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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방
창 디반(divian) 카메라오브스쿠라 터키 욕장 발코니 예배당 감사의 말 참고문헌 옮긴이의 말 |
Patricia Ham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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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그러진 시간을 내가 상처라고, 폭행이라고 이미 느끼는 것은 분명했다. 너무 젊고, 너무 야심찼다(나는 그랬다). 하지만 이미 짓눌리고 숨이 막혀 일정과 직무의 정당한 요구들을 증오하고 있었다. 나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했다. 원고를 편집하면서 데드라인에 시달리는 존재였다. 하지만 내 자신의 경험으로부터가 아닌 본능으로부터 각인된, 인생이란 어때야 마땅한지에 대한 기억의 자취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인생은 중단 없는 응시의 투명한 빛으로 가득차야 마땅했다. 바라보고 생각에 잠기는 것이야말로 내가 찾던 직업이었다. --- p.14
그림은 보는 행위를 그려야지 보이는 대상을 그려서는 안 된다. 그 대상이 완전히 이국적인 세계를 나타내더라도, 이는 자아의 베일을 거쳐서 실현되어야 한다. 그렇게 예술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더니티에서 진정 관건이 되는 것은 화가의 와전히 몰입된 감각―정신/마음/영혼―이기 때문이다. --- p.34 나는 불룩한 창이 빙 둘러 있는 둥근 방에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우리 아버지의 온실에서 보이던 일광욕실이었다. 사발처럼 둥근, 유리로 된 커다란 방은 남동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햇빛이 부드럽게 쏟아져 들어왔다. …… 그곳은 나의 꿈들을 위한 방, 불룩한 유리 어항 속의 만족스러운 물고기처럼 나를 잡아두는 투명한 둥근 그릇이었다. --- p.97 예술가들이 찾는 영감은 분명 장소, 장소, 장소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화가와 작가들이 ‘마땅한 장소’를 찾아 계속 방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게 틀림없다. 여러 세대에 걸쳐 여기로, 거대한 푸른 바다 너머로 아프리카 연안을 마주하는 이 줄지어 있는 마을들로 온 것은. 영감을 찾아서라고, 우리는 말한다―아니면 남몰래 생각한다. --- p.160 이는 삶의 핵심이다. 예술가적 삶을 그냥 바라보기. 그야말로 현대의 산물인 서두름은 내가 여기 있는 동안은 휴가 중이었고, 나는 비수기의 슬로모션 속에서 지나간 시간들의 복제품을 살았다. 이제 주말에는 복잡해지기 시작했고 나의 북부적 영혼은 온기에 킁킁거린다. 여름이 오고 있다. 내가 가야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곧 이곳은 더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 p.199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 할 일도 없는 사람으로서 여기 앉아 있는 것은 불가사의한 느낌이다. 여기 이 빛 속에서 사물은, 세상 자체와 그 모든 우연한 부분들은, 무언가를 형성하기 위해 모이는 방식을 갖고 있다는 느낌―태양은 아침 공기를 핥아 바다에 떨어지고, 상인들은 큼직한 빗자루에 몸을 기대고, 갈매기들은 하늘을 휩쓸고, 항구 너머 절벽 꼭대기의 폐허가 된 중세 성은 빛 속에서 거의 지워져, 마음속에서 스스로 희미해지고 풍부해지는 과거처럼, 실체가 없지만 영원하다. --- p.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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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림에 얻어맞았다!”
