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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우물 안 역사 의식’을 벗어나기 위해
제1장 세도정치로 요동치는 조선 세도정치가 시작되다 균역법의 빛과 그림자 “관서는 재부와 화려함이 나라에서 최고다” 가산 다복동에 모이다 역사 속의 역사 1 : 세도가의 쌍두마차, 김조순과 조만영 제2장 민란과 변란이 일어나다 미곡전 습격사건 삼남에서 민란이 일어나다 상민보다 못한 양반 이필제, 조선을 네 개의 제후국으로 나누려 하다 엽관적인 변란 향리들의 신분 상승 운동 역사 속의 역사 2 : 흥선대원군, 서원을 철폐하다 제3장 19세기 동아시아의 풍경 “눈과 같이 흰 은이 10만 냥이 쌓인다” 아편전쟁, 중국 근대사의 시발점 미국과 러시아의 일본 문호 개방 전쟁 220여 년의 쇄국이 무너지다 역사 속의 역사 3 : 미국과 멕시코의 영토 전쟁 제4장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다 조선을 노린 미국과 일본 러시아의 야심 청과 일본의 동상이몽 조선을 칠 것인가 말 것인가 유구를 손에 넣고 조선의 문호를 연 일본 《조선책략》을 건네받다 서양 세력과 수교하면 금수의 길로 치닫는다 조선, 열강에 문호를 열다 역사 속의 역사 4 : 홍수전, 태평천국을 건설하다 제5장 임오년에 군인이 난을 일으키다 쌀값이 폭등하다 “일본군이 조선왕을 포로로 잡아 도쿄에 안치할 것입니다” 조선을 만주에 편입시켜라 역사 속의 역사 5 : 말단 장교에서 대총통까지, 위안스카이 제6장 갑신년에 조선의 근대화를 시도하다 개화파, ‘신서新書’들을 열독하다 조선, 러시아를 끌어들이다 개화파, 갑신년에 정변을 일으키다 “군왕의 의심이 있게 하고 인민의 앙심이 돋게 했다” 조선이 몰랐던 톈진 조약 역사 속의 역사 6 : 시대의 풍운아, 김옥균이 스러지다 제7장 갑오년에 농민이 새세상을 꿈꾸다 오쓰大津 사건 “뛰어든 여공의 시체로 스와 호수가 얕아졌다” 조선의 기마병은 판토마임극의 단역이다 화적이 없는 날이 없고 없는 곳이 없다 동학, 농민전쟁의 기반이 되다 동학교도의 교조신원운동 전봉준의 창의하다 전주화약을 맺다 “어떠한 수단도 가리지 말고 개전의 구실을 만들도록 하라” 일본이 청에 선전포고하다 “문명의 가면을 벗고 야만의 모습을 드러내다” 동학농민전쟁, 우금치에서 막을 내리다 역사 속의 역사 7 : 전봉준을 사형에 처하노라 제8장 청일전쟁의 후폭풍이 불다 일본이 승승장구하다 최초의 시가전이 벌어지다 청이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다 타이완,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을 지향하다 역사 속의 역사 8 : 빌헬름 2세, 삼국에 선전포고를 하다 제9장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미우라가 제시한 3가지 방안 명성왕후를 암살하다 춘생문 사건 아관으로 파천하다 역사 속의 역사 9 : 조선을 근대적인 체제로 개혁하다 제10장 대한제국이 수립되다 윤정효의 상소문 “서양 신사들은 참으로 짐승 같은 자들이로다” 못된 당나귀 같은 이홍장 외국인 호위병에게 보호를 구걸하다 조선군, 러시아식 군사교육을 받다 칭제건원을 상소하다 역사 속의 역사 10 :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제11장 독립협회와 의회 설립 운동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 “시랑을 사오십 마리 대궐 내에 두는 것보다 위태하다” 김홍륙 독다毒茶 사건 프랑스혁명 같은 의회 설립 운동 ‘익명서’를 내다 붙이다 국왕의 국민에 대한 배신 수구파와 보부상이 권력과 금력을 독점하다 역사 속의 역사 11 : 황국협회와 보부상 제12장 독일의 식민지 전쟁 식민기지를 물색하다 자오저우만을 점령하다 열강, 청의 영토를 조차하다 역사 속의 역사 12 : 캉유웨이, 청을 개혁하다 제13장 중국의 의화단 운동과 러시아의 만주 점령 의화단의 반기독교 운동 의화단과 연합군이 다구에서 만나다 만주, ‘제2의 부하라’가 되다 러시아, 대한제국의 중립화안을 제안하다 역사 속의 역사 13 : 보어인들이 영국에 맞서다 제14장 영국, 러시아 그리고 일본 영국과 일본이 손을 잡다 ‘탐학’이 ‘화적’보다 심하다 조선 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 알렌, 러시아를 지지하다 역사 속의 역사 14 : 전쟁 영웅, 시어도어 루스벨트 제15장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 “일본은 사활을 걸고 싸우고 러시아는 저녁식사를 위해 싸운다” 일본의 선전포고 한일의정서로 을사조약의 발판을 마련하다 유대인 병사들은 일본군의 총알 세례를 받았다 폴란드 독립운동가, 일본? 접근하다 “우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 일본, 강화 협상을 바라다 러시아 발트 함대의 궤멸 역사 속의 역사 15 : 러시아의 무적함대, 발트 함대 제16장 러시아와 일본의 뒤바뀐 운명 러시아와 일본, 포츠머스 군항에 도착하다 “배상금과 영토를 모두 단념한다” “조기弔旗를 들고 맞아들이자” 역사 속의 역사 16 : 러시아와 일본의 쿠릴열도 분쟁 제17장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하다 외부인外部印을 탈취하여 조인한 을사조약 공식 기록에는 빠진 수많은 전쟁 역사 속의 역사 17 : 일제의 파수꾼, 일진회 제18장 비운의 대한제국 “일체의 통치권을 영구히 일본국에 양여한다”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도록 하라” 지배층의 파렴치한 행태 “그들이 당신들을 소화하지 못하게 할 수는 있다” “주여, 여러 민족의 자유를 위해 큰 전쟁을 내려주소서” 폴란드, 독립을 위해 싸우다 “우리는 사회주의 열차를 타고 왔지만, 나는 ‘독립’이라는 역에서 내렸다” 윤치호의 조선관朝鮮觀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은 조선이었지 일본이 아니다” 역사 속의 역사 18 : 순종이 일본을 방문하다 에필로그 한국 근대사의 ‘진실’을 찾아서 참고문헌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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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과 대조적인 것이 변란變亂이었다. 