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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우리 삶 전체를 지배하는 열등감
열등감의 퍼레이드 모든 것의 인플레, 팬플레이션 과시적 소비와 ‘현명한’ 소비 가격 대 성능비 재구매 의사 있음 ‘잡캐’에 대한 무시 하나만 잘해도 돼 생애주기별 열등감의 악순환 해피아의 기원 체제적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 동전의 양면 세월호 참사는 위기가 아니었다 2_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현상들 열등감을 극복하는 법 PC통신에서 인터넷 시대로 누구나 논객이 될 수 있는 인터넷 게시판 개인의 입장을 전시하는 곳, 블로그 감정의 전장, 트위터와 페이스북 쿨게이들의 ‘진짜 의도’ 대중적 불만의 폭발, 사이버 민중주의 게임 감각과 현실세계 3_냉소주의로 전화하는 열등감 냉소주의의 두 가지 양상 오디션 프로그램이 유행하는 이유 속아 넘어가는 것을 즐겨라 진정성을 둘러싼 이분 구도 ‘기레기’에 대한 불신 소비자라는 절대적 지위 갑질 논란, 소비자와 서비스 노동자의 대립 저항의 논리, 통치의 논리 4_냉소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정치 정치의 두 가지 얼굴 [나는 꼼수다]가 묻는 것 안철수 바람과 호남 정치 “이 친구가 아직도 정치를 몰라!” 정치가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 정치적 보따리장수들 우파와 반反우파 제3정당론과 진보 정치 5_탈출구는 무엇인가 트럼프와 샌더스가 공유하는 것 극우 정치의 발호 브렉시트가 보여주는 것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올바름 미러링과 정상적 존재의 추구 냉소주의의 문법 열등의식과의 화해 냉소주의와의 화해 소비주의와의 화해 정치적 냉소가 지배한 박근혜 정권 당위와 명분의 정치를 복원하기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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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는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으며 또 그 모든 것이 평가의 대상이 된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주체의 입장에서 남들의 모든 감정 표현을 언제든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를 다시 뒤집으면 애초에 인터넷을 통한 표현을 할 때에 남의 평가 대상이 되리라는 것을 미리 전제하고 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이 인터넷에서의 모든 활동이 자기 전시로 귀결되는 원리다.
덕분에 과거 같으면 ‘엄마 친구 아들’ 유의 풍문을 통해서나 접했을 잘난 사람들을 인터넷에서 셀 수 없이 보게 되었다. 그들이 일제히 자신의 '능력'을 전시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능력’이 허세에 그치고 마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실체가 있는 것인지도 검증할 수 있다. 그들의 능력이 실제로 별 볼 일 없다면 '저런 사람도 이렇게 유명세를 얻는데 나는……'이라는 형태의 열등감이 표출되며, 그들의 능력이 실제로 대단하다면 '세상에 저렇게 잘난 사람도 있는데 나는……'이라는 형태의 열등감이 또 생산된다. --- p. 84 지금까지 알아본 가상공간에서의 ‘열등감’이 다뤄지는 방식을 한번 정리해보자. 첫째, 사람들은 가상공간에서 ‘자기 전시’ 중심으로 한 활동을 통해 일상의 열등감을 극복한다. 둘째, 가상공간에서의 경쟁적 활동은 결국 이용자 간의 우열을 만들어내며 우위에 있는 이용자는 열광이나 냉소의 대상이 된다. 셋째, 열광의 대상이 된 사람은 능력주의적 프레임에 의해 인터넷 권력을 획득하는데, 이 권력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열광을 유지하기 위해 종종 핵심 문제에 대한 ‘판단 중지’를 선택한다. 넷째, 가상공간에서의 활동이 현실의 구체적 이득으로 연결되면 열광의 대상이었던 사람에 대한 질투가 커진다. 다섯째, SNS의 발달은 인터넷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어 앞의 현상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 p. 109~110 정부 여당의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태도는 ‘네가 나를 기만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나도 너를 기만한다’의 또 다른 사례였던 것이다. 대화의 상대는 진정성의 화신일 수도 있고 기만적인 사기꾼일 수도 있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나쁜 상황인 ‘사기꾼’을 전제하고 기만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정부 여당이라 할지라도 이런 행동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 p. 160 이런 문제들이 모이고 쌓여 우파의 대립항을 ‘좌파’가 아닌 ‘반-우파’에 머무르게 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매번의 선거에서 진보냐 보수냐의 노선을 선택하는 게 아니다. 우파냐 아니냐, 보다 정확하게는 기득권이냐 아니냐의 단순한 선택을 강제당하는 것이다. 이런 선택은 재차 설명할 필요도 없이, 앞서 언급한 ‘재구매 의사 있음’ 또는 ‘재구매 의사 없음’이라는 효율적 소비주의의 형식에 지배당하고 있다. --- p. 225 냉소주의의 문법에서 보이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언제나 상대 주장의 내용이 아니라, 그의 ‘진정성’을 확인하려 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냉소주의적 현실 인식에서 모두가 나를 속이려 들기 때문이고, 소비주의적 관점에서는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는 건 무능하고 열등한 것이며 패배한 것이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상대가 과연 나를 속이려는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판단해야 상대의 주장에 대한 나 자신의 태도를 정할 수 있다. 