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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글
1부 눈 그친 저녁 풀도 잠을 잡니다 파부인 흰 꽃송이 꽃짐 밤은 밝다 저는 꽃 도둑입니다 민들레 피리 뽕나무 아래 모기장을 쳤습니다 어린 가래나무에게 초봄 아침 떨켜와 얼음의 시간 눈 그친 저녁 2부 명랑한 저 달빛 아래 공중에 음악을 매달고 짧은 불안, 오랜 습관 성격 한밤중에 바느질을 하다가 빨래터에서 새우젓 항아리 명랑한 저 달빛 아래 제대로 질문하기 흐린 날의 기도 트랜지스터가 생겼습니다 “인생은 짧으니 오롯이 즐겨야 한다” 편지 도서관 언덕길을 오르며 3부 내 마음속의 종달새 우체통 속의 새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내 마음속의 종달새 빼빼와 꿋꿋씨 내가 이름 붙인 새들 나비, 꽃이 꽃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거위 알 달밤에 낙엽을 태우다가 뽕나무야, 고마워 네팔의 평등주의 그늘에 앉으셨나요? 4부 칠칠회관 댄서 익중이 샨티 천사는 2%가 부족하다 산으로 출근하는 사람 어머니한테 물든 우리 모녀 풍덩 보일러 영철이와 영식이 사해춘 만두 기억의 저편에 작은 도시가 칠칠회관 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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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저는 낙원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낙원은 행복만 가득 차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낙원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낙원이란 삶과 죽음이 함께 있는 곳입니다. 삶과 죽음은 등이 붙어 있는 일란성 쌍둥이와 같습니다. 그들은 분리된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산다는 일은 곧 죽는 일이기도 합니다. 죽음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 p.35
저는 지금 큰딸의 기억을 등에 업고, 어느새 훌쩍 커서 친구가 된 작은딸의 손을 잡고 남은 생을 걸어갑니다. 큰딸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가 진 짐들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꽃짐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그래야 하겠지요. 고단하고 무겁기만 했던 한평생의 어떤 짐도 마침내는 꽃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p.37 그래요. 우리가 가슴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생의 빛깔도 달라집니다. 어떤 어려운 처지에 있어도 해와 같은 밝음을 품고 있으면 삶이 밝아지고, 어둠을 품고 있으면 캄캄해집니다. 오늘 밤 저는 소망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 경험, 그 안에서 느낀 섬세하고 격렬하고 애틋한 무엇들이 환한 빛을 발하기를, 그리고 위로가 필요한 다른 생에 따스하게 스며들어 아름다운 힘이 되어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밤은 ‘다른 밝음’입니다. --- p.40 나무는 가을이 되면 ‘떨켜’라는 세포를 작동시켜 잎을 강제로 떨구어냅니다. 잎사귀를 떨구어 잎으로 가는 물길을 봉해 수분을 빼앗기지 않게 하는 것이지요. 최소한의 에너지로 겨울을 날 준비를 시작한 나무는 그런 상태에서 겨울잠에 들어가는데, 몸 안에 얼음 세포라고 불리는 ‘얼음물’을 품고 있다지요. 너무도 놀라운 일은 이 차가운 얼음물이 다른 세포가 얼어 죽지 않도록 단열, 보온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봄이 오면 얼음물을 녹여, 가지 끝마다 수분을 전해주지요. … 사노라면 누구에게나 ‘떨켜와 얼음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만약 어느 날, 우리에게 겨울이 찾아온다면 나무를 스승 삼아 꿋꿋이 견뎌야 합니다. 분명 새봄이 찾아올 테니까요. --- pp.60~61 산풀 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달빛 젖은 자두나무 그늘을 바라봅니다. 거기 잠든 이름 모를 산새를 생각하며, 늘 내리는 결론을 다시 한 번 또 내립니다. 표현하기조차 힘든 비극적인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기쁨들이 결코 작은 게 아니라고요. 그래서 오늘 이렇게 휘황한 봄밤을 100%, 아니 1000% 즐기자고 다짐합니다. --- p.97 저는 원래 느린 사람입니다. 손바닥만 한 트랜지스터에서 모노로 나오는 흘러간 옛 노래의 느린 가락에 몸을 실으니 참 편합니다. 그건 추억이 깃든 노래라서 그렇다기보다는 느린 멜로디와 다그치지 않는 가사 때문이기도 합니다. 노래를 들으며 당연한 결심을 새삼스레 합니다. “모두들 뛰어도 나는 걸어갈 테다. 생에서 만나고 보는 모든 것들을 즐기며 천천히 살아갈 테다” 하고요. --- pp.104~105 편지를 쓴다는 일은 그래서 단순히 소식만 전하는 게 아닙니다. 쓰고 부치고 다시 답장을 받는 긴 시간 동안, 가슴속에 달무리처럼 조용히 커져가는 어떤 예쁜 것, 가치를 섣불리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을 체험하게 만들지요. --- p.115 이 시대는 우리가 침착해질 기회를 잃게 했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내가 가는 이 길이 과연 옳은 길인가, 이것이 진정 내가 바라던 삶인가, 생각할 틈을 없애버렸습니다. 독서는 우리를 침착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오랜 독서 생활을 하신 분의 얼굴에서는 조용하고 단단한 힘이 배어나오는 걸 느낍니다. --- p.118 나이가 들면 세상에 대한 관심의 내용이나 방향이 달라집니다. 제 경우는 사람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대신 사람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들에게 점점 마음이 크고 깊게 열려가는 걸 느끼지요. 사람과 사는 모습이 다른 새나 벌레나 풀 같은 것들, 꼬물꼬물 작게 소리 내고 작게 움직이는, 그러나 터질 것 같은 생명력으로 가득차서 살아가는 그것들에게 깊은 감동을 받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생명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경외심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 p.133 익중이를 다시 만난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찌 변했을까, 알아볼 수 있을까. 얼마나 흥분이 되던지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지요. 