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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c-Emmanuel Schmi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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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네 시간만 기다려주시오!”
멋지고 우렁찬 남자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렇소, 스물네 시간이오. 그 이상은 한 시간도 더 기다려달라고 하지 않겠소. 그 정도면 충분할 테니까.”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흰옷을 입은 남자가 접이식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상아 손잡이가 달린 지팡이에 손을 얹은 채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고 있었다. 마치 물건을 감상하듯이. “물론 상상력을 발휘해야겠지만 그거야 뭐…… 안 그렇소……흐흐…… 흐흐…….” 남자는 마른기침 같은 웃음을 딸꾹질처럼 뱉어내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 서슬에 가늘게 손질한 콧수염 아래 이가 드러나더니 어느 순간, 무지갯빛이 찬란하게 빛났다. 나는 뭔가 싶어 남자 앞으로 다가갔다. 남자의 이라는 이에는 모조리 보석이 박혀 있었다. 내가 이 미터 앞까지 다가가자 남자는 보석들을 도둑맞기라도 할까봐 겁이 나는지 웃음을 멈췄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어이가 없었다. 내가 왜 자살하려다 만 거지? 저 남자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나는 남자에게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말 걸지 말아요. 자살하려는 중이니까.” “암, 그러시겠지……. 알고 있었소. 그 자살, 스물네 시간만 미뤄주실 수 없겠소?” --- p.11 “괜히 에둘러가진 않겠소. 나는 천재요. 그걸 모른다면 천재라고 할 수도 없겠지. 열다섯 살 때 검정 비누에 그린 그림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후 스무 살엔 빨대 조각품으로, 스물두 살엔 다뉴브 강 염색으로 명성을 확고히 한 다음 스물다섯 살엔 파리잡이용 종이로 자유의 여신상을 포장했다오. 서른 살 때 첫 번째 ‘꿀 흉상 시리즈’를 완성한 후로 나는 계속 탄탄대로를 달려왔소……. 난 말이오, 젊은 친구, 싸구려 스파게티나 광우병 걸린 소고기 따위로 끼니를 때워본 적이 없소. 늘 비단방석 위에서 굴러다녔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각광받는 예술가니까. 뭐 가끔 형씨 같은 얼간이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면 어떻소, 내가 손 한 번 움쩍하면, 낙서 한 번 찍 하면 선생들이 한평생 모아도 못 모을 엄청난 돈이 들어오는걸. 정말이지 나는 배불러 죽을 만큼 부자요. 뭐 그렇다고 배불러 죽지는 않겠지만 말이오. 요컨대, 그러니까 몇 마디로 간단히 줄이자면 나는 천재성과 그에 합당한 명예와 돈, 그리고 잘생긴 얼굴을 다 갖추고 있다는 얘기요. 짜증나지 않소, 응?”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가 바싹 다가서더니 콧수염 아래 ‘보석 진열창’을 슬쩍 드러내 보였다. “게다가 나는 침대에서도 따라올 자가 없는 정력가라오.” 나는 인정하고 항복했다.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나가는데 반박할 도리가 없잖은가. --- p.30 “이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소개하오. 살아 있는 조각상을!” 커튼이 펄렁거리며 젖혀지고, 나는 팬티 차림으로 사람들 앞에 첫선을 보였다. 다들 배 한복판에 공을 맞은 듯 억눌린 신음만 발할 뿐이었다. 눈썹을 치켜뜨고 입을 헤벌린 채. 시간이 멈춰버린 듯했다. 제우스 페테르 라마가 내 곁으로 다가와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나’를 바라보았다기보다는 ‘내 몸’을 바라보았다. 수술 후로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내 두 눈만이 그의 작업을 거치지 않은 부위였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날 밤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나와 눈을 마주쳐주었다면 내겐 큰 힘이 되었을 텐데. 제우스가 명령했다. “일어서!” 약속대로 나는 걸상에서 일어나 두 발로 버티고 섰다. 사람들이 겁에 질린 듯 술렁였다. 기묘하다는 표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내 모양새 때문에 내가 조각품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람들 눈에 대리석 조각이 어슬렁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은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 pp.90~91 나는 한니발과 그의 딸 피오나를 등 뒤에서 바라보며 오후 한나절을 보냈다. 