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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는_원인이_아니라_증상이다 박권일 _7
#순수함에의_의지와_정치혐오 김학준 _35 #지금_가장_정치적인_것은_여성적인_것이다 허윤 _73 #대중문화에서_여성혐오는_어떻게_작동하는가 위근우 _111 #혐오표현을_법으로_처벌할_수_있을까? 이준일 _1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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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증상을 파악해야 한다
소셜 키워드를 통해 사회 현상을 읽고 지금 바로 ‘여기’를 바탕으로 ‘미래’를 탐구하고자 하는 ‘알마 해시태그’는 그 첫 번째 키워드로 ‘혐오’를 택했다. 우리 사회에 난무하는 혐오의 감정을 사회학, 정치, 여성학, 대중문화, 법이라는 범주로 분석하며 그 실체를 파악하고, 그를 바탕으로 혐오의 감정을 넘어서는 새로운 지점을 그려보려 했다. 『혐오주의』는 사회학자 박권일의 ‘헬조선’ 담론을 통해 사회에 만연한 혐오 감정의 원인을 파악하는 「#혐오는_원인이_아니라_증상이다」로 시작한다. 혐오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왜 혐오가 나쁘냐는 물음에 “혐오는 나쁜 감정이니까 나쁘다”거나, “혐오가 약자와 소수자를 차별하게 만드니까 나쁘다”라고 답하곤 한다. 이런 대답들은 분명 선한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대답들은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성격을 오인하게 만들 수 있다. 혐오라는 정동(affection)에 집중할수록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바라보는’ 우를 범하기 쉬워진다. (중략) 혐오는 왜 나쁜가? 이것을 생각해 나가다보면 혐오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혐오는 ‘증상(symptom)’이다. 증상을 관찰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거기에 함몰되어선 곤란하다. 우리는 혐오를 사회악으로 지목할 게 아니라 혐오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을 찾아내야 한다. _pp.8∼9, 1장「#혐오는_원인이_아니라_증상이다」 중에서 박권일은 혐오라는 감정을 사회악으로 여기고 무조건 꺼려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증상으로 보고 원인을 살펴봐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특히 헬조선 담론을 예로 들며 혐오가 만연하는 현상의 사회적 의미를 파악하고자 했다. 헬조선이란 용어의 등장과 특징, 그것에 대한 기성세대의 반응을 짚어나가면서, 특히 헬조선 담론과 밀착해 있는 단어가 “미개”임을 주목한다. 인터넷 게시글(트위터·일간베스트 저장소) 전체를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헬조선’은 ‘미개’나 ‘탈출’이란 단어와 함께 사용되는 빈도가 높았다는 통계(p.18)가 있는데, 그는 더럽고 추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 모두 “미개”로 수렵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헬조선 담론에 자주 등장하는 ‘문명’과 ‘미개’라는 이분법이 결국 전형적인 식민주의 사고방식임을 지적하며, 혐오는 다른 어떤 정서보다도 식민주의적인 감정이라는 것이다. 오염을 거부하는, 순수함과 완전함에 대한 환상은 타인뿐 아니라 자기에 대한 혐오를 일으킨다. 식민주의적 인식은 식민주의적 감정을 낳고 그 감정은 다시 주체와 대상 간의 거리를 더욱 벌려놓는다. 대상에 개입할 수 없으니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도 없다. 남는 것은 자기모멸뿐이다. _pp.24~25, 「#혐오는_원인이_아니라_증상이다」 중에서 그는 헬조선 담론의 원인을 사회에 만연한 ‘과잉능력주의’라고 본다. 과잉능력주의는 평등을 어떻게 달성할지보다 불평등을 어떻게 정당화할지에 몰두해온 사회의 산물이며, “사회 곳곳에 넘실대는 혐오는 바로 우열의 논리, 과잉능력주의라는 토양에서 배양되어 확산되어온 감정(p.31)”이라고 말한다. 과잉능력주의라는 색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열등하고 피해야 할 것들로 보인다. 이것이 곧 혐오라는 감정으로 이어지고, 이는 ‘분노’와는 다른 증상이다. 분노는 “주체로 하여금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대상으로 다가가게 만드는 감정”인 반면, 혐오는 “무조건 주체를 대상과 가능한 멀리 떨어뜨리려는 감정”이다. 결국 사회 모순에 대한 반발심에서 비롯한 헬조선론이 분노가 아닌 혐오라는 정서로 나타나는 현상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이제 우리 사회가 현실을 혐오하고 무조건 피할 것이 아니라, 이에 맞서야 할 때임을 강조한다. 