변란은 대체로 향촌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불우하게 살던 저항적 지식인들이 주도하여 정권 탈취를 목적으로 일으키는 무장 반란이다. 소수의 가문이 관직을 독점하는 세도정권의 성립과 매관매직의 성행으로 양반층 내부의 계층 분화는 더욱 촉진되었다. 대다수의 양반은 정권에서 소외되었으며 과거의 문란과 매관매직의 성행으로 정상적인 관직 진출은 극히 어려워졌다. 이로써 관직 진출이 불가능해지고 경제적 여유도 없었던 양반 가운데는 상민들보다 못한 부류도 많아졌다. --- p.35
위정척사론은 18세기 말 이후 천주교가 유입되어 점차 퍼지고 서양 열강들의 선박이 자주 조선 연안에 출몰하면서 고양되었다. 성리학자들에 따르면 이적은 그래도 ‘사람’이지만 서양인들은 ‘금수’였다. 그러므로 천주교와 같은 서양 종교가 침투한다든지, 그것을 믿는 서양 세력과 수교하면 사람들은 금수의 길로 치달아 오륜과 오상은 깨어지고 이것으로 유지되는 왕조의 질서도 무너진다고 믿었다. 병인양요丙寅洋擾(1866년)와 신미양요 때 위정척사론의 기세는 드높았다. --- p.82 1885년에 성으로 승격되었던 타이완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의 식민지로 넘겨졌는데, 타이완 주민은 이에 반발하여 5월 24일 청에서 독립하는 것과 타이완민주국 수립을 선포했다. 5월 29일 일본군이 타이완에 상륙하자 타이완민주국 정규군과 민중은 유격전으로 맞섰다. 그러나 타이베이臺北가 함락되고 9월 7일에는 장화彰化가 함락되어 타이완민주국은 붕괴했다. 이후 잔존세력에 의한 저항은 계속되었으나 점차 일본의 지배가 확립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타이완민주국이 아시아 최초로 공화국을 지향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 p.185 의화단은 1900년 4월 들어 베이징에도 나타났고 청 정부의 보수파들은 이들을 ‘의민義民’이라 하며 맞아들였다. 또한 동복상董福祥이 지휘하는 감군甘軍도 베이징으로 들어왔다. 동복상은 청일전쟁 직후 간쑤성에서 회교도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었다. 하지만 진압할 힘이 없던 청 정부는 회유책으로 동복상을 베이징 수비대장으로 임명하고 그의 부대를 근위병으로 근무하게 했다. 이것이 감군인데 배외감정이 강한 이들은 외국인을 자주 습격했다. 외국 사절들의 항의로 청 정부는 이들을 베이징 밖에 주둔하도록 했다. 의화단과 감군이 베이징에 들어오자 베이징은 배외 열기로 가득 찼다. --- pp.273-274 이 조약의 체결에서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 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은 끝까지 ‘불가不可’ 주장을 고수했다. 나머지 학부대신 이완용을 비롯하여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 등 이른바 ‘오적五賊’은 책임을 고종에게 미루면서도 일본의 강박을 견디지 못하고 찬의를 표했다. 고종 또한 조약이 체결되던 날 밤에 이토 히로부미의 알현 요구를 거절하면서도 ‘정부대신과 협력하라’고 책임을 대신들에게 미루었다. 전제군주제하에서는 조약 체결에 군주가 무한 책임을 지므로 고종도 ‘오적’ 못지 않다고 봐야 할 것이다. --- p.3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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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속에서 바라본 한국 근대사의 진실
19세기부터 서구 열강들은 제국주의의 기치 아래 식민지 쟁탈전을 펼쳐 힘이 없는 나라를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 조선도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열강들의 식민지 그물망에 잡혀 강제적으로 문호를 개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본은 적극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사회로 진출했다. 조선은 중국과 사대책봉관계의 틀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안위는 중국의 입김에 좌지우지되었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에 ‘정명가도征明假道’라는 미명하에 조선을 침략했으며, 러일전쟁 때에도 조선을 발판으로 삼아 만주 대륙을 지배하려는 야욕으로 조선을 짓밟았다. 당시 조선은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처럼 19세기부터 조선은 서구 열강과 주변국들에게 맛있는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조선은 그에 대응할 힘이나 자존심마저 없었다. 고종은 서구 열강, 특히 러시아와 미국과 독일 등의 원조에만 기댔고, 관리들은 권력에 눈이 멀어 국가의 존망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리고 19세기 말 이후 조선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언제든지 꺼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나라로 전락해버렸다. 