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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1 - Beethoven : Symphony No.7 In A Major, Op.92
Mozart : Symphony No.40 In G Minor, K550
CD 2 - Beethoven : Symphony No.9 In D Minor, Op.125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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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악장 알레그로 마에스토소는 신비로운 불안을 풍기는 현의 화음으로 시작하여 곧 바이올린이 제1주제를 단편적으로 제시한다. 이윽고 당당한 주제로 부풀어올라 마치 대우주의 별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듯한 엄청난 음량을 퍼붓는다. 극적이며 침통한 영혼의 울부짖음이기도 하다. 소나타 형식이며 비극을 내포한 장려(壯麗)한 악장이다.
제2악장은 스케르쪼이며 몰토 비바체의 템포가 빠른 악장이다. 현의 강한 어택과 팀파니의 타격으로 시작하여 "절망에 쫓기며 새로운 행복을 움켜잡으려고 애쓰는"(바그너) 스케르쪼가 잰 걸음으로 달리는 속도에 비해 트리오는 오보에가 호른으로 넘어가는 선명한 선율의 과정이 인상적이다. 제3악장은 이 교향곡의 정서적인 클라이맥스이며 관이 펼치는 조용한 화음의 움직임, 잔 물결처럼 섬세하게 노래하는 현의 아름다움 등 커다란 변주곡의 형식을 따른 악장이다. 사색적인 베토벤의 숭고한 서정이다. 마지막은 낭만적인 뉘앙스에 도취한 듯 끝난다. 제4악장은 먼저 앞의 3악장에 대한 회상을 되풀이 한다. 그리고는 『환희에 부치는 노래』의 주제를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노래한다. 이어 악기를 추가하여 3회 되풀이한다. 그 후 기다렸던 쉴러의 『환희에 부치는 노래』가 나오지만, 그 전에 먼저 바리톤이 "오 벗이여, 이런 가락은 이제 그만 부르자. 보다 우애에 찬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 하고 레치타티보풍으로 노래한다. 이 글은 쉴러가 쓴 시가 아니고 베토벤이 만들어 붙인 가사이다. 계속해서 바리톤이 "환희여, 신들의 아름다운 불꽃이여, 낙원의 딸이여. 세상의 관습이 무정하게 갈라 놓은 것을 너의 마력이 다시 맺어 준다. 너의 부드러운 날개가 퍼덕임을 멈추는 곳에서 사람들은 모두 형제가 된다"는 제1절을 노래하기 시작한다. 앨토, 테너, 베이스의 합창이 이에 제창(齊唱)하고 다음의 4중창에게 바톤을 넘긴다. "한 사람의 친구와 벗이 되는 큰 행운을 얻은 자는, 한 상냥한 여성을 얻은 자는 우리와 함께 기쁨의 목소리를 크게 울려라. 비록 이 세상의 유일한 영혼밖에는 자기 것이 없는 자라 할지라도. 허나 그럴 자격이 없는 자는 울며 살며시 우리의 무리에서 떠나 가라"는 4중창이 합창에 화답하여 차츰 흥분을 북돋운다. 합창이 끝나면 표정이 완전히 바뀐다. '터키 행진곡풍'의 리듬이 있고 나서 테너가 "하늘의 드넓은 길을 지나 태양이 기꺼이 비행하듯이, 형제여, 그대도 그대의 길을 가라. 기꺼이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영웅처럼" 하고 유연(悠然)하게 노래하면 다시 한 번 '환희의 주제'가 뒤를 잇는다. 그리고는 곡이 안단테 마에스토소로 바뀌며 엄격하고 숭고한 찬가 "껴안으라, 수많은 사람들이여, 이 입맞춤을 전세계에 베풀어 주자. 형제여, 별들의 막사 위에 분명 하늘의 아버지가 계신다"를 남성 합창으로 노래한다. 숭고한 쉴러의 인류애와 베토벤의 이상이 여기서 완전히 일치된다. 곡은 더 계속되어 '환희'를 소리 높이 부르면서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다가 이윽고 끝이 난다. --- 안동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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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
