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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만에 발표하는 박찬일 시인의 다섯 번째 신작 시집
박찬일 시인의 다섯 번째 신작 시집『하느님과 함께 고릴라와 함께 삼손과 데릴라와 함께 나타샤와 함께』(오늘의 대표시인선 4)가 문학에디션 뿔에서 출간되었다. 2006년 『모자나무』 이후 3년 만으로 58편의 시를 엮었다. 박찬일은 이번 시집에서 ‘실재’에 대한 관념과 아프도록 투쟁한다. 실재가 플라톤에게 이데아로, 헤겔에게 절대정신으로 명명되었다면, 박찬일에게는 “하느님”으로 명명되고 호명되고 있다. 떨어지면 받아주리라 고릴라가/ 도망치면 숨겨 주리라 삼손과 데릴라가/ 변하였다/ 고릴라도 내 편이고 삼손과 데릴라도 내 편이다/ 하느님도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문지방으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고릴라와 함께 삼손과 데릴라와 함께/ 나타샤와 함께 살리라/ 나는 변하였다/ 나뭇가지를 상대하지 않는다/ 철봉 평행봉을 상대하지 않는다/ 살려고 하는데 살지 말라고 할 리 없다/ 세상은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고릴라와 함께 삼손과 데릴라와 함께/ 나타샤와 함께 살아보았느냐 ― 「하느님과 함께 고릴라와 함께 삼손과 데릴라와 함께 나타샤와 함께」 전문 그 자체 하나의 완전한 존재이며 이데올로기, 원본임으로 대체 불가능한 실재를 마주하는 일은 그에게 불안과 불행을 안겨 준다. 이런 그의 시 세계를 두고 문학평론가 엄경희 교수는 이렇게 평한다. 박찬일의 시는 마음이 아니라 정신이 아픈 시이다. 그는 머리에 처해진 존재이며 그의 머리는 사라진 것을 각인함으로써 사라지지 않게 한다. 비극의 탄생은 여기서 시작된다. 사라진 것과 사라질 것들 사이에 그의 아프리카가 있고 우물이 있고 검은 안경이 있고 검은 비닐봉지가 있다. 거기에서 그는 검은 안식일을 맞이한다. 기꺼이 검은 180도刑을 껴안는다. 그리고 이 비극적 존재 상황 앞에서 그는 자기의 기원을 바꾸려 한다. 양말을 던지고 의자를 던지고 온몸을 던진다. ― 엄경희(문학평론가 · 숭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대체 불가능한 실재와의 투쟁, 신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도정 안의 고투 시인에게 실재가 아닌 다른 것들은 실재와 모방이나 반영일 뿐이고 실재의 온전함은 존재의 결핍과 불안을 비추는 냉혹한 거울이 되어 돌아온다. 답을 구하기 위해 다가가나 “하늘 바깥”에는 “또” 다른 하늘이 있음을 알게 될 뿐이고, 모처럼 잡은 나무는 “다시 부러”져 남은 일은 “다시 떨어지는 일”이 되어버린다. 하늘에 날개가 닿았다/ 꺼칠꺼칠한 곳이 있었고 말랑말랑한 곳이 있었다/ 말랑말랑한 곳에 걸쳐 앉았다/ 바깥에서 윤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침을 발라, 구멍을 뚫고, 보니까/ 하늘 바깥에/ 하늘이 있는 또 하나의 세계가 있었다/ 그동안 헛고생한 것이다/ 하늘에 가면 다 가는 줄 알았는데/ 到達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늘 바깥에 또 하늘이 있었다니/ 길 떠나지 말라고 한 선생님이 생각난다/ 선생님은 알고 계셨던 걸까/ 하느님이 둘 이상이라는 것을 ― 「나비를 보는 고통」 전문 나무 손잡이는 부러졌고 다시 떨어지는 일이었다./ 다시 나무를 붙잡았으나 나무는 다시 부러졌고/ 다시 떨어지는 일이었다. ― 「일요일」 부분(73쪽) 그리하여 시인은 불안하고 불행하다. 그러나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은 구원의 서사가 아니라, 오히려 구원될 수 없는 자의 존재 해명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찬일은 “기꺼이 불행에 시달려주는 자”로서 실재-자기인식-존재 해명-궁극의 진리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기 때문이다. 다시 우물 밑에서 기어 올라와 우물 위 둥근 콘크리트 한끝에서 손을 떼는 찰나 공중에 머무른 찰나 대지가 거기인 찰나 그의 손이 다시 나를 우물 아래로 내동댕이쳤다. ― 「일요일」 부분(75쪽) 이처럼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에 완전한 존재에 도달하고자 기원을 찾아 헤매고, 회의하고, 불안한 것은 시인에게 숙명과도 같을 뿐이다. ■ 비극적 숙명의 인식을 통한 자기인식 결국 그는 자기와의 싸움을 하는 것이며 자기로부터 완전한 존재인 “하느님” 즉 신성에 도달하려 하는 모습을 관철시킨다. 인간의 비극적 숙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존재 전환을 꾀하고 숙명을 거역해 보기도 하며 “하강의 진자 운동”을 되풀이해 낸다. 자신의 기원을 바꾸기 위해 “하느님이 없는 곳”인 “아프리카”에서 태어나야겠다고 하고, 아무것도 안 보이게 하는 “하얀 안경알”을 쓰고 다니기도 하며, “하느님을 바꾸어” 보자고 하는가 하면,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빛을 낳을 수 있다”고 역설해 보기도 한다. 아프리카에서 혼자 싅어나야겠다 다시 마구간 짓는 일을 해야겠다 건초 까는 일을 해야겠다 農事지어야겠다 공산주의 자본주의 내전들, 또 총에 맞아 죽어야 한다면 또 총에 맞아 죽어야겠다 ― 「아프리카2」 부분 그는 추락하기를 되풀이하지만, 그 추락은 구원의 실마리를 잡기 위한 것이다.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실존적 고뇌는 그의 불안과 불행이 사라질 수 없을 것 같은 위기를 불러오나 이 모든 것 또한 시인 스스로 택한 길인 것이다. 민들레 대궁이 혼자 힘으로 “대지의 작은 구멍 위로” 혼신의 힘을 다해 솟아오르듯 시인도 언젠가는 자신의 힘으로 완전한 하늘에 이르러 보기를 기대한다. 절대적인 완전성을 위한 여정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비극적 숙명임과 동시에 최고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나는 넘어질 뻔했을 뿐이다/ 가고자 했던 곳으로 가고 있는 내가 좋다/ 도달하는 곳이 천생연분이다 ― 「천생연분에 對하여」 부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