상대의 주장은 나를 속이는 게 아닐 때에만, 즉 나에게 일부러 손해를 끼치려고 시도하는 게 아닐 때에만 이해와 수용의 대상이 된다.--- p. 268 자본주의가 촉발한 무한 경쟁과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빠른 속도의 감정 교환은 우리가 일상에서 열등감과 결별할 수 없는 조건을 형성했다. 대중의 열등의식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시도의 과정에서 냉소를 키우는 계기를 맞게 되었고, 동시에 이는 소비주의적 행동양식의 일반화를 초래했다. 냉소주의와 이를 통한 소비적 세태는 정치에도 영향을 미쳐 진지한 의미로서의 진보 정치 성장을 저해하고 있다. 우리가 이런 진창을 근본적 차원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열등감, 냉소주의, 소비주의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의 화해가 필요하다. 이것이 ‘극복’이나 ‘파괴’가 아니라 ‘화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자신과 정치가 이 세 가지 부정적 개념들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완전히 결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이미 모순이 타파된 사회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어쨌든 우리는 현재에 존재하는 이 개념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현실 안에서 무언가 새로운 모색을 해볼 수밖에 없는 거다. --- p. 276~277 최순실 게이트의 가장 놀라운 점은 한국의 정치 체제가 제대로 돌아갔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이 사건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체제 그 자체에 대한 의문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예외적이고 특수한 것으로 간주하는 현실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체제가 아니라 돌연변이처럼 나타난 나쁜 자들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지의 문제가 된 거다. 오직 박근혜 대통령을 제거하는 것으로 국가를 정상화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박근혜 정권이 추진한 정책들을 진지하게 논하지 않으려 한다. 이는 앞의 부분에서 예로 든 영화에 대한 비평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 것과 비슷한 결과다. --- p. 314~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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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견됐던 국정 농단 사태,
왜 막지 못했을까? 지난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사상 초유의 국정 농단 사태에 국민들은 “이게 나라냐”라며 분노했고, 주말마다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모였다. 국민의 뜻을 외면할 수 없었던 국회는 탄핵 소추안을 통과시켰고, 이제 공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헌재의 최종 판결이 나기까지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리 업무를 본다고는 하지만, 당분간 정상적 국정 운영이 어려워졌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최순실 게이트는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인 2007년 이미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또 2012년 일부 야권에 의해 그 가능성이 여러 차례 경고되었던 사안이다. 그런 여과 체제가 작동했음에도 박근혜 후보가 결국 대권을 차지했다는 것은, 우리의 체제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저자는 이렇게 총체적 난국에 빠진 한국 사회와 정치 상황의 원인을 ‘냉소주의’에서 찾는다. 우선 박근혜 정권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국민들이 정치에 대해 가졌던 냉소주의 때문이다. 정치 지향에 대한 냉소와 정치 역시 하나의 상품으로 소비하는 소비주의로 인해 진보 정치가 외면받게 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보수 정권이 대선에서 이길 수 있었다. 한편 박근혜 정권이 실패하게 된 원인 역시 권력 자체의 냉소적 정치의식 때문인데, 그 대표적 예가 세월호 사건 이후 정부가 보여준 대처 방식이다. 박근혜 정부는 구난 작업에서의 무능과 실패를 반성하고 제대로 된 안전 대책과 정책을 내놓기는커녕 난데없는 ‘해경 해체’라는 처방 아닌 처방과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작위적 연출 등 문제의 근원 해결이 아닌 정치적 리스크를 줄이는 데에만 골몰했는데, 이는 바로 권력 자체가 냉소적 정서를 바탕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냉소주의의 근원, 열등감 그렇다면 이러한 냉소주의는 무엇 때문에 생겨나게 되었는가? 그 근원은 다름 아닌 ‘열등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다수의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잘난 사람과 그만큼 잘나지 못한 사람이 나뉘게 마련이다. 부자가 있는가 하면 가난한 사람이 있고, 명문대생이 있는가 하면 이른바 ‘지잡대생’도 있으며,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취직조차 어려운 사람이 있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이러한 우열은 점점 극단화되었고, 인터넷의 발달은 그로 인한 열등감을 더욱 일상적으로 만들었다. 