무심한 듯 어항을 바라보는 여인, 그리고 그 너머의 신비스런 바다를 암시하는 푸른 스크린…… 한 점의 그림에 매료되어 떠난, 바라봄과 명상과 사색의 여행 불현듯이 찾아온 이미지의 습격! 어느 날 지은이는 한 점의 그림에 말 그대로 ‘사로잡힌다.’ 바로 초연한 모습으로 어항 속의 금붕어를 들여다보고 있는 여인을 그린 마티스의 「어항 옆의 여인」이다. 이 책은 바로 이 그림으로부터 시작된다. 지은이는 자신이 예술적 ‘성인(聖人)’이라 여기는 앙리 마티스, 스콧 피츠제럴드, 제롬 힐, 캐서린 맨스필드의 자취를 좇아, 빛과 예술과 사색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개인적인 경험과 여러 문학 텍스트와 미술사의 일화들이 버무려져, 한 편의 사색적이고도 아름다운 에세이가 태어났다. 예술과 충만한 인생에 대한 통찰이 책 곳곳에서 보석처럼 빛난다. “그림에 두들겨 맞다” 1972년, 약속에 늦어 미술관 복도를 잰 걸음으로 뛰다시피 가던, 당시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였던 지은이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그림을 보고 그만 발이 묶여버린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이미지에 얻어맞은’ 것처럼, 그림은 강렬한 힘으로 그녀를 꼼짝 못하게 붙잡아 둔다. 그녀는 영문학을 전공하고 막 대학을 졸업해 직장생활을 시작한 사람으로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물론 감상하는 일 따위는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그림은 앙리 마티스가 그린 「어항 앞의 여인」이었다. 미술사를 전공한 그녀의 친구 말에 따르면, 심지어 마티스의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림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처럼, 오직 그 그림만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그런 그림도 아니고, 마티스의 작품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히는 것도 아니다. 그림에는 금붕어 몇 마리가 헤엄치고 있는 어항과, 그 어항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한 여인이 그려져 있다. 해질 무렵의 나른한 햇빛이 창으로부터 들어와 그녀의 옆얼굴을 길고 노란 빛으로 비추고, 금붕어는 한가로이 헤엄치며, 여인은 팔에 머리를 괸 채 조용히 어항을 응시할 뿐이다. “이 일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해” 이 그림이 지은이를 그토록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햄플 자신으로서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림이 자신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림의 속삭임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겼다. 그리고 이내 그림 속 여인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고 생각에 잠기는 것’이 자신이 바라는 삶의 모습이었음을 안다. 말하자면, 언제나 무언가를 생산해야 하고 이윤을 남겨야 하는, 쉼 없이 돌아가는 엔진 같은 현대사회와는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는 삶의 태도를 갖춘, 자신이 바라고 동경하던 모습을 살고 있는 그림 속 여인에게 매혹당한 것이다. 어린 시절 지은이는 가톨릭 학교의 수녀님에게 신을 섬기며 사는 삶의 정수가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수녀는 조용히 이렇게 답한다. “한가한 시간.” 질문한 어린 소녀가 어리둥절해하자, 수녀는 덧붙인다. “이 일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 이제, 몇 년이 지나 한 점의 그림 속에서 햄플은 영원토록 바로 그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여인을 발견한 것이다. 처음에 지은이의 시선은 물론 그림 속 여인에 있었지만, 이내 “그 명상에 잠긴 얼굴을 지나쳐, 그녀가 응시하는 유리 항아리 속의 세계를 지나쳐, 모로코 식 스크린에 닿아 거기 머물”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이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실은 처음에는 배경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푸른색 스크린과 그것이 가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푸른색으로 X/O 투각 무늬 세공이 돼 있는 그 스크린은 마티스가 북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오면서 프랑스로 가져온 것이었다. 지은이는 마티스가 그 스크린 뒤에 숨겨둔 것이 무엇일지를 상상하며, 마티스의 흔적을 좇아 여행을 떠난다. “안락의자가 될 수 있는 예술” 야수파 화가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마티스는 1906년, 북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다(그리고 그림 속의 스크린을 들고 돌아왔다).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 화가는 마티스가 최초는 아니었다. 그 전에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알제의 여인들」)가 있었고, 실제로 가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 세계에 매혹되어 아프리카의 이국적인 인물(혹은 복식)을 화폭에 담았던 앵그르(「그랑 오달리스크」)도 있었다. 