불란서의 작곡가 오네게르(Arthur Honegger, 1892~1955)가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내면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고 천재성을 집중하도록 도왔으며 시대의 무미 건조함이나 범용(凡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 말은 그대로 베토벤의 일면을 똑바로 지적한 명언이다. 만약 그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음악사에 간혹 보이는 그런 병약한 천재였다면, 완전한 귀머거리라는 숙명을 짊어지지 않았다면, 아마 『교향곡 제9번』 같은 걸작은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쓸 수 있는 가장 완전하고 위대한, 그리고 강한 호소력으로 모든 사람을 압도적인 감동 속에 이끌고 들어가는 음악, 그것이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이다. 로맹 롤랑은 말한다. 『제9번』은 합류점(合流點)이다. 아주 먼 곳에서 또 전혀 다른 지방에서 흘러든 숱한 분류(奔流), 모든 시대의 인간이 품어 온 갖가지 몽상과 의욕이 이 속에 섞여 있다. 또 이는 다른 여덟 개의 교향곡과는 달리 산꼭대기에 올라 과거의 모든 것을 부감(俯瞰)하는 회고이기도 하다. 『제8번』과 『제9번』사이에 오랜 세월이 가로 놓였기 때문에 그 전망은 한층 더 넓어졌으며 생애의 전집(全集)을 부감하고 비상(飛翔)할 수 있었다. 신비스러운 미지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듯한 곡의 개시, 쾌활한 스케르쪼, 천국적인 평화로움을 간직한 서정적인 악장을 지나, 격렬한 태풍을 연상시키는 도입부로 시작하는 제4악장에 이르러 갑자기 벌떡 일어난 바리톤 가수가 낭랑한 목소리를 돋우어 "오 벗이여, 이런 가락은 이제 그만 부르자. 보다 우애(友愛)에 찬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 하고 호소한다. 그러면 지금까지 참고 기다려 온 합창이 바리톤 독창에 이어 쉴러의 『환희에 부치는 노래』(Ode to Joy)를 부르기 시작하고 네 명의 독창자가 각기 "사람들이여, 서로 손을 맞잡고 전세계의 축복을 받아들이자" 하고 웅대한 사상을 노래한다. 역사상 거대한 인류애의 이상을 이처럼 감동적인 노래로 승화(昇華)시킨 곡은 일찍이 없었다. 베토벤이 청년 시대부터 존경해 온 시인은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와 쉴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였다. 그의 쉴러에 대한 존경심은 평생 변하지 않았다. 그만큼 쉴러의 이상주의적 이념이 베토벤의 주의 주장과 일치했던 것이다. 쉴러가 '환희'와 '인간애' 및 '평화'를 주제로 한 『환희에 부치는 노래』를 쓴 해가 1785년이었다. 그는 이 시를 드레스덴의 엘베 강이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포도밭에서 썼다. 그 이듬해에 잡지에 발표하여 당시 독일 청년들을 감동시켰다. 그 무렵 16세였던 베토벤이 이 시를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본의 청년들은 '맹세의 노래'로 삼고 깊이 존중했다고 한다. 『환희에 부치는 노래』 작곡이 비로소 명확한 형태로 나타난 때가 처음 생각한 시기부터 무려 29년이 지난 1822년의 일이었다. 애초 마지막 악장에 『환희에 부치는 노래』의 대합창을 넣겠다고 구상한 곡은 『독일 교향곡』이었다. 그가 남긴 메모를 보면 "『독일 교향곡』 합창 다음에 변주를 넣지만 생략해도 괜찮다. 교향곡 끝에 터키풍의 음악과 합창을 추가 한다"고 쓰고 있다. 이와 같이 『환희에 부치는 노래』는 처음 『독일 교향곡』의 일부로 구상되어 있었다. 한편, 거의 같은 시기에 그는 또 하나의 교향곡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작품이 베토벤에게는 아홉번째에 해당되는 교향곡이었다. 『제9번』의 구상은 『제7번』과 『제8번』을 만든 1812년경부터 뚜렷한 모습으로 나타났고, 『독일 교향곡』과 마찬가지로 1822년에 이르러 갑자기 구체화되었다. 그 해 10월 10일에 런던의 휠하모니 협회에서 새 교향곡 의뢰를 받았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비로소 혹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번 작품을 음악사상 일찍이 없었던 엄청나게 큰 스케일의 교향곡으로 만들리라 마음 먹었다. 그는 모처럼 쌓아올렸던 『독일 교향곡』의 구상을 내버리고 『제9번』도 근본적으로 다시 가다듬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중요한 단계의 커다란 벽화를 위해, 다시 말하면 유언을 위해"(로맹 롤랑) 『환희에 부치는 노래』를 『제9번』의 마지막 악장에 붙이기로 결심했다. 드디어 1823년 8월경부터 본격적으로 작곡에 몰두하여 이듬해인 1824년 2월에 완성했다. 쉴러의 『환희에 부치는 노래』는 이제야 결실을 맺었다. 구상하기 시작한 지 무려 31년 만이었다. 그가 교향곡 제9번을 완성하기 5,6년 전은 생애에서 육체적으로 가장 고통을 받은 시기였다. 