순수한 시민에 의한 정치혐오 ‘일베’에 관한 석사논문으로 주목을 받았던 사회학자 김학준은 「#순수함에의_의지와_정치혐오」를 통해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정치혐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21세기적 정치혐오의 원전으로 소환하는 사건은 바로 2008년 촛불집회다. 그는 그 당시 ‘다음 아고라’에 공유된 루머 중 ‘여대생 사망설’과 ‘소화기남’ 사건에 주목한다. 우선 여대생 사망설의 경우, ‘순수한 촛불시민’을 상징하는 ‘여대생’과 이를 군홧발로 짓밟았다는 ‘폭력경찰’의 이분법적 의미체계는 결국 국가의 제도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제도에 대한 불신은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저자는 이것이 ‘순수’를 갈망하는 참여 민주주의와 광장에 대한 유토피아적 환상을 부추기며 이후 한국에서의 정치적 참여에 심각한 제약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고 보았다. 소화기남 사건의 경우, 시민들은 촛불집회에서 경찰을 향해 “빨간 소화기”를 휘두르는 남자를 프락치로 몰며 그가 촛불시민이 아님을 선언했다. 그의 폭력성은 촛불집회의 대의를 해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형성된 ‘순수한 시민’이라는 자기정체성이 외부 세력이라는 유령을 빙의시킨 장본인인 동시에 이해관계를 둘러싼 협상이라는 정치 행위 자체를 불가능하게 했고, 시민들로 하여금 상황에서 비롯된 수많은 우발적인 행위들에 ‘의도’가 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켜 결국 정치 자체에 ‘역겨움’을 느끼고 혐오하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여대생 사망설의 경우와 같이, 소화기남 사건 역시 촛불집회라는 거대한 의례에 참여한 시민들의 의미 체계와 공명한다는 점에서 무가치한 유언비어로 치부해서만은 안 된다. 또한 6월 7일 당일 100만에 이르는 시민들이 운집한 현장에서 돌발행동이 생기지 않을 이유 또한 없는 것도 사실이다. 수십만이 모인 집회 현장에 있을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혼란과 통제 불가능성은 대규모 집회의 본질이며 한계이다. 하지만 촛불시민이라는 높은 이상은 이러한 흥분과 돌발행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높은 수준의 자기통제와 순수성에의 의지는 역으로 너무나 쉬운 배제의 논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마치 근대의 합리성이 친밀성의 배신을 가져온 것처럼, 촛불의 이상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돌려버린 것이다. _p.49, 「#순수함에의_의지와_정치혐오」 중에서 또한 김학준은 ‘일베’와 ‘정의당 탈당 사태’ 사례를 통해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존재하는 ‘정치혐오’에 관해 구체적으로 논한다. 일베 이용자들은 무엇보다 ‘평범함’을 희구한다. 그들이 보기에 거리에서 시위를 하는 자들은 국민의 자격이 없다. 일베 이용자들에게 있어 개개인이 겪는 고통을 공개적으로 모여서 제시한다는 것은 애초에 스스로를 약자로 인증하는 행위에 불과하다(p.56). 이렇듯 일베가 ‘합리적 시민’이라는 믿음에 회의를 갖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명 “정의당 탈당 사태”는 정치 주체인 시민의 정의로움과 순수성에 대한 지나친 신뢰로 인해 정치혐오가 유발된 경우다. 성우 김자연 씨 넥슨 계약 해지 논란에 관한 정의당의 논평이 정의당원들의 반발을 샀고, 이는 결국 대규모 탈당 사태로 이어졌다. 이 사건의 근본 원인은 현재까지, 아마도 앞으로도 지속될 젠더 논쟁의 핵인 ‘메갈리아’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둘러싼 ‘남성’들의 반발이다. 저자는 이러한 정치적 개인주의가 ‘꿘혐(운동권 혐오)’으로 구체화되고 운동권 및 진보 세력을 더욱 왜소하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순수함에의 의지가 빚어낸 집단지성은 결국 갈등과 경쟁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사파시즘에 가깝다고 말한다. 이제는 촛불이 만들어낸 좌절과 한계를 직시하고, 현실로서의 갈등과 차이를 인정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순수함에의 의지가 빚어낸 집단지성은 직접민주주의를 이야기하지만 갈등과 경쟁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사파시즘에 가깝다. 지금 이 자리에 실재하는 갈등을 도외시하고 반대자를 불순하고 불의한 이들로 매도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것을 부정하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 샤츠슈나이더가 말하듯,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은 “갈등, 경쟁, 리더십, 조직”이며, “문제는 대중권력의 한계를 감안하면서도 그것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정치체계를 조직하는 방법”이다. _p.69, 「#순수함에의_의지와_정치혐오」 중에서 남성성의 불안으로 야기되는 여성혐오 이어 여성학자 허윤과 대중문화기자 위근우는 ‘여성혐오’를 주제로 각기 글을 풀어나간다. 