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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르세유
카뷔셀의 아이 11살에 공장에 들어가다 무대에 첫발을 내딛다 독일군 점령 치하에서 가수로 활동하다 2. 파리에서 도둑 고양이 에디트 피아프 거장들의 무대에서 황금 투구, 시몬 시뇨레 3. 동지의 시대 흔들리는 동지들 부다페스트에서 모스크바까지 4. 마릴린 먼로 마릴린 5. 배우의 변신 조르주, 코스타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 고백 6. 고엽 세자르 우리는 다르게 늙어간다 마지막 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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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전까지, 이브 몽땅의 애정생활은 만족스러울 게 없고 지지부진하다. 반대로, 직업생활은 완전히 달라진다. 가수로서의 활동은 문자 그대로 '폭발'한다. 뮤직홀 최고의 무대에서, 특히 그가 좋아하던 에투알 극장에서 그는 승승장구하며, 대중적이면서도 동시에 시적인 레퍼토리로 자신을 부각시킨다. 영화계에도 데뷔하지만 결과는 고통이다. 그가 처음 주연을 맡은 마르셀 카르네Marcel Carne의 영화 <밤의 문Les Portes de la nuit>은 완벽한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러나 이미 그는 출세를 했고, 이제는 '스타'다. 리비 일가는 그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기 위해 파리로 상경한다. 못배워 독학을 한 이민 소년은 이제 위대한 스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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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스타를 보러 갔다
우리는 영웅보다 스타를 원한다. 대중 스타들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다. 그들의 이야기도 별만큼이나 가득하다. 하지만 별은 어느 한 밤을 빛내고는 새벽이 여명과 함게 스러진다.
한 시절을 지내고도 빛을 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스타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유럽의 현대사를 헤쳐온 가수이며 배우, 이브 몽땅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책 『세기의 연인 이브 몽땅의 고백』은 몽땅 자신의 삶과 예술, 사랑과 이념에 대한 2년에 걸친 고백서이다. 한 사람의 생이 두 번의 세계 대전, 프랑스 68혁명과 알제리 내전, 부다페스트 항쟁, 프라하의 봄, 피노체트 쿠데타에 이르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있엇다는 것은 관심을 불러 일으킬만하다. 그 역사의 축에서 이브 몽땅은 잠시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레닌 광장에서부터 베를린 장벽의 붕괴까지 이브 봉땅의 살아있는 유럽의 전 현대사였다. '이브 몽땅'은 누구인가? 파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이브 몽땅은 위대한 예술가로 기억된다. 그가 남긴 예술적 성취는 너무도 많다. 가을날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고엽>. 이 노래만큼 사람의 추억을 자극하는 것이 또 있을까? '인생은 덧없이 아름다웠고... 나는 잊을 수 없네. 추억도 회환도 고엽과 같다는 것을...'이라고 읊조릴 때면 <환상수첩>에서 김승옥이 말하는 '이브 몽땅의 매력'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유혹을 부른 빨간 풍차, 물랑루즈에서 그는 반세기 동안 노래를 했고, 지금까지 파리의 연인으로 남아있다. 그는 영화를 통해서도 동시대인과 호흡하고 있다. 우리에게 알려진 배우 이브 몽땅이라는 이름은 영화 <마농의 샘>정도이다. 하지만 정작 그는 코스타 가브라스와 함께 한 정치 영화를 첫 손에 꼽는다. 그 영화에서 이브 몽땅은 숨길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한다. 세계 정치 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그가 얼마나 충실한 예술가인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는 영화를 '찍는'것으로 그 시대를 참여했다. 아내 시몬 시뇨레가 그의 곁을 영원히 떠나는 순간, 그때에서 몽땅은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삶이 계속되는 것처럼 촬영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예술적 신념이었다. 고엽을 노래하는 공산주의자 20세기의 문화 코드, 이브 몽땅에게는 전혀 다른 모습이 있다. 그는 태생적인 공산주의자였다. 그것은 파시스트의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이주한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소련이 동 유럽을 무력으로 진압하던 시절, 프라하의 봄과 부다페스트 항쟁을 겪은 시절에도 몽땅에게 소련은 스탈린그라드의 나라였다. 그 정신적 혼란 속에서 흐루시초프와 티토를 만났다. 그의 교우관계는 정치인에서부터 피카소와 사르트르, 아서 밀러와 자크 프레베르에 이른다. 특히 <고엽>의 작사가인 프레베르와의 만남은 그의 정신적 편향에 양분을 공급해준다. 학교를 다닌 적이 거의 없음에도 이브 몽땅이 당대의 비판적 지식인이라는 이름을 얻는 데에는 이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공산주의자인 몽땅의 새로운 모습이 우리에게 소개된 것은 1983년 소련의 KAL기 격추사건이 있고 난 다음의 일이다. 그는 소련의 야만성에 대해 맹렬히 공격했고, 프랑스인을 비롯한 많은 세계인들의 정의감을 자극햇다. 당시 그의 발언은 프랑스에서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친소파로 분류되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떄부터 몽땅은 인권운동과 반전, 반핵 운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보인다. 대선을 앞둔 프랑스 국민은 60% 이상의 지지로 그를 대통령 후보로 거론한다. 국민적 지지에 감사한다는 인터뷰에서 몽땅은 "내 '큰 입'이 정치인의 입과 비슷하지만, 살인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정치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며 정치의 길을 걷지 않는다. 아름다운 황혼 가수 조용필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브 몽땅이라는 사람이 말이에요. 죽기 전에 소극장에서 6개월을 공연했어요. 그 사람을 보려면 공연장에 가야 된다는 거죠. 나도 그렇게 까지는 안되더라도 몇 개월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야망이 있다면 그런 거에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늙을수록 더 매력적인 남자, 이브 몽땅은 아들을 위해 2년에 걸친 소극장 공연을 기획하던 중 홀연히 세상을 떠난다. 할아버지가 될 나이에 둔 아들에게 몽땅은 말한다. 한나절이 우리를 가르고 있구나 발랑탱, 너는 이른 새벽 나는 지는 저녁이란다. 아름답지 않은가? 이것이 <세기의 연인 이브 몽땅의 고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