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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글] ‘착한’ 그림을 그리며 ‘진짜’를 꿈꾸었던 화가
적정 온도 36.5도를 머금은 인간애 재래의 가치를 입은 사람들 맑은 정신으로 흐린 세상을 건너다 ‘따로’ 또 ‘함께’ 가는 길 덜 가지고도 더 존재하는 이들 무딘 칼로 새긴 것이 오래간다 고난의 길에서 배운 인내 켜켜이 쌓인 기다림의 시간을 완주하다 박수근 연보 주 참고문헌 본문에 사용된 목판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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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겨울이 왔다. 수근은 홀로 있는 평양이 몹시 춥다는 내용의 편지를 아내에게 보냈다. 수근이 머물던 당시 평양은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 계속되고 있었다. 춥기는 아내나 수근이나 마찬가지인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이 아내의 마음이었던 모양이다. 편지를 다 읽은 아내는 수근의 건강이 염려되었다. 솜씨가 좋았던 아내는 예쁜 털실로 수근의 스웨터를 짜서 평양에 보내주고 싶었다. 굴뚝같은 것은 마음뿐이었다. 새로 털실을 살 만큼 형편은 넉넉지 못했다. 궁리 끝에 아내는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 수근의 스웨터를 짜기 시작했다. 문제는 털실의 색깔이었다. 방법은 하나였다. 아내는 빨강색 털실을 남색으로 염색했다. 염색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결국 털실은 붉은색을 띤 남색 즉 보랏빛이 되었다. 목도리를 푼 털실로 스웨터는 무리였다. 계획은 스웨터에서 조끼로 바뀌었다. 낮에는 들에 나가 일을 했기 때문에 뜨개질할 시간은 밤뿐이었다. 마침내 조끼는 완성되었고, 아내는 피로로 눈병에 걸렸다.
얼마 후 완성된 보랏빛 조끼가 수근에게 전해졌고, 다시 며칠 뒤 조끼를 입은 사진을 동봉한 수근의 답장이 도착했다. 아내에 대한 고마움이 빼곡한 답장이었다. 털실 하나도 마음에 드는 색깔로 살 수 없을 만큼 세상이 각박해서였을까. 보랏빛 조끼가 전하는 여운은 꼬리가 길다. --- pp.26-27 수근과 박완서가 만난 것은 1951년 겨울이다. 장마도 허기도 길고 지루하던 때였다. 거리의 우유죽 배급소에서 허겁지겁 굶주림을 피하며 막노동과 날품팔이로 이어가야 했던 삶은 불안했다. 서울대에 입학했으나 전쟁으로 어린 조카와 노모를 책임져야 했던 박완서와 밀레와 같은 화가를 꿈꾸었으나 당장 가족들의 거처가 절실했던 수근에게 미군부대 피엑스는 위태로운 삶을 간신히 잡고 있기 위한 절실한 임시방편이었다. 위탁매장의 어린 박완서가 한참 나이가 위인 수근을 ‘박 씨’로 호령했던 것도, 간판장이 취급을 받으면서도 수근이 그러려니 한 것도 이런 시대가 짐 지운 굴레였다. “한 푼이라도 더 모아야 하는데. 퇴짜를 맞으면 어쩌지.” 오늘 아침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하는 수근을 따뜻하게 배웅해준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늘 저녁도 어김없이 주린 눈으로 아빠의 얼굴보다 손을 먼저 쳐다볼 아이들의 눈초리가 생생했다. 만약 미군이 스카프를 끝내 가져가지 않는다면 천 값에 해당하는 1달러 30센트는 고스란히 수근의 몫이었다. 미군이 떠난 초상화부 안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사진 좀 똑바로 보고 그려요. 원 눈을 감고 그리나, 발가락으로 그리나……. 이렇게 그려 놓고 빠구 받으면 내 탓처럼 굴겠지.” 한참 어린 중재자의 악다구니를 들으며 수근이 할 수 있는 일은 붓 꾸러미를 만지작거리는 것뿐이었다. 붓은 초상화부 안에 있으니 가져올 필요가 없다고 했으나 수근이 품에 끼고 살 만큼 아끼던 바로 그 붓 꾸러미였다. --- pp.122-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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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우리 이웃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그린 국민화가 박수근의 삶과 예술세계
불멸의 예술혼이 아닌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추구했으며,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그렸던 화가 박수근. 그는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가들 중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서 ‘토벽과도 같고, 메밀깍지처럼 도돌도돌하고, 거친 창호지와 같은’ 독특한 마티에르로 한국의 정서를 표현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수근은 생전에 인정받지 못하고 평생을 곤궁하게 살았으나 이제는 명실상부한 국민화가다. 그러나 그 관심과 명성 중 일부는 매번 최고가 기록을 경신하는 비싼 그림 값이라든지 '빨래터'의 위작 논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유명세를 떨치는 ‘박수근’이지만 실상 그의 삶이나 예술세계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라든지 일반인들이 쉽게 볼 수 있는 관련 서적 역시도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착한 그림, 선한 화가 박수근』은 현실에서의 이런 안타까움을 덜어주는 역할을 한다. 박수근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 공주형은 박수근의 삶과 예술세계를 좀 더 널리 알리고자, 왜 그가 한국인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화가인지 보여주고자 이 책을 들고 나왔다. 책에는 평등, 성실, 인내, 조화로움 등 평생 그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가치들이 그를 닮은 ‘착한 그림’들과 함께 펼쳐진다. 평생 그림에 힘쓴 끝에,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도 못한 보통학교 졸업의 학력으로 독자적인 양식을 개척한 화가 박수근. 끈기와 인내로 채워진 그의 그림과 인생 이야기를 좇다보면 그가 전하고자 했던 ‘충만한 가난’, ‘선함과 진실함’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