시쳇말로 ‘엄친아’라 불리는 잘난 사람들은 과거 같으면 멀리서 풍문으로만 듣거나, 주변에 있다 해도 소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은 다수의 사람이 실시간으로 교류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그곳에서 우리는 나의 능력을 넘어서는 사람을 수없이 마주치게 되었다. 이는 다시 우리가 인터넷을 할 때 자기를 전시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는 인터넷에서는 필연적으로 남의 평가 대상이 되리라는 것을 전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되는 상황에서는 나의 합리성과 열등하지 않음을 증명해야 하는데, 이는 ‘소비주의’의 형태로 발현된다. 이러한 효율적 소비주의야말로 냉소적 세계관 위에 성립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소비자는 물건을 살 때 언제나 이 상품에 이 가격이 합당한지, 혹은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효율적인지 의심을 한다. 한마디로 우리의 일상은 ‘속지 않겠다’는 냉소적 결의로 차 있다. 만약 누군가 어떤 물건을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산다면, 그 사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열등한’ 사람이 되고 만다. 이러한 소비주의는 비단 재화를 구매할 때뿐 아니라, 나아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마다 작동한다. 선거에서 일정한 노선이나 이념에 따라 투표를 하는 것이 아닌 나에게 가장 많은 이득을 줄 후보를 찍는 것이 그러한 예다. 효율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월호 사건 효율성 제일주의로 인해 벌어진 비극이 바로 세월호 참사다. 모두가 알다시피 세월호는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배의 안정성을 희생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비용을 들이는 것을 우리는 비효율적이라고 여긴다. 여기서도 효율성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사고 수습 과정에서 또 다른 차원의 효율성이 작용했음을 지적하는데, 바로 인명 구조의 외주화이다. 즉, 국가가 비용을 줄이기 위해 인명 구조 업무를 외부 업체에 맡김으로써 국가의 기본적 권리이자 의무를 스스로 포기했다는 것이다. 글로벌 경제라는 관점에서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체제적 열등감으로 인한 위기의식이 국제구난협회 정회원 자격을 가진 업체가 탄생하는 배경이 됐고, 자신감을 잃은 국가가 당연히 맡았어야 할 구조 작업을 시장에 떠넘기면서 시장화된 형태의 사고 뒷수습에만 체제의 관심이 쏠리게 됐으며, 결국 ‘인명의 구조’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돈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만 남게 된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본문 79~80쪽)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월호는 체제의 위기라기보다는, 체제가 ‘효율성’이란 이름 아래 돌아간 결과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참사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효율성의 신화’를 깰 필요가 있다. ‘판단 중지’가 가져오는 결과 열등감은 결코 유쾌한 감정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열등감을 벗어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한다. 가장 흔한 방법은 자기 자신을 냉소적인 사람으로 규정하면서 타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자신의 ‘공정한 잣대’를 전시하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잘난 사람에게 ‘열광’하면서 그들과 대비되는 ‘못난’ 존재들에 대해 적대적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잘난 사람들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열광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때로 열광의 대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를 포기하기도 한다. 게임 커뮤니티 내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자. 게이머 커뮤니티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므로 시사와 관련한 여러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마다 게임을 잘하는 사람의 의견에 일부 사람들이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현상이 일어났다. (……) 이 게임 고수의 지지자들을 앞서 말한 부류로 나눈다면 ‘열광하는 자들’로 규정할 수 있을 텐데, 이 열광의 정체는 앞서 살펴본 열등감의 문법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능력’에 대한 환호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의견’이라는 것에 대한 냉소다. ‘게임 고수’와 한편이 되느냐 ‘사회적 의견’에 대한 생각의 차이를 따지느냐에서 전자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사회적 의견에 대한 열광하는 자들의 태도는 ‘판단 중지’라고 요약할 수 있다. 열광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문제에 대한 판단을 중지한 것이다. (본문 85~86쪽) 이러한 냉소적 판단 중지는 정치적 판단을 내릴 때도 흔히 작동한다. 2011년 통합진보당 창당이 그 대표적 예다. 