허윤은 「#지금_가장_정치적인_것은_여성적인_것이다」에서 신자유주의 경제 위기로 인해 남성 역차별론이 대두되며, 이로 인해 ‘여성혐오’가 더욱 짙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실제 데이터를 살펴보면 ‘여성들이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은 그저 착각에 불과함이 드러난다. 한국은 세계경제포럼 성평등지수에서 115위를 차지하며, OECD 가입 국가 중 최하위를 차지했다. 여성의 범죄 피해 사례도 갈수록 증가해 여성은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생계부양자’라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패배가 가시화되면서 여성은 남성보다 강자로 여겨진다. 여성들의 미러링을 이해할 만한 여유가 없다는 이들은 메갈리아가 남성에 대한 혐오를 조장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성 적대는 일베나 메갈리아가 만든 것이 아니다. ‘암탉이 울면 망한다’와 같이 부정적인 것을 여성화한 한국 가부장제 문화의 역사와 같이한다. 메갈리아가 현재 사실상 작동하지 않는 가상의 적이라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한국사회에서 남성혐오라는 것이 직접적 위협으로 다가온 적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지배적 허구라는 판타지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약한 남성’은 이데올로기적 균열을 통해 주체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체화의 길은 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흙수저론과 같은 청년 세대의 불안은 곧 ‘남성의 불안’으로 치환되고, 이것이 여성혐오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_p.90, 「#지금_가장_정치적인_것은_여성적인_것이다」중에서 저자는 이런 점에서 남성 청년들이 자신들을 '약자'로서 인식하고,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 등 소수자들과 공감하는 연대의 가능성을 상상한다. 더 이상 가부장적 남성성이 불가능해진 시대에, 남성성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 질문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문제의 중핵에는 남성성이 있다. 더이상 가부장적 남성성이 불가능해진 시대에, 남성성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늘 ‘인간’ 그 자체였던 남성들이 ‘성화된 존재로서의 남성’을 체험하고 있다. ‘약자인 남성’들이 소리치듯,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남성’들을 위협하고 있다. 이 위협을 새로운 정치적 의제로 만들어내는 것은 남성들 사이의 차이를 가시화하고 공론장에서 논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체성 정치와 재분배에 대한 요구가 결합될 수밖에 없다. 게일 루빈이 「여성 거래」에서 정치하게 논한 것처럼, 성차와 정치경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성혐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은 직업과 노동권을 둘러싼 정치경제적 투쟁이며, 질서와 불화를 일으키는 정치의 장소이다. 지금 가장 정치적인 것은 여기에 있다. 이것이 혐오의 정치를 넘어서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성차를 새로운 정치적 의제로 만들어내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_p.108, 「#지금_가장_정치적인_것은_여성적인_것이다」중에서 위근우는 「#대중문화에서_여성혐오는_어떻게_작동하는가」를 통해 언론, 예능, 잡지에서부터 웹툰과 인디 신에 이르기까지 여성혐오가 고착화된 대중문화를 비판한다. 특히 그는 「한국 예능은 여성의 패배를 원한다」에서 지난 2월부터 방영했던 MBC 「일밤」 ‘진짜 사나이-여군특집’ 시즌4를 예로 들며, 더 이상 ‘여자인 티’도 내지 못하는 여성 연예인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위근우는 군대라는 특수 조직에 사회인으로서의 방송인이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건 분명 여성 출연자들만의 문제가 아님에도, 남성 출연자들과 달리 여성 출연자들이 군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여성적이라’ 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지적한다. 