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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새벽에 퇴계의 가에 이르다 바위 곁의 집에서 뜻을 읊다 자하봉에 오르다 퇴계의 초가집에서 황준량(黃俊良)이 찾아옴을 기뻐하다 초가를 퇴계의 서쪽으로 옮기고 한서암이라 이름짓다 3월3일, 빗속에서 느낌이 있어 뜻을 기탁하다 농암 이 선생님이 한서암으로 왕림하시다 퇴계 한서암 퇴계에서 지내면서 이것저것 흥이 일어 한서암에 비가 온 뒤의 일을 쓰다 도연명집에서 「거처를 옮기며」라는 시의 각운자에 화답하다 도연명집에서 음주시에 화답하다 한서암에서 아들 준과 민응기에게 보이다 두보의 유인시에 화답하다 계상서당에서 청명절에 봄날 한가로이 거처하면서, 두보가 지은 여섯 절구의 각운자에 맞추어 짓다 농암 선생이 계당으로 왕림하여 주시다 계당에서 우연히 흥이 일어 계당에서, 7월 13일 밤 달이 뜨다 임자년 정월 2일 입춘날에 대보름날 밤 계당에서 달을 마주하다 청송부사인 이중량에게 답하다 이문량(李文樑)이 계당을 내방하다 초여름 계상에서 한적하게 살며 김부의(金富儀)와 이명홍(李命弘) 두 사람에게 보이다 김언거(金彦?)에게 답하다 병진년 정월 초하룻날 같은 운자를 써서 지어 황준량에게 답하다 황준량과 더불어 『주역』의 그림에 대하여 담론하다 입추날 계당에서의 일을 쓰다 가을 회포 종질인 빙의 집에서 국화를 감상하다가 달빛에 의지하여 계상으로 돌아오다 동재에서의 일을 느끼다 매화 숲에서 거처하며, 네 수를 읊다 계상 동재의 달밤 여름에 숲속에서 거처하면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읊다 퇴계 남쪽의 띠로 이은 서재 계상에서 가을의 흥취가 일다 정유일(鄭惟一)의 「한가로이 거처하다」라는 시 스무 수에 답하다 김취려(金就礪)와 이국필(李國弼)에게 보이다 봄날 계상에서 네 철 그윽히 은거함이 좋아서 읊는다 가물던 끝에 큰 비가 내려 시내에 물이 불었는데, 물이 빠진 뒤에 나가보니 샘과 바위는 깨끗이 씻기고 구명과 웅덩이는 싹 바뀌어 고기들은 뜻을 얻어 멀리 가 그 즐거움을 알 만하다 초가을(7월) 16일에 계상의 서재에서 거처하는데 연일 밤마다 달빛이 매우 맑아 사람을 잠 못 이루게 했다. 오늘 우연히 자하산에 나갔는데 조목(趙穆)이 찾아와 스스로 하는 말이 그가 사는 다래의 밤 경치가 마침 뜻에 맞아 기뻤다고 하였다. 그러나 또 생각해 보니 옛 사람들이 이른바 『비갠 뒤의 바람과 달』 이란 것이 이것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은 듯했다. 감탄하며 돌아오던 중 절구 한 수가 되었기에 조목에게 부친다 김성일(金誠一)이 지은 시의 각운자에 맞추어 지어 주다 계상에서 김부의·김부륜(金富倫)·김성일·금응훈·우성전(禹性傳)과 함께 『역학계몽』을 읽고 절구 두 수를 지어 뜻을 보이고 아울러 손자인 안도에게도 보이다 |
退溪 李滉 (1501-1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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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간 의도
도학자 이퇴계의 또 다른 면모, 한가할 때 흥이 나서 쓴 시들을 만나다 이 책은 퇴계 이황이 만년에 교육에 뜻을 두고 고향인 토계(퇴계)마을에 정착하여 46세(1546년)부터 65세(1565년)까지 지은 한시 중에서 직접 가려 뽑아 엮은(48제 138수) 『퇴계잡영』을 한글로 옮기고 상세히 풀이한 것이다. ‘잡영’이라는 말은 ‘잡시’라는 말과도 통하는데, 아무렇게나 쓴 시라는 뜻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흥취가 생겨날 때, 특정한 내용이나 체제에 구애받지 않고, 어떤 일이나 사물을 만나면 즉흥적으로 지어 내는 시”를 말한다. 이 책에 수록된 시들은 모두 퇴계 선생이 토계마을로 물러나서 아침저녁으로 마주하는 맑은 시냇물과 푸른 산, 새로 마련한 보금자리, 저녁에 뜨는 달, 철따라 바뀌어 피는 꽃 등과 같은 것들을 대할 때마다 저절로 흥이 나서 쓴 즉흥시들이다. 