1863년 조선의 제25대 왕인 철종이 사망하자, 고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후 1910년 한일합방까지 조선과 대한제국은 숱한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으며, 급기야 1910년에 일본에 강제적으로 나라를 빼앗겼다. 그 중간에 외세에 의한 문호 개방이라는 근대화의 시작을 열었지만, 다시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으로 세계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다. 만약 조선이 개방과 개혁으로 세계사의 흐름에 편승했다면, 지금 21세기의 한국사는 어찌되었을까? 이 책은 조선 후기인 19세기 중엽부터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한 1910년까지의 역사교양서다. 19세기 중엽의 조선은 세도정치가 극에 달해 전국적으로 민란과 변란이 일어났다. 이에 조선은 지금까지 겪어보지 않은 내란으로 인해 극심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현재까지 수많은 역사서들이 출간되었지만, 한국 근대사를 다룬 도서는 그리 많지 않다. 또한 한국 근대사를 세계사의 일부로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일국사一國史’적 역사 서술에 기댄 측면이 많았다. 한국의 근대사를 한국적 처지에서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한국 근대사는 실패와 좌절과 열패감이 가득 찬 부끄럽고 가슴 아픈 역사이거나 스스로 자족하는 아전인수식 역사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 근대사에서 조선 정부와 위정자들은 모두 자신의 이익에만 급급한 나머지 토탄에 빠진 백성들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보전하기 위한 보신주의에 빠진 나머지 서구 열강의 강압적인 압력에 문호를 개방했고, 순식간에 조선은 열강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이 책은 세계사의 틀 속에서 한국 근대사를 바라보는 최초의 시도이다. 서구 열강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한국 근대사가 왜 이렇게 자위와 자학의 그늘에 푹 파묻혀 지냈는지, 세계사의 흐름 속에 한국 근대사를 제대로 평가해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세계사 속에 한국 근대사의 위치를 정치精緻하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부패가 반세기 동안 이어지다 19세기 중엽부터 조선은 세도정치로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세도가의 대표격인 김조순과 조만영 일파는 조선 정국을 주도하면서 권력과 부를 독차지했다. 영조는 탕평책을 실시해서 붕당의 대립을 완화했지만, 미봉책에 불과했다. 권력층에게 토탄에 빠진 백성들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런 사회적 혼란은 민란과 변란이 일어나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했다. 1862년에 일어난 임술민란이 대표적이다. 당시의 사회상은 윤면동의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전에 권세가들이 이리 같은 탐욕을 부리자, 온 세상 사람들이 이를 본받았습니다. 수십, 수백 만 냥의 돈을 팔도에 유통하여 한 뼘의 토지라도 매입할 수 있으면 곧 가격을 더 쳐주어 매입하므로 토지 가격이 몇 배로 올랐다. 이에 가세가 미약하고 재산이 적은 이들은 처음부터 감히 다투어 사들이지 못하여 온 나라의 거의 모든 토지가 세력 있는 자들의 수중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으면서, 세계사의 일부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이나 중국처럼 적극적으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면서 문호를 개방한 것과는 달리 조선은 강제로 혹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나라를 서구 열강의 먹잇감으로 내놓았다.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1910년 한일합방까지 조선이 구미 열강과 맺은 조약들은 거의 대부분 불평등 조약이었으며, 조선 또한 어떤 계획이나 비전을 갖고 맺은 조약이 없었다. 물론 1884년 개화파들에 의해 조선의 근대화가 시도되었고, 동학농민전쟁으캷 부패된 정권을 징벌하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또한 독립협회의 자주적인 활동도 고종과 조선 정부 대신들의 아둔함을 깨우쳐 주기에 역부족이었다. 한마디로 조선에는 아직 개혁과 근대화라는 단어가 익숙지 않았던 것이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에서 보듯이, 조선은 자주나 독립보다는 남의 나라에 기대 사는 기생충에 불과했으며, 러시아와 일본을 등에 업은 일파들의 전장戰場이 되어버렸다. 결국 조선은 반세기 동안의 부패와 무능을 견디지 못하고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만다. 세계사,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1840년 영국과 청 사이에 아편전쟁이 일어나 1842년에 청은 영국과 난징 조약을 맺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1844년에는 미국과 왕샤 조약, 프랑스와는 황푸 조약을 맺었다. 이처럼 중국은 근대적 국제법에 따른 조약을 맺어 중국 근대사의 시발을 알렸다. 한편 일본도 220여 년 동안 지켰던 쇄국의 문을 열었다. 먼저 1856년 1월에 네덜란드와 조약을 맺고, 1858년 7월에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었다. 