모든 잘못, 미숙함이 은연중에 여성적인 것으로 규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것은 ‘김여사’라는 악의적인 호칭처럼, 운전 미숙을 여성적인 특징으로 규정하는 여성혐오적인 호명의 메커니즘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기존의 예능이 예쁜 여성 출연자를 장식처럼 다루거나 반대 케이스를 희화화하는 방식으로 성차별을 했다면, 이제는 여성의 장식적인 요소는 강조하되 또한 그 이미지로부터 일탈하길 바라는 것이 문제임을 비판한다(p.137). 기존의 예능이 예쁜 여성 출연자를 장식처럼 다루거나 반대 케이스를 희화화하는 방식으로 성차별을 했다면, 이제는 여성의 장식적인 요소는 강조하되 또한 그 이미지로부터 일탈하길 바란다. 물론 딱 남성들이 원하는 만큼만. 어린 걸그룹 멤버들이 무언가를 복스럽게 먹는 과정을 통해 본인의 털털함을 증명해야 했던 JTBC 「잘 먹는 소녀들」이나 걸 그룹 멤버들이 타의적으로 사십대 아저씨 출연자들과 ‘야자타임’을 해야 하는 JTBC 「아는 형님」의 불편한 순간들은 정확히 ‘여성특집’과 짝을 이룬다. _p.137∼138, 「#대중문화에서_여성혐오는_어떻게_작동하는가」 중에서 혐오표현의 법적 제재 마지막으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준일은 「#혐오표현을_법으로_처벌할_수_있을까?」에서 혐오표현의 법적 제재에 관해 논한다. 그는 현재 존재하는 ‘명예훼손죄’나 ‘모욕죄’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명예를 추락시켰을 때 처벌하는 범죄이므로 특정한 ‘집단’을 표시하여 그 집단에 속한 개인들의 명예를 추락시켰을 때에도 적용할 수 있는지는 논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집단에 대한 모욕적 발언도 처벌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혐오표현의 법적 제재와 관련해 가장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표현의 자유’와의 충돌이다. 특정 집단을 모욕하는 발언을 통제하고 제재하는 법적 조치가 가장 기본적인 인권으로 열거되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인권재판소의 판례에 따르면 표현의 자유도 유럽인권협약이 보호하고자 하는 가치를 침해하는 경우에는 제한될 수 있다고 한다. 익명이든 실명이든 표현의 자유가 중요한 기본권임에는 틀림없지만, 혐오표현을 처벌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에서도 표현을 모욕적 표현을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한 형법의 모욕죄 조항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시한 바 있다(p.177). 인간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고, 공동체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으므로 타인을 위해,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가 합리적인 범위에서 제한되는 것만으로 자신의 자유와 권리가 불법적으로 침해되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최근에 유럽인권재판소도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표현의 자유 역시 제한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편협함에 근거한 혐오를 전파하거나 선동하거나 고무하거나 정당화하는 모든 형태의 표현에 대해서는 반드시 사후적인 제재를 가하고, 심지어 사전적인 예방조치까지도 취해질 수 있다고 한다.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는 관용과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존엄하다는 사실에 대한 존중을 필수적 요소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유럽인권재판소는 고등학교 사물함에 동성애를 비난하는 전단지를 배포하던 기독교인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스웨덴 법원이 당사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_pp.178∼179, 「#혐오표현을_법으로_처벌할_수_있을까?」 중에서 저자는 혐오표현에 대해 법이 개입할 경우 그 방식은 형사적 제재(형벌)의 방식, 민사적 제재(손해배상)의 방식, 차별시정의 방식 등 다양하게 구체화될 수 있는데, 혐오표현의 피해자가 입는 인격적 피해를 우선시킬 것인지, 혐오표현의 주체가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에 포함된 중요성을 우선시킬지를 합리적으로 고려하여 구체적인 법적 규제 방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끝맺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