이들 작품 중에는 이현보와 황준량 등 향리 선비들과의 교유, 김성일, 조목, 김부륜 같은 향리의 급문제자 및 정유일, 김취려, 이국필 등 타지에서 입문한 제자들과의 교유도 잘 나타나 있어 그의 당시 생활상의 일면과 인간적 면모를 느끼게 해준다. 퇴계 선생과 시문들 퇴계 선생은 예안의 온혜(溫惠, 지금의 도산면 온혜동)라는 마을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21세에 영주의 초곡(草谷: 푸실)이라는 마을에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던 허씨 댁에 장가를 갔는데, 이 허씨 부인은 퇴계가 27세가 되도록 그 당시의 풍속대로 7년 동안 친정집에서 그대로 살다가 죽었다. 그러나 퇴계는 남들처럼 처가살이를 하지 않고 그대로 온혜에 머물러 노모를 봉양하면서 가끔 영주로 내왕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30세 때에는 풍산이 고향인 권씨 부인을 재취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 부인은 정신적인 장애가 많아서 자식도 없는데다 주부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다. 31세가 되자 온혜 마을 남쪽에 잠시 별도로 집을 짓고 살기도 하였다. 벼슬을 할 때는 서울에 올라가 머물렀으며, 권씨 부인도 서울에서 죽었다. 23세 때 낳은 맏아들 준(寯) 역시 일찌감치 가까운 마을로 장가를 가서는 처가살이를 계속하였고, 둘째 아들 채(寀)는 의령에 있는 처삼촌 댁에 수양손으로 들어가서 자랐으며, 그곳에서 재산도 얻고 장가까지 갔으나 자식도 없이 곧 죽었다. 31세 때 적(寂)이라는 서자가 태어났는데 그 어머니는 창원(昌原)의 관속(官屬) 출신이었지만 상당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집안의 주부 노릇을 계속하고 있었음을 퇴계가 맏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퇴계 선생이 후세에 남긴 저술을 모은 책으로는 문집인 『퇴계선생문집』(목판본 61권, 37책, 성대 영인본 2.5책)을 비롯하여, 문집 이외의 여러 저술까지 다 모아 엮은 『퇴계전서』(위의 문집 포함, 성대 목판 영인본 5책), 『도산전서』(문집 포함, 정문연 필사 영인본 4책) 같은 것들이 있다. 이러한 책들을 보면 퇴계 선생이 평생 동안 썼던 한시가 대개 2,000수 이상, 편지가 1,000통 정도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집에 수록되지 않은 시로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만 해도 수백 수는 족히 될 것 같으며, 그가 썼던 편지로 위에 언급하였던 책에 수록되지 않은 것이 또한 2,000통 정도는 될 것이라고 한다. 『퇴계잡영』은? 퇴계 선생은 온혜를 떠난 뒤로 몇 차례나 가까운 마을로 집을 옮겨가며 살다가 중년(40대 중반) 이후에 비로소 토계(兎溪, 또는 土溪, 지금의 도산면 토계동)라는 마을에 정착하여 살면서 자신의 호를 퇴계(退溪)라고 고쳤는데, 이 책은 그 토계마을에서만 지은 시를 손수 모아 필사하여 둔 것을(뒷날 목판본으로 간행됨) 필자와 장세후 선생이 함께 번역하고 주석과 해설을 붙인 것이다. 도산서당에서 지은 시를 모아 엮은 것을 『도산잡영』이라고 하는데, 이 『퇴계잡영』과 합하여 『계산잡영(溪山雜詠)』이라고 한다. 이 『계산잡영』의 퇴계 선생의 친필 원본은 지금 대구의 계명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잡영』의 친필본이나 목판본을 보면 위에서 말한 목판본, 또는 필사본 『퇴계문집』에 수록된 같은 내용의 시와는 가끔 글자도 틀리고, 제목도 약간 다른 것이 보인다. 아마 만년에 들어 이전에 썼던 시를 보고서 다시 손질을 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여기 실린 시들이 모두 ‘토계’(또는 퇴계)라는 특정한 마을에서 지은 노래라는 것 밖에 또 무슨 공통된 특징들이 있을까? 우선 퇴계 선생 자신이 이 시집의 이름을 “잡영(雜詠)”이라고 하였는데, 왜 그렇게 하였을까? 사전(『漢語大辭典』)에 보면 ‘잡영’이란 말은 “생겨나는 일에 따라 읊조리는 것인데, 시의 제목으로 상용된다(隨事吟詠, 常用作詩題)”라고 하였다. 