화가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이미 화폭에 그려진 것들이 망쳐지지나 않을까 조바심을 내면서. 또 그가 손동작을 멈출 때마다 이미 그려진 것들을 보고 감탄하면서. 나는 뭔가 근본적이고 중대한 것을 배워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게 뭘까? 딱히 짚이는 건 없었다. 내가 뭘 배우는 중일까? 그림 그리는 법? 아니, 난 화가가 되고 싶지 않은걸. 카를로스 한니발이라는 화가의 작업 방식?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나는 그런 화가가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도 몰랐어. 미술비평가가 되고픈 마음도 없고. 아니면 그저 관찰력을 키우는 중일까? 하지만 그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도 아닌데? 그는 공기를 그리고 있었다. --- p.142 일단 냄새부터 먼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지독한 악취가 관람객들의 코를 찔러댔다. 처음엔 이게 무슨 냄새야? 하며 꼼짝 않고 서서 코만 벌름거리던 관람객들은 곧이어 제 옆 사람을 흘끔흘끔 비난의 눈초리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럴 만했다. 냄새가 너무나 강렬한 탓에 바로 옆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고는 도저히 생각들을 할 수가 없었을 테니까. 어떤 어머니는 다짜고짜 제 아이의 뺨부터 철썩 갈겼다. 죄 없는 아이가 엉 엉 울음을 터뜨렸다. 이어 전시실 안은 난장판이 되었다. 투덜투덜 불평하는 소리, 의심에 찬 눈초리로 바닥을 휘둘러보는 사람, 제 신발 밑창을 들여다보는 사람(늘 자신만만한 축), 제 입 냄새를 맡아보는 사람(늘 자신 없는 축), 갑자기 웩! 하고 구역질을 하는 아주머니, 이어지는 구토의 물결, 전시실 바닥에 넘쳐흐르는 아침식사들, 똥냄새에 섞여드는 토사물 냄새. 그 와중에도 내 똥덩어리는 의기양양했다. 악취를 풍기며 놀랍고도 메스꺼운 자태로 의연하고 위풍당당하게 바닥에 버티고 있었다. 내가 싼 똥이 아니라면 나도 그 냄새에 구토깨나 했으리라. 하지만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의 작품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법. --- p.246 “아담은 우리 시대의 희생양입니다. 정확히 말해 우리 시대에 널리 떠도는 담론의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죠. 요즘은 어딜 가나 외모가 최우선이라고 떠들어대며 겉모습을 바꾸거나 꾸며주는 물건 혹은 서비스를 사라고 부추깁니다. 옷이며 액세서리며 식이요법이며 미용시술이며 화장품이며 건강보조식품이며 사치품들이며 더 좋은 자동차며 이름난 휴양지 순례며 성형수술 등등. 아담도 그 함정에 빠진 겁니다. 겉모습이라는 것에서 자신을 찾으려다 끝내 찾지 못하고 절망에 빠져 있었는데 그때 마침 참신하고 눈에 띄는 외모를 선사하겠다는 사기꾼을 만났으니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아담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말았어요. 나는 그 시기에 아담을 만났고요.” “왜 제우스 페테르 라마 선생을 사기꾼이라고 부르십니까?” “달리 어떻게 부르겠습니까?” 국가 측 레비아탕 변호사와 제우스 페테르 라마와 뒤랑뒤랑이 일제히 항의를 했다. --- p.282 전에 장인어른은 곧잘 이렇게 말씀하셨다. “명성이라는 건 말일세, 죽은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거라네. 살아 있는 사람에겐 빌려 입은 옷처럼 거추장스럽기만 하지.” 그분은 거추장스럽지 않게 살 수 있었다. 살아 있는 내내 가난했고 몇몇 사람들에게만 뛰어난 예술가로 존경받았으며 오직 자식 내외의 사랑과 믿음 말고는 달리 의지할 것이 없었으니까. 내가 장인어른을 세상에 알리는 데 한몫 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주제넘은 짓이겠지. 하지만 오랜 세월 내가 장인어른에 대한 글을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고 각종 강연에서 그의 그림을 보면서 느껴지는 것들에 대해, 그분이 내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온 것만은 사실이다. 그때마다 장인어른은 폭소를 터뜨렸다. “자넨 나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 같아.” “그 누구도 지나치게 사랑할 순 없어요.” --- pp.305~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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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받고 싶은 욕망에 몸과 영혼을 판 남자 이야기!