익중이는 더했겠지요. 그리고 드디어 익중이가 제가 일하던 환경단체 사무실 문을 조심스레 열고 긴장을 억누르며 멈칫멈칫 들어설 때, 그리고 그 오랜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 넘어 중년의 음성으로 “선생님!” 하고 다시 저를 부를 때, 저는 보았습니다. 어린 소년에서 넉넉한 중년으로 넘어간 저의 ‘어린 제자’를. 그때의 놀라움과 감동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 p.168 저는 이런 대단찮은 나눔과 ‘다시 쓰는’ 생활이 늘 조용하시기만 했던 제 어머니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은 참으로 미약하고 대단찮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한 사람의 힘은 큽니다. 추운 겨울날, 찾아온 걸인에게 소반의 먼지를 닦아 따뜻한 밥과 국을 차려주시던 어머니의 힘은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셨겠지만, 어머니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컸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힘이 부족한 저를 통해 제 딸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보니까요. --- pp.186~187 저는 지금 얼떨결에 그토록 선명히 찍힌 그 얼굴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에 와 있습니다. 끝 모를 생의 우물 속을 외롭게 들여다보고 있는 한 사람의 얼굴, 색채를 버리고 적막한 선 하나로만 살아 있는 한 송이 꽃, 절대 고독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녀를 안다는 것은 아마 유한한 생 위에 위태롭게 떠 있는 인간을 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 p.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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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환경운동가 정상명의 첫 번째 산문집
비오리, 갯돌, 억새, 골목길, 백합조개, 지렁이 등 사람이 아닌 자연물에게 ‘풀꽃상’을 드리면서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시키는 운동을 펼쳐온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이하 ‘풀꽃세상’)의 창립자인 정상명, 화가이자 환경운동가가 첫 산문집을 출간했다. 지난 11년간 다양한 매체에 기고해온 글을 묶은 이 산문집은, 눈앞에서 딸이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한 어미의 비탄과 통한뿐 아니라, 고통과 분노를 끝내 감사와 나눔으로 되갚은 부드럽고 따듯한 모성을 보여주는 글들을 담고 있다. 회원들 사이에서 이미 묵직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며 화제가 되어온 이 글들은, 저자가 만든 ‘풀꽃세상’이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마음을 흔들어놓는 환경운동을 펼쳐왔듯, 읽는 이의 가슴을 정화시키고 잔잔한 감동으로 물들인다. 본문에는 화가이기도 한 저자의 그림 30여 점과 일상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저자는 환경운동에 뛰어들기 전, 비상업 갤러리를 운영하며 전시 공간이 없는 가난한 화가들에게 무료로 전시 기회를 주었다. 풀꽃세상 창립 후 갤러리는 접었지만 그는 화가로서 여러 단체의 로고 및 책표지 작업, 시민운동계에서 부탁하는 미술 작업은 기꺼이 해왔다. 일명 손바닥 달력으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풀꽃달력(가로세로 8센티미터)도 해마다 그의 그림을 싣고 있는 터다. 본문에 실린 청회색톤의 유화와 밝고 경쾌한 색조의 색연필화는, 때로는 처연한 슬픔을 노래한 글과 때로는 섬세하고 따듯한 감성의 글과 어우러져 산문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다. “딸을 잃은 깊은 슬픔, 풀꽃을 피우다” 1999년, 10여 년 동안 운영해왔던 비상업용 화랑 ‘녹색갤러리’를 닫고 저자가 환경단체 ‘풀꽃세상’을 창립한 데에는 당시 스물네 살이었던 첫째 딸을 화재 사고로 잃은 그의 슬픈 개인사가 배경에 있다. 자식을 불의의 사로로 잃은 어미의 삶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찼다. 그러나 비탄과 통곡은 절망만을 안겨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정신은 딸의 죽음 이후 더욱 맑아졌고, 더 이상 생에 대해 질문하지 않게 되었다. 생에서 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가 찾은 해답은 바로 ‘산다는 것은 축복이자 감사’라는 것, ‘어떤 경우라도 함부로 살면 안 된다는’ 생에 대한 전면적인 긍정이었다. 가시 없는 식물처럼 여리고 착했던 딸이 원하던 세상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풀꽃운동에 뛰어든 그가 뭇 생명들에 대해 남다른 감성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길가에 핀 풀꽃이나 나무, 한 집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개나 거위, 먼 산에서 지저귀는 새 등 어느 것 하나 그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명은 없다. 생명에 대한 존경심을 일깨우는 일은 풀꽃운동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이기도 한데, 이는 그가 인간과 ‘함께 사는 이웃들’로 자연을 생각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자신이 가진 것 혹은 누리는 것을 어떤 형식으로든지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의식은 그가 풀꽃운동을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지녔던 것이다. 그런 나눔의 정신이 ‘추운 겨울날, 찾아온 걸인에게 소반의 먼지를 닦아 따뜻한 밥과 국을 차려주시던 어머니’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믿듯, 그가 떠올리는 유년 시절 기억 속에는 따듯하고 훈훈한 일화들이 많다. ‘편지’와 ‘트랜지스터’가 구시대 유물이 되어버린 시대, 사람들은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바쁘게 살아가고, 세상은 “다양한 만남”만 권고한다. 아직도 무의식적으로 ‘깊은 만남’을 원하고, “생에서 만나고 보는 모든 것들을 즐기며 천천히 살아”가겠다고 나지막이 다짐하는 저자의 독백은, 속도와 경쟁에 치여 삶에 대한 주도권을 잃어버린 우리네 일상을 조용히 뒤돌아보게 하는 온화한 힘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