귓병은 차츰 더 심화되어 남과 이야기를 나누려면 필기장을 써야 했고, 거기에 또 폐렴, 황달, 눈병, 위장 장애가 거듭되는 한편,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사람의 가장 큰 특색은 불행하고 괴로운 처지를 꾹 참고 견디는 일"이라고 수첩에 적은 대로 오랜 기간 인고(忍苦)의 세월을 이기면서 '환희'를 찾아 헤맨 끝에 마침내 음악사에 찬연히 빛나는 금자탑을 세우게 된 것이다. 베토벤 57년의 생애에서 가장 감격적인 날이 왔다. 교향곡 제9번의 초연은 1824년 5월 7일(금요일) 오후 7시부터 빈의 케른트나토아 극장에서 거행되었다. 이 날의 프로그램은 1. 서곡 '헌당식' 2.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장엄 미사'에서) 3. 교향곡 제9번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교향곡 제9번을 연주할 때는 정(正) 지휘자 움라우후(Michael Umlauf)외에 베토벤도 지휘봉을 잡고 지휘대에 섰다. 귀가 들리지 않는 그에게 오케스트라나 합창이 들릴 리 없었다. 연주자들은 움라우후의 지휘봉을 지켜보며 따랐다. 베토벤은 공연히 허공에 대고 지휘봉을 휘저을 뿐이었다. 그래도 연주는 무사히 끝났다. 교향곡의 마지막 음이 긴 여운을 남기며 끝났을 때, 이 위대한 작품에 청중은 열광적인 박수로 응했다. 그러나 그 떠나갈 듯 요란한 박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청중에게 등을 돌린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보다못한 앨토 가수 웅거(Frau Unger)가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청중 쪽으로 돌려 세웠다. 비로소 열광한 청중을 보았다. 베토벤은 떨리는 몸으로 청중의 감동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 박수는 좀처럼 멈출 줄 몰랐고 그는 다섯번이나 무대에 불려 나가야 했다. 교향곡 제9번은 프러시아 왕 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헌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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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짜르트의 교향곡 40번
모짜르트의 걸작군인 후기 교향곡 중에서도 3대 교향곡이라 부르는 제39번, 제40번, 제41번『쥬피터』는 모짜르트의 천재를 말할 때 곧잘 거론되는 곡이다. 모짜르트는 이 세 곡을 불과 2개월 안에 작곡했다. 제 39번의 완성일이 1788년 6월 20일, 제40번이 7월 25일, 제41번이 8월 10일로 되어 있다. 더구나 세 곡은 각기 다른 형식과 내용 및 스타일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독일의 음악 평론가 카알 슈토르크는 『모짜르트 그의 생애와 창조』(1908년)라는 글에서 3대 교향곡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1788년 6월 26일부터 8월 10일에 걸쳐 모짜르트는 그 최후이면서 가장 중요한 세 곡의 교향곡, E훌래트 장조, G단조, C장조를 작곡했다. 신속한, 거의 동시라고까지 할 수 있는 작곡은 어떤 내적인 연관성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 기본 내용이 아주 다르다는 것도 이 연관성을 부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세 교향곡은 모짜르트의 위대한 정신적 심정적 인생 고백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기쁨과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지극한 행복의 갈구(渴求)를 나타낸 것이 첫번째 곡이며, 다시없는 깊은 고뇌로 가득 찬 채, 사랑과 공감 때문에 세계의 고뇌를 한몸에 짊어질 수밖에 없어서 그 속에 그만 숨어 버려야만 하는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 두 번째 곡이다. 그리고 세 번째 곡은 모짜르트가 온갖 노력 끝에 드디어 다다를 수 있었던 비할 데 없는 경지, 곧 존재의 정화된 조화를 나타내고 있다….. 모짜르트의 음악을 사랑하기 위하여는 '거짓으로 꾸밀' 필요가 없다. 순수하게 음악적으로 느끼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괴테가 빌란트의 『오베론』을 칭찬할 때 한 말을 약간 바꾸어 이렇게 말할 수가 있다. 음악이 음악이며 황금이 황금이며 수정이 수정인 한, 모짜르트의 음악은 사랑받고 찬양되리라고. 20세기의 위대한 물리학자 앨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죽음이란 모짜르트를 못 듣게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에게 모짜르트의 음악은 잃어버린 정신의 고향일지도 모른다. 