-황당하고도 기발한 소재와 허위의식에 찌든 사회풍자 돋보여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 장편소설 『내가 예술작품이었을 때』 출간 날카로운 지성과 신랄한 문체, 번득이는 재치와 유머가 돋보이는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의 장편소설 『내가 예술작품이었을 때』는 인간이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불행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형편없는 외모 때문에 열등감에 시달리는 스무 살 청년 피렐리는 자살을 결심한다. 그에게는 자살만이 존재감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인식된다. 절벽 끝에서 막 뛰어내리려는 순간, 천재적인 예술가 제우스 페테르 라마가 제지하고 나선다. 피렐리는 자살하는 대신 프랑스에서 가장 명망이 높은 예술가 제우스 페테르 라마와 기상천외한 계약을 맺게 된다. “당신 목숨을 내게 주겠소? 만약 그렇게 해준다면 내가 당신에게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주지. 왜냐하면 당신은 지금 살아가야 할 이유를 잃었으니까.” 목숨을 맡기면 이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 완벽한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주겠다는 것이 제우스 페테르 라마의 제안이었던 것.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 박사에게 한 제안과 닮아 있다. 제우스 페테르 라마의 집은 주인의 명성에 걸맞게 호화롭기 그지없는 저택이다. 지푸라기 위에 조각을 하고, 검은색 비누에 그림을 그리며, 배설물을 물감으로 사용하기도 하는 제우스 페테르 라마는 일반인들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예술가다. 평단의 찬사와 예술 애호가들의 호평이 줄을 잇는 그는 내놓는 작품마다 어김없이 성공할 만큼 불패의 신화를 이어가는 중이다. 그가 하루아침에 벌어들이는 돈은 교수의 평생 월급에 버금간다. 피렐리는 제우스 페테르 라마와 옆에서 그를 돕는 돌팔이 의사의 조력 작업 끝에 ‘아담 제2호’라는 조각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예술계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킨 인간 조각상 ‘아담 제2호’는 예술 애호가들의 관심 속에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전시된다. 천재적인 예술가 제우스 페테르 라마의 작업으로 완성된 ‘아담 제2호’는 하루아침에 ‘모나리자’보다 더 유명해진다. 주목받지 못한 삶에 절망해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던 피렐리는 소원대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존재로 거듭나게 된 셈이다. 영혼과 육신을 예술가에게 판 대가로 유명세를 얻긴 했지만 피렐리에게 마냥 기분 좋은 일이 계속될 리 없다. 설레고 기뻤던 날들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피렐리가 자유를 잃은 영혼과 육체, 예술가의 작품으로 존재할 뿐인 삶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예술작품이 되고 나서야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 피렐리는 예술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박탈당한 자유와 인간성을 되찾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전개한다. 제우스 페테르 라마가 미처 대비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바로 ‘아담 제2호’가 말할 수 있고 의식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제우스 페테르 라마의 눈에 ‘아담 제2호’는 어떤 작품과도 견줄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위대한 창조물일 뿐이다. 피렐리는 자기 자신이 한 예술가에게 종속된 예술작품 신세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임에도,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존재 즉 의식이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포기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여인 피오나를 만나 삶과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 피렐리는 지금껏 최고의 예술가로 알고 있던 제우스 페테르 라마가 오로지 돈과 명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파렴치한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실상 ‘아담 제2호’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예술적 가치 면에서라기보다는 그 모습이 충격적이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화려한 외양과 돈이 전부인 저속한 사회, 진정한 예술과 삶의 의미를 모르는 인간 군상들에게 ‘아담 제2호’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조각상에 대한 소유권과 온갖 가십거리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명성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빚은 전대미문의 사기극!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는 이 소설을 통해 물질만능주의, 외모 지상주의, 젊음과 미를 절대가치로 숭상하는 사회의식을 신랄하게 꼬집는다.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열두 번이라도 성형수술을 하겠다는 의식이 용인되는 사회, 돈과 명성을 위한 사기행위가 능력으로 용인되는 사회에서 진실의 가치는 한낱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저명한 예술가가 재떨이에 비벼 끈 담배꽁초조차도 예술작품으로 치부하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매스컴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이 소설 중에서 나오는 도쿄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작가는 도쿄전시회를 통해 매스컴과 평론가들의 찬사와 대중의 맹목적 열광이 뒤따른다면 아무리 허섭스레기 같은 작품이라도 최고의 예술품으로 간주되는 구조적 문제를 낱낱이 보여준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자연을 화폭에 옮기며 진정한 예술을 실천하는 가난한 맹인 화가 한니발의 삶은 제우스 페테르 라마가 추구하는 화려한 명성으로 치장된 삶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예술은 화려한 기교나 아이디어에 기대기보다는 본원적으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을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황당하고도 기발한 소재와 독특한 사유가 빛나는 이 소설은 예술에 빗대 허위의식이 팽배한 사회의 실상을 비판한다. 젊음과 미를 보편적 가치로 치부하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대하는 듯하다. 외모지상주의가 비판 없이 받아들여져 ‘얼짱’, ‘몸짱’ 같은 신조어를 만들어내면서까지 열광하는 우리 사회, 성형수술을 부추기는 우리 사회에서 이 소설이 제기하는 문제는 단순히 남의 일만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아직 세상에 희망이 있다면 진실과 사랑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리라. 가난하지만 진실을 잃지 않는 예술가 한니발과 그의 딸 피오나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피렐리는 그들과 교우하면서 억만금을 주어도 살 수 없는 ‘사랑의 가치’를 깨닫는다. 사랑의 위대함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법, 피렐리는 비로소 행복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여전히 힘겹고 가난하지만 그의 곁에는 피오나가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피렐리와 피오나와의 만남과 사랑을 통해 허위의식을 벗어던질 때만이 다가올 희망의 세상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