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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끝에 서다
중대 전투력 측정이 한창이던 1997년 11월 어느 날, 무리 없이 군 생활을 하며 막 병장 계급장을 단 고영일은 느닷없이 중대 본부의 대대장으로부터 호출을 받는다. ‘자네 대학 때 일로 기무대에서 오실 거야.’라는 대대장의 말에, 휴가 때 방문했던 학교에서 듣게 된 동료들의 구속 사건, 그리고 자신의 동태를 감시하라고 명령받은 후임병의 고백 등을 떠올리며 영일은 이것이 1996년 여름의 연대 사태(8·15 범청학련 통일 축전) 이후의 정국에서 이와 관련된 자신의 학생 운동 전력을 둘러싼 조직 사건임을 직감한다. 대대장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기무대 수사관으로부터의 구속 영장이었고, 영일은 자신의 구속 사유, 곧 국가 보안법을 읽으며 수사관을 따라 나선다··· 이후, 〈푸른 끝에 서다〉는 의사소통을 비롯한 개인의 자유가 극히 제한된 상태에서 국가 권력에 의해 사건이 어떻게 조작되고 짜맞추어지는지, 또 자신과 동료들의 죄목인 ‘자주대오 활동가 조직’ 사건이 1997년 당시 대선 정국에서 맞추어 기획된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며, 본격적으로 구속 생활과 학생 운동 시절, 그리고 현재를 오가는 기억의 퍼즐을 맞추어 간다. 구속된 기억의 트래킹 〈푸른 끝에 서다〉는 작가인 고영일 자신이 몸담았던 1990년대의 학생운동과 구속 사건을 중심으로 국가 권력의 메커니즘과 학생 조직 내의 갈등, IMF 등의 사회적 변화 등이 만들어 내는 풍경을 사실적이며 입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를 위해 작가는 과거를 떠올리고 주변인들을 취재하며 개인적·집단적·사회적으로 불편하고 인격과 자존심이 박탈당하고 거짓을 말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기억과 감정들을 하나씩 하나씩 다시 불러낸다. 시시때때로 불현듯, 또한 작업 과정 속에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당시의 기억은 오히려 현재를 구속하는 기억(트라우마)로서 작용한다. 그러나 이 꼼꼼한 기억의 트래킹은 담담히 진실의 무게를 만들어내며, 작가 자신에게 ‘아파했던 상처들과 오해들, 미움들을 하나하나씩 정리하고 반추하면서 쌓여 있던 어두운 의미들을 덜어내고 털어 내는’ 치유의 과정이었음을 고백케 한다. 〈푸른 끝에 서다〉는 망각으로부터 우리를 다시 ‘푸른 끝’에 서게 한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의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불편한 진실은 조망하게 한다. 그리고 그 시선을 따라 우리는 발밑 가장 가까운 곳 현재의 부조리 또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1997년 11월, 소위 조직사건을 겪은 지 10년도 아니고 12년이 지났습니다. 대학을 갔고 학생운동을 했고 군대를 가야 했으며, 그 시기에 마침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지내온 시간을 되돌아보니, 그것이 대한민국, 남한 사회를 말해 주고 있었고,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만화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아파했던 상처들과 오해들, 미움들을 하나하나씩 정리하고 반추하면서 내게 쌓여 있던 어두운 의미들을 덜어내고 털어 내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영일, ‘작가의 말’ 중에서 ···민주화 세력의 근간을 형성해 온 학생운동에 대한 광범위한 토벌작전 속에 우연히 자연인 고영일이 연루된 것이다. 구속 사건이 제대를 코앞에 두고 고영일에게 벌어졌기에, 예술의 영역에서조차 오랜 성역이던 군과 그것과 상호 유기적 관계에 놓인 한국 사회 혹은 그 둘의 야합에서 비롯된 일련의 부조리를 조망할 위치에 고영일이 놓이고 만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가 혹은 우리 모두가 서 있는 ‘푸른 끝’이다. 1부를 통해 푸른 끝에 선 작가는, 여전히 사회에서 온전히 언급할 수 없는 대상을 자신의 주제로 과감하게 다뤘고, 또한 완성도 높은 성과를 달성했다. -반이정(미술평론), ‘이제도 말할 수 없는 진실의 끝’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