들라크루아와 앵그르 같은 19세기 화가들은 이국적인 옷을 입고 나른하게 늘어져 있는 여인들, 오달리스크를 즐겨 그렸다. 마티스 또한 오달리스크를 그렸다. 이런 연결, 관계는 일종의 전통이나 계보 속에 마티스를 위치 지웠다. 하지만 마티스를 들라크루아에게 연결 지으려는 시도에 대해 마티스는 늘 불쾌감을 드러냈다. 왜냐하면, 마티스가 이국적 의상을 입은 여인들을 그리기는 했지만, 들라크루아나 앵그르처럼 그들이 상상한 ‘동양’을 그리기 위해 대상을 세심히 묘사하는 데 열중했던 것과는 달랐다. 그가 그린 여인들이 입고 있는 옷들은 언제나 가장의상처럼 보이고, 사물을 꼼꼼히 그려내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데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가 그리고자 한 것은 자신의 감정과 느낌이었지 사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햄플은 이렇게 정의 내린다. “그림은 보는 행위를 그려야지 보이는 대상을 그려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이것은 현대미술에 대한 명쾌한 정의이기도 하다. 마티스의 그림에 매혹당한 햄플은 그 그림 말고도, 직접 볼 수 있는 모든 마티스의 그림을 찾아 나서고 그림이 인쇄돼 있는 엽서들을 탐욕스럽게 모은다. 지나치게 ‘장식적’이라는 이유로 때로는 저평가되기도 했던 마티스의 그림들을 바라보면서, 햄플은 장식이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마티스 예술의 ‘본질’임을 간파해낸다. 색채와 장식은 인간의 내면 깊숙이 각인돼 있는 본능이기 때문이다. 마티스는 스스로 말했듯이 “순수함과 평온함의 예술, 치유하고, 정신을 잔잔하게 하는 효과를 가지며, 피로를 풀게 해주는 좋은 안락의자가 될 수 있는 예술”을 추구했는데, 이는 충만한 삶을 위한, 여가와 명상으로 가득 찬 생활을 위한 필수품이다. 즉 옛날 옛적부터 사람들이 (심지어 고대에서조차) 추구해왔던 황금시대의 이상, 특히 ‘산업혁명이 악마의 검은 방앗간에 불을 지핀 이후’에는 더욱 찾기 어려운 무언가를 마티스는 명멸하는 빛의 반짝임처럼 보여주는 것이다. 고향에서 달아나, 빛 속으로 떠나다 모든 진정한 예술가들은 저 너머에 있는 것을 찾아서 길을 떠난다. 마티스는 가톨릭 전통이 강한 북부에서 달아나 햇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남쪽으로 갔고, 지은이와 동향(同鄕)인 F. 스콧 피츠제럴드와 독특한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어 아카데미상을 탄 제롬 힐 또한 미국 중서부를 떠나 방랑했다. 지은이의 또 한 명의 예술적 성인(聖人)인 캐서린 맨스필드 또한 뉴질랜드를 벗어났다. 그리고 이들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향했던 곳은 서구 문화가 시작된 곳, 지중해의 아쿠아마린 빛 해안이 길게 이어져 있는 프랑스 남부해안 지역이었다. 햄플 또한 이스라엘과 터키를 거쳐, 결국 코트다쥐르에 이른다. 그녀의 성인들이 적어도 한번은 찾아가 머물렀던 곳으로. 그곳은,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2600년 전 소아시아로부터 포키스 무역상이 다다라 문명을 세웠고, 그로부터 문명이 퍼져나간 문명의 발상지이다. 예술가들은 찬란히 빛나는 햇빛을 좇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감’을 찾아 그곳으로 갔다. 햄플의 마지막 여행지는 다시 마티스에게로 돌아간다. 바로 방스에 있는 로사리오 예배당이다. 로사리오 예배당은 평생 수많은 여인들을 그렸던 마티스의 마지막 뮤즈, 모니카 부르주아가 ‘자크-마리’ 수녀로서 머문 곳이었다. 이 작은 예배당에는 마티스의 벽화와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이 위대함의 반열에 오른 화가가 자신의 모델을 위해 착수한 생애 마지막 대형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시작한 일이 결국에는 그의 예술인생을 종합하고 정리하는 걸작이 되었다. 작고 하얀 로사리오 예배당에서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노란색·초록색·파란색으로 이뤄진 스테인드글라스와, 하얀 벽에 간결한 검은 선으로 그려진 성화이다. 하지만 「어항 옆의 여인」에서 주인공인 여인보다 그 뒤의 배경에 지나지 않았던 스크린에 주목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햄플의 시선은 스테인드글라스나 그림보다는 작은 문, 고해실의 문에 머문다. 이 역시, 「어항 옆의 여인」에서 스크린이 그랬던 것처럼 현실 너머의 세계를 암시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햄플에게 예술과 종교는 하나가 된다. 평생의 바쳐 예술에 헌신했던 마티스의 마지막 헌신이 성당이라는 것은 그래서 기묘한 우연이다.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이 책을 읽고 나면 “미술관을 교회로 착각하거나, 혹은 바꿔칠지도 모를” 일이다. 블루 아라베스크 ‘아라베스크(arabesque)’는 뒤얽힌 식물 문양과 추상적 곡선을 이용한 모티프가 반복되는 정교한 기하학 형태를 뜻하며, 원래는 이슬람 예술의 한 요소로서 모스크 벽을 장식하는 데 쓰였다. 무슬림에게 이런 형태들은 한데 합쳐져 가시적인 물질세계 너머로 확장되는 무한 패턴을 이룬다. 이렇게 아라베스크는 무한하고, 그러므로 중심이 없는 자연을 상징하며 신의 무한한 위대함을 나타낸다. 이 책에서 ‘블루 아라베스크’는 책의 모티프가 된 마티스의 그림 「어항 옆의 여인」의 배경에 등장하는 푸른색 스크린을 나타내며, 동시에 그 푸른색 스크린 너머의 무한한 영적 세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는 곧 지은이가, 예술가들이, 그리고 인류가 추구해온 닿을 수 없는 이상세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