조선이 구미 열강에 문호를 개방할 즈음, 청은 조선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러시아의 야심과 일본의 대륙 진출도 청이 조선에 관심을 갖게 한 직접적 이유였다. 이홍장은 청의 안전 보장을 위해서는 조선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건상과 묄렌도르프를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을 통제하도록 했다. 메이지유신의 일등공신이자 사쓰마번 출신의 사이고 타카모리 등 일본의 정한론자들은 조선 병합을 주창했다. 하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자 유구를 손에 넣고 조선의 문호를 강제적으로 개방시켰다. 한편 조선에서는 “서양 세력과 수교하면 금수의 길로 치닫는다”고 하면서 척사론이 대두되게 되었다. 러시아와 일본은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웠다. 두 나라는 조선에 대한 야심을 감춘 채 서로의 야심을 위해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특히 1891년에 일어난 ‘오쓰 사건’은 일촉즉발의 위기를 만들어냈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가 일본인에 의해 부상당한 이 사건으로 일본은 러시아의 보복을 두려워해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러시아를 위로해야 했다. 결국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일본은 사활을 걸고 싸우고 러시아는 저녁식사를 위해 싸운다”고 할 정도로 두 나라가 전쟁에 임하는 태도는 아주 달랐다. 19세기는 제국주의가 활개를 치던 시기였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하여 구미 열강들은 아시아나 제3세계에서 식민지를 획득하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을 일으켜 식민지를 개척했다. 특히 독일은 19세기 후반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해외 식민지에 대한 필요를 절실하게 느꼈다. 빌헬름 2세는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이 청에 흑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청에 기항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결국 청의 자오저우만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식민지 개척의 장을 열었다. 당시 구미 열강은 중국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이것은 1898년 '르 프티 주르날'지에 실린 풍자화를 보면 그것을 여실히 알 수가 있다. 세계사 속의 한국 근대사, 한국 근대사 속의 세계사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에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겼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조선에 대한 야심을 오랫동안 키워왔으며, 결국에는 그들의 욕심대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러일전쟁 당시에 일본은 조선을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았고, 러일전쟁 후에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조선의 식민지화를 본격적으로 진행시켰다. 주변국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고종과 정부 대신들은 힘없이 나라를 일본에 넘겨주었다. 당시 러시아는 대한제국의 중립화안을 제안하기도 했고, 미국 공사 알렌은 루스벨트에게 러시아를 도와 대한제국의 일본 식민지화를 막아야 한다고 주창했다. 이처럼 당시 조선은 주변국들의 역학관계에 따라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그러한 국제 사회의 역학관계를 인식하지 못했고, 군사력 또한 미흡하기 그지없었다. 영국의 정치가 조지 너대니얼 커즌은 조선군을 ‘판토마임극의 단역’으로 비하하기도 할 정도였다. 급기야 량치차오는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은 조선이었지 일본이 아니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폴란드는 우리와 같은 역사적 상흔을 겪었지만, 정반대의 역사를 만들었다. 폴란드는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힘들고 어려운 역사적 고비를 넘어 공화국으로 탄생했는데, 이는 기적이었다. 폴란드의 독립은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제정이 모두 무너진 힘의 공백 상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할 3국에 동화되지 않고 꾸준히 독립을 추구한 폴란드 민족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독립은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독일 황제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감금되기도 했다. 그는 석방 후 “우리는 오랫동안 사회주의 열차를 함께 타고 왔다. 그러나 나는 ‘독립’이라는 역에서 내렸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고 동료 사회주의자들에게 일갈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