비슷한 말로 ‘잡쎽(雜詩)’라는 것도 있는데, “이러저러한 흥취가 생겨날 때, 특정한 내용이나 체제에 구애를 받지 않고, 어떤 일이나 사물을 만나면 즉흥적으로 지어내는 시를 말한다(興致不一, 不拘流例, 遇物卽言之詩)”고 되어 있다. 실제로 이 『잡영』에 수록된 시의 제목이나 제목의 뜻을 설명한 말[題注]들을 보면 ‘∼잡흥(雜興)’, ‘∼서사(書事)’, ‘∼우흥(偶興)’, ‘∼감사(感事)’, ‘∼즉사(卽事)’, ‘∼우감(寓感)’, ‘∼흥(興)’, ‘∼영(詠)’, ‘∼음(吟)’, ‘∼우성(偶成)’, ‘∼득(得)’이라는 말이 많이 나타나는데, 모두 위에서 말한 “이러저러한 흥취가 생겨날 때 즉흥적으로 읊조리는 것”이라는 공식에 맞추어보면 다 들어맞는 것 같다. 그러니 이 『퇴계잡영』에 수록된 시들은 모두 퇴계 선생이 벼슬에 대한 생각을 미련 없이 버리고 퇴계마을로 물러나서, 아침저녁으로 마주하는 맑은 시냇물과 푸른 산,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향리의 선배들과 제자들, 조용히 음미해가며 읽을 수 있는 책, 새로 마련한 보금자리, 저녁에 뜨는 달과 철따라 바뀌어 피는 꽃…… 등과 같은 것을 대할 때마다 저절로 흥이 나서 쓴 즉흥시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집에는 하나의 제목 아래 많게는 20여 수까지 이어서 쓴 연작시들이 다수 보이는데, 이러한 시들 또한 모두 흥이 생겨나서 쓴 시들이기는 하지만, 즉흥시라고 하기에는 좀 적절하지 않은 것 같고, 오히려 자못 생활에 여유가 묻어나니까 느긋하게 지어서 모아 놓은 사유시(思惟詩)의 성격을 띤 것들이 많다고도 할 수 있겠다. 또 시의 제목에 자주 등장하는 말로 ‘유거(幽居)’, ‘한거(閑居)’, ‘임거(林居)’ 같은 말이 있는데, 모두 “남모르게 한가로이” 지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서(寒棲)’라고 할 때에 ‘서(棲)’자에도 역시 “마음놓고 쉰다”는 뜻이 있으니, 비슷하다고 하겠다. 벼슬에서 물러나와 시골에서 살고 있으니 저절로 모든 생활이 ‘한가해’진다고도 할 수 있고, 또 의식적으로 그러한 것을 추구하였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퇴계와 같은 철학자나 시인에게는 이 ‘한가함(閑)’이야말로 대자연과 내가 하나가 될 수 있는[天人合一, 또는 物我一體] 길에 이르는, 즉 도(道)에 통하는 수단이 된다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이 시집에서 유심히 볼 것은 「……의 시에 화답하다(和……)」, 「…… 시의 각운자에 맞추다(次韻……)」라는 시들이다. 소동파 시의 각운자를 사용한 것이 1제(題) 2수(首), 두보의 시에 화답한 것이 2제 8수, 한유의 시에 화답한 것이 11수, 이회재 시에 각운자에 맞춘 것이 4수, 제자인 정유일의 시에 화답한 것이 20수, 김성일의 시에 차운한 것이 1수 등이다. 이 가운데에서 특히 도연명의 시에 화답한 시가 가장 많다. 이전의 누구누구 시에 화답한다든가, 차운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시들을 좋아하였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집에 나타난 것으로 보면 이퇴계는 퇴계로 물러나온 후에는 도연명의 시를 가장 좋아하였고, 두보와 한유?소동파의 시도 즐겨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도산잡영』과『퇴계잡영』의 차이 이 책과 자매편이 되는『도산잡영』은 퇴계 선생이 이 토계마을에서 계속하여 살면서, 60대를 넘어서자 도처에서 모여드는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이 마을에서 서쪽에 있는 고개를 하나 넘어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산언덕에 별도로 도산서당을 짓고서, 그 서당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노래한 시들을 모아둔 자작시 선집이다. 