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기자단에 소속되지 않은 「옥천신문」은 기자실 출입이 봉쇄되자 한판 싸움을 벌여 마침내 출입 허가를 받았고, 군청에서 홍보예산으로 사용하는 비용 가운데 공식적인 보도 사례비로 기자들에게 정기적으로 촌지를 제공하는 등의 낡은 언론 관행과의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이렇듯 차근차근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한 「옥천신문」은 성역 없는 보도로 대외적인 인지도를 확보했고, 따라서 관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아무리 불가피한 전후 사정이 있다 해도 원칙을 어기거나 잘못을 했으면 독자에게 깨끗이 공개하고 사과하는 것이 「옥천신문」의 전통으로 뿌리내렸다. 무모할 정도의 결벽성과 투명성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외부의 정치적ㆍ경제적 압력으로부터 편집권의 독립을 지켜주는 든든한 원동력이 됐다. 왕도(王道)는 따로 없었다. 정도(正道)가 유일한 정답이었다. 「옥천신문」은 언론의 정도를 걸었다. 성역 없는 과감한 보도로 지역 권력 핵심 세력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으며, 무엇보다 먼저 주민과 독자를 신문의 주인으로 섬겼다. 이렇게 주민과 독자 우선의 원칙은 철저히 지역에 기반한 기사 쓰기로 이어졌다. 기본에 충실한 합리적 제도로 「옥천신문」을 성공적으로 이끈 오한흥은 2005년 3월 31일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 사퇴 의사를 밝히고 그의 후임으로 이안재 편집국장을 추천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경영 상태가 안정될 때까지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하며 때를 기다린 것이다. ▶옥천을 언론개혁의 성지로 이끌다 1998년 「조선일보」에서 최장집 교수의 사상 검증을 대대적으로 벌이기 전까지만 해도 오한흥은 「조선일보」를 ‘민족지’로 알았다. 그러나 바로 그때 10년 가까이 구독하고 있던 월간 「말」에 실린 기사로 그는 비로소 「조선일보」에 대해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되었다. 오한흥은 「조선일보」의 전매특허인 ‘마녀 사냥’을 보면서‘반민족 범죄 행각을 은폐하기’ 위해 민족지로 행세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임을 간파했다. 지역신문을 발간하면서 상식과 원칙과 소통에 대해 깊이 고민해 왔던 그는 전정표 씨를 비롯해 김봉겸·조만희 옥천중 교사, 김성장 옥천상고 교사 등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언론개혁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일보」가 자행한 반민족 친일 행각을 주민들에게 알려 ‘조선일보 없는 아름다운 옥천으로 가꾼다’는 취지로 ‘조선일보 바로보기 옥천시민모임(약칭은 ‘조선바보’다)’을 꾸렸다. 그 후 3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2000년 8월 15일 정지용 시비 앞에서 출범식을 가졌으며 이 자리에서 '조선일보로부터의 옥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들 회원들은 ‘독립군’이라는 별칭으로 불렸으며, 「조선일보」 추방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여 옥천군 군의원 전원(9명)을 비롯해, 진보와 보수를 망라한 지역 명사나 옥천경찰서 등의 단체가 독립군에 가입하는 눈부신 결과를 이끌어냈다. ‘물총닷컴’이라는 온라인 사이트를 개설하여 당시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려주었으며 「옥천신문」 의견 광고를 통한 오프라인과의 환상적인 연계로 「조선일보」 절독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이제 옥천은 바야흐로 ‘언론개혁의 고장’과 ‘안티조선의 성지’로 급부상했으며, 이러한 역량을 바탕으로 2003년 8월에 국내 최초의 언론 축제인‘언론문화제’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참언론이 가득한 세상을 꿈꾸자’라는 주제로, 여섯 번째를 맞이한 올해‘언론문화제’는 다양한 볼거리와 놀거리가 함께 명실상부한 ‘언론개혁 축제’로 자리 잡았다. ▶다시 풀뿌리로 돌아와 소통의 공간을 꿈꾸다 오한흥은 이제 활동 영역을 ‘옥천’에서‘전국’으로, ‘옥천신문’에서 ‘지역언론 네트워크’로 확장하여 2004년 6월 1일, 국내 최초의 ‘입법전문 정치주간지’「여의도통신」 창간을 이끌었다. ‘풀뿌리 언론의 국회 특파원’을 표방한 「여의도통신」은 한마디로 국회의원들의 ‘과속’을 방지하는‘감시 카메라’라고 할 수 있다. 초기에는 지역언론이 회원사로 참여할 경우 그 지역 출신의 국회의원에 대한 모니터를 수행하여 많은 정보를 지역언론에 제공했지만 2007년 3월부터는 의원 전체 모니터로 취재 방식을 바꾸었다. 2005년 후반기부터 오한흥은 옥천에서 ‘담론문화 만들기’에 나서서 토론 문화를 활성화시키는 작업을 벌였다. 2006년 지방선거가 다가오자 오한흥은 뜻있는 사람들과 의기투합하여 엉뚱하지만 유쾌한 정치 실험을 벌였다. 새로운 정치 풍토, 깨끗하고 즐거운 선거 문화, 진정한 지방자치의 틀을 짜겠다는 포부로 기존의 거대정당들과 겨뤄보자는 발상에서 군 단위의 풀뿌리 옥천당을 만들었다. 사실 풀뿌리 옥천당은 정당법에 근거한 당이 아니라 현 정당정치의 오류와 모순을 고발하는 반어적인 표현이며, ‘생활정치를 추구하는 순수한 정치개혁 시민모임’이었다. 하지만 선거관리위원회에서 풀뿌리 옥천당을 정당법과 선거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했고, 풀뿌리 옥천당은 재판에서 지고 말았다. 오한흥은 이 한바탕의 에피소드를 지배 세력의 위선과 기만의 가면을 벗겨 버린 굿판으로 믿고 있다. 이제 오한흥은 그가 살고 있는 안터마을을 마을공동체로 꾸리기 위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꽃두레마을 추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은 그는‘대청호 생태계를 보전하는 평화로운 전원마을’이라는 비전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바쁜 걸음으로 안터마을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