천사와도 같은 순수한 시정과 따뜻한 인간애를 그리려 한 클라이버의 모짜르트의 세계에서 우리는 다시금 잃어버린 많은 것을 찾을 수가 있다. "천사가 신을 찬미하려고 바하의 음악을 연주할지 어떨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 모였을 때 모짜르트를 연주하고 또 그러면 신도 그 음악을 기꺼이 경청하리라는 점만은 확실하다"고 한 신학자 카알 바르트의 말대로 온 우주 안에 모짜르트의 음악은 불멸의 존재로 남아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켜 주리라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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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제7번
베토벤 교향곡 제7번 작품 92
교향곡 제5번과 제6번을 발표한 이듬해, 즉 베토벤이 39세였던 1809년에 빈은 또다시 블란서 군에 포위되고 이윽고 군대가 침입해 들어왔다. 원숙기에 들어선 베토벤으로서는 창작력은 왕성했으나 이러한 사회 정세 때문에 한동안 작품을 쓸 수가 없었다. 불란서 군이 물러가고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아 가던 1811년에 이르러 비로소 새 교향곡에 착수하게 되었다. 교향곡 제7번은 1812년 5월에 완성, 1년 반 뒤인 1813년 12월 8일 빈에서 발표했다. 오랜만의 베토벤의 대작에 큰 기대를 건 빈의 음악 애호가들은 연주회장에 몰려들어 열광적으로 작곡가를 맞이했다. 교향곡 제7번은 뒤이어 완성한 제8번 교향곡과 함께 초연되었다. 벡커가 "제7번은 높은 곳으로의 등반을 나타내고 제8번은 겨우 다 올라간 정상의 행복한 상태를 그리고 있다"고 지적했듯이 두 작품은 쌍둥이 같지만 판이하게 성격이 다르다. 로맹 롤랑도 "이 곡에는 다른 작품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솔직하고 자유로운 힘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초인적인 정력의 엄청남 낭비, 그렇다. 그 낭비의 즐거움이다. 넘쳐서 범람하는 대화의 즐거움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교향곡 제7번에는 운명을 걷어차고 나아가는 힘찬 활기와 강렬한 에너지의 폭발 등 베토벤의 성격적 특징의 하나인 디오니소스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리스트가 "음악의 신격화"라고 했고 바그너가 "무도(舞蹈)의 성화"라고 지적한 표현과 같이 이 곡의 핵심은 넘치는 생명력으로 약동하며 열광적으로 휘몰아치는 리듬이다. 교향곡 제7번을 초연했을 때 일부 비평가가 "마치 술주정꾼의 작품 같다"든가 "베토벤은 술집에서 이 곡을 쓴 모양이다"라고 비꼬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음악의 3대 요소 중의 하나인 리듬을 이처럼 중요시하고 이만큼 절묘하게 전개시킨 교향곡이란 지금까지 없었다. 비평가와는 달리 일반 청중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1813년 12월 8일 하나우의 부상 장병을 위한 자선 음악회에서 초연한 이후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 수없이 되풀이 연주했고 특히 제2악장이 많은 앙코르를 받았다. 제1악장 포코 소수테누토 비바체는 기다란 서주부를 지닌 소나타 형식이며 리쯜러는 "그전에도 후에도 베토벤은 이 제1악장 같은 최고도의 함축성을 지닌 하나의 리듬이 거의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음악을 작곡한적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제2악장 알레그레또는 전곡 중 가장 유명한 악장으로서, 엄숙하지만 약간 어두운 정서를 지닌 3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3악장 프레스토는 거친 활기가 넘치는 스케르쪼이며 한층 더 강하게 리듬이 나타나 중간부의 영탄적인 흐름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제4악장 알레그로 콘브리오는 베토벤의 디오니소스적인 성격이 잘 나타난 부분이며 그야말로 격정의 난무라고 해야 할 정도이다. 베토벤은 "나는 인류를 위해 향기로운 술을 빚는 박커스이다. 정신의 거룩한 취기를 베풀어 주는 자는 바로 나다" 하고 장담한 일이 있지만 이 악장은 그 말을 대변하고 있다. 미쳐 날뛰는 노도와 같은 리듬의 향연이 엄청난 열기를 내뿜으며 커다란 클라이맥스를 이룩하는 끝 부분은 듣는 이를 압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