다 같이 향리로 돌아와서 사는 즐거움을 노래한 시를 뽑아 두었다는 점에서는 같은 점이 있으나, 각각 지은 시를 연대에서 차이가 있기도 하며, 『퇴계잡영』에서는 이미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도연명과 같은 은자의 모습이 두드러지나, 『도산잡영』에서는 주자와 같은 도학자의 모습이 더 두드러지는 것이, 이 두 시선집의 차이이다. 그런데 시작(詩作) 연대를 가지고 보면 『퇴계잡영』에 수록된 시가 『도산잡영』보다 앞서 지어지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나중에 지어진 시들까지 포괄하고 있다. 이 밖에 퇴계 선생은 이 부근의 청량산(淸凉山)과 낙동강 구비의 모습을 읊은 시와 문장도 많이 지었는데, 선생의 제자들이 위의 시선집들과는 별도로『오가산지(吾家山志)』라는 이름의 관련 시문집을 엮어 내기도 하였다. ‘오가산’은 청량산을 말하는데, 선생의 집안 선비들이 흔히 이 산의 산사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우리 집의 산”이라는 뜻으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퇴계잡영』,『도산잡영』,『오가산지』의 3책은 퇴계 선생의 전원생활, 향토에서의 삶을 이해하는 데 매우 의미 깊은 사화집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유가에서는 서방의 불교나 기독교 같은 종교처럼 내세의 행복을 추구하는 생각이 없고 시가나 그림 같은 문예작품이 오히려 현실의 고단함을 위로하는 종교와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고 하는데, 이퇴계의 경우에도 이러한 시 작품들이 그의 병약한 육체와, 또 개인적으로 그리 유목했다고는 볼 수 없는 삶에 큰 위안이 되고, 큰 활력소가 되었을 것이다. 속세의 번잡함을 뒤로한 채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의 관조적 삶의 태도, 소박하고 운치 있는 일상의 노래는 각박한 일상을 되풀이하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하는 청량제가 되어줄 것이다. 2. 주요 내용 초가를 퇴계의 서쪽으로 옮기고 한서암이라 이름짓다 초가집 골짜기 바위 사이로 茅茨移構澗巖中 옮겨 얽으니, 때마침 바위의 꽃 正値巖花發亂紅 흐드러져 붉게 피었네. 예로부터 지금까지 古往今來時已晩 때 이미 늦었지만, 아침에 밭 갈고 밤에 책 읽으니 朝耕夜讀樂無窮 즐거움 끝이 없네. 띠풀을 엮어 이엉을 이은 거친 집을 시냇물이 흐르는 골짜기 사이의 바위로 옮겨 지었는데, 때마침 봄을 맞아 바위 주변의 온갖 꽃들이 붉은 색으로 흐드러지게 피었다. 옛날부터 꿈꾸어왔던 생활이라 가만 생각해 보니 세상일에 휘말려 이미 많이 늦어졌다. 그래도 다행히 늦게나마 이렇게 아침에 일어나 낮에는 밭을 갈며 농사를 짓고, 해가 저물어 어두워져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으면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켜놓고 책을 읽는 생활을 해보니 그 즐거움이야말로 정말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끝이 없다 하겠다. 퇴계 몸 물러나니 어리석은 내 분수에 편안한데, 身退安愚分 학문이 퇴보하니 늘그막이 걱정스럽네. 學退憂暮境 퇴계의 가에 비로소 거처 정하니, 溪上始定居 흐르는 물 굽어보며 날로 반성함이 생기네. 臨流日有省 이 몸이 분수에도 맞지 않는 관직 생활에서 이곳 퇴계로 물러나고 보니 어리석은 내 천성에 더 없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곁에서 서로 자극하며 함께 학문을 경쟁하던 사람들이 없어져 그것 때문에 학문이 퇴보하지나 않을까 늘그막이 걱정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이 퇴계의 시내 가에 막 거처를 정하여 살면서, 이따금 냇가에 서서 흐르는 물을 굽어본다. 그러노라니 공자가 흐르는 물을 보고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과 낮을 가리지 않는구나!” 