서로 다른 노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교섭단체 구성’이라는 당장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이견을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해서는 ‘판단 중지’를 선택한 것이 종국에 진보 정치가 갈 길을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전 세계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냉소주의 2016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먼저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그리고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당선. 저자는 이 두 사건 역시 냉소주의의 결과로 분석한다. 브렉시트의 경우 유럽연합 탈퇴를 강력히 주장했던 정치인들이 정작 탈퇴 가결 이후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한 데서 그들의 주장이 당장의 정치적 이익을 위한 것이었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즉, 실제 브렉시트에 대한 실질적 전망 없이 보수적 유권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달콤한 말을 쏟아냈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 대통령 당선도 전 세계에 브렉시트 못지않은 충격을 줬다. 애초에 공화당에서조차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던 트럼프가 대권까지 차지한 것은 냉소주의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명분만 내세우고 자신들의 잇속만을 챙기는 기성 정치인을 찍느니 차라리 속 시원히 ‘일자리를 다시 빼앗아 오겠다’고 말하는 트럼프를 찍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유권자들이 더 이상 기존의 좌우관념에 따라 투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와 버니 샌더스의 등장은 단순한 극우와 극좌의 싸움으로만 묘사 할 수 없다. ‘백인 남성들의 분노’라는 설명도 상황을 모두 드러내기에는 부족하다. 오히려 이것은 기득권 정치에 냉소주의가 반응하는 두 가지 양상이 고스란히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양상은 명확히 분리된 독립된 정치 기획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더 큰 묶음으로서의 냉소주의에 좌우되며 ‘속아 넘어가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 ‘진정한 무엇은 없다’와 ‘진정한 무엇은 있다’의 사이를 오가는 대중의 현재를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문 243~244쪽) 냉소의 정치를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앞서도 말했듯, 우리는 투표를 할 때조차 소비주의적 관점에서 후보를 정한다. 최근 선거들에 등장한 공약들을 보면 더 이상 보수와 진보를 논하는 것이 의미 없는 경우가 많아졌다. 남은 건 어떤 인상뿐이다. 선거전에서 진보 정당 몫의 표를 흡수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실제 제 1야당이 충분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급진적인 구호까지 내세우는 데 망설임이 없고, 이 때문에 중도층을 잃었다는 비판이 나오면 다시 거리낄 것 없이 중도적 태도로 복귀하는 데 한 점의 의심도 갖지 않는다. 정치 세력이 그들 스스로 주장하는 이념과 가치에 동의하는 더 많은 대중을 조직하기보다, 더 많은 대중이 원하는 쪽으로 자신의 존재 의의를 바꾸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 (본문 218쪽) 이런 상황에서 보수와 진보의 경계는 모호해졌고, 정당들은 명확한 정치적 지향을 잃고 ‘보따리장수’로 전락한 지 오래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지금까지 이야기한 열등의식, 냉소주의, 소비주의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화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극복’이 아닌 ‘화해’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 세 개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그것과 완전히 결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열등의식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지더라도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며, 이것은 주체들의 연대에서 시작할 수 있다. 또 냉소주의에 대해서는 이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소비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에게 생산자의 존재를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노동자인 자신을 자각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러한 화해를 통해 정치적 냉소주의를 무력화할 때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풀어낼 수 있다. 단순히 현재의 정권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데 그친다면, 언제든 제2, 제3의 최순실 게이트가 다시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당위와 명분의 정치를 되찾을 때 소비의 대상에 머무르고 있는 정치를 구해낼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