하시며 탄식하던 것이 생각나서 날마다 내 몸을 돌아보며 반성을 할 수 있게 된다. 네 철 그윽히 은거함이 좋아서 읊는다 봄날 그윽이 거처하니 좋을시고, 春日幽居好 수레바퀴며 말발굽소리 문에서 멀리 떨어졌네. 輪蹄逈絶門 동산의 꽃은 참된 성정 드러내고, 園花露情性 뜰의 초목은 건곤의 이치 오묘하네. 庭草妙乾坤 아득하고 아득하게 하명동에 깃들어, 漠漠棲霞洞 까마득히 물 곁의 마을에 있네. ??傍水村 돌아오며 읊는 즐거움 모름지기 알 것이니, 須知詠歸樂 기수에서의 목욕 기다리지 않으리. 不待浴沂存 봄날 그윽하게 은거하여 사니 좋은 것이 있다. 수레가 덜커덩거리며 지나가는 소리랑 말이 지나가며 내는 발굽 소리가 내가 사는 집의 문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끊어졌다는 점 때문이다. 동산에 핀 꽃은 인위적인 모습이라고는 없이 자연 그대로의 참된 성정을 드러내고 있고, 뜰에 군데군데 난 풀은 건곤의 이치를 오묘하게 담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과는 까마득하게 동떨어진 하명동에 깃들어 사는데, 이곳은 가물가물한 시내를 끼고 있는 물 곁의 마을에 있다. 이곳만 해도 봄날을 맞아 목욕을 하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는 즐거움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니. 구태여 공자와 제자들이 기수에서 목욕을 하고 바람을 맞으며 돌아오던 즐거움을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도연명집에서 「거처를 옮기며」라는 시의 각운자에 화답하다 내 난 지 오십 년에, 我生五十年 이제사 반이나마 지은 집 가졌다네. 今有半成宅 땅 치우쳐 있으니 찾아오는 이 드물고, 地僻人罕至 산 깊어 해 빨리 지니 쉬이 저녁 되네. 山深日易夕 또한 살아가는 일 서툴러 쓸쓸함 알겠지만, 亦知生事? 그래도 육체의 노예로 수고롭힘보다는 낫다네. 猶勝勞形役 힘 덜고자 묵은 재목 걷어치우고, 省力撤舊材 편의한 대로 헤진 자리 펴리라. 隨宜展?席 실로 궁벽한 절개 논하지 말게나, 無論固窮節 전원을 좋아하는 성격 예로부터 잘 어울렸으니. 野性諧夙昔 실로 도가 같지 않다면, 苟爲不同道 천 마디 말로도 판단하기 어렵다네. 千言難剖析 생각해 보니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지도 어언 50년이나 되었는데, 그 동안 명예와 관직을 좇아 정처없이 이곳저곳을 방황하고 돌아다니느라 변변한 집조차 하나 없다. 이곳 퇴계의 가로 내려와서야 그래도 겨우 반이나마 이루어진 평생을 기탁할 집을 하나 가지게 되었다. 집터를 잡은 땅이 사람들 사는 곳과 떨어진 구석진 곳이라 찾아오는 이들이 드물고, 또 산 속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았으니 해가 빨리 져서 쉬 저녁이 되곤 한다. 이런 곳에 집을 지어 살아가다 보니 세상의 일과는 날로 멀어져 쓸쓸해짐을 알겠지만 그래도 자유로워야 할 정신이 육체의 노예가 되어 구속당하고 부림을 당하여 괴롭게 되는 것보다는 한결 낫다. 힘을 덜고자 하여 묵은 재목은 철거하여 걷어치우고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겉치레를 꾸미는 것도 이제는 필요 없으니 그저 내 편한 대로 해진 자리를 펴고 마음 편안히 거처하고자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군자는 본래부터 궁한 법이다”라 한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다. 궁하게 살더라도 전원을 좋아하는 것이 성격상 옛날부터 나와는 정말로 잘 어울렸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가 이렇게 거처하는 것을 보고 모두들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지만 실로 추구하는 도가 서로 같지 않다고 한다면 천 마디 만 마디 아무리 말을 많이 하여도 결국은 판단이 서지 않고 도만 해치게 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