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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희생정신과 사랑을 보여준 노먼 베쑨의 삶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베쑨은 어린 시절부터 호기심이 남달랐다. 특히 그는 삶은 닭의 뼈를 가져다가 재조립하는 등 일찍부터 의사로서의 자질을 보여주었다. 베쑨은 고국 캐나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선언하자마자 육군에 자원입대한다. 그러나 총상을 입고 6개월 만에 제대해야 했고, 의대를 졸업한 후에 또다시 군의관으로 영국군에 입대한다. 이 두 차례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그는 동료에 대한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한편 방탕하고 자유분방한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미국으로 건너가 성공한 개업의가 된 후에 가난한 환자의 진찰 차트에 병명을 ‘폐결핵’이라고 써야 할지 ‘가난’이라고 써야 할지 고민하게 되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조금씩 달라진다. 이때 그는 의사로서의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는 동시에 절박한 현실을 직시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그런 그였기에 1936년 7월 선언서를 통해 국민 건강의 책임이 정부에 있음을 역설하기에 이른다. 그 자신도 폐결핵으로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기에 그의 연구는 자연스럽게 결핵에 집중된다. 아내 프란시스와는 죽음을 앞두고 이혼했다가 병이 낫게 되자 재결합하기도 한다. 의과대학에 출강하는 한편 몬트리올 성심병원의 흉부외과 과장으로 있으면서 ‘베쑨 기흉기’, ‘베쑨 늑골 절단기’ 등 자신을 이름을 딴 수술기구를 개발해 의료계에 혁혁한 공을 세운 베쑨은 보건의료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폐결핵으로 죽음의 문턱에 있을 때 다시 태어나면 지금보다 두 배로 열심히 살겠다고 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가 처음 관심을 가진 곳은 내란 중인 스페인. 그는 스페인 민주주의 원호위원회가 파견하는 의료지원단을 이끌고 전장으로 들어간다. 이때 처음으로 그는 전장에서 혈액은행을 운영해 많은 부상병의 목숨을 구한다. 그전까지만 해도 부상병들은 전장에서 의료진이 있는 곳까지 이동해 가는 도중 숨을 거두는 일이 많았다. 그려나 베쑨은 부상병이 있는 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수혈을 해서 많은 부상병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베쑨은 스페인보다 더 열악한 조건에서 싸우는 중국에 관심을 가지고 중국 의료봉사대에 자원한다. 의료 지식이 전혀 없는 의료단을 위해 그는 밤에는 의료 관련 책을 집필하고 낮에는 부상병과 마을의 환자를 돌보는 등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한다. 베쑨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군사들은 “백구은(베쑨의 중국식 이름) 동지 만세!”, “우리 뒤에는 백구은이 있다!”고 외치면서 사기를 진작시켜나간다. 베쑨이 조직한 기동 의무대는 최전선을 누비며 헌신적인 의료 활동을 펼쳤다. 그는 20여 곳에 기지병원을 설립하고 의료 체계를 혁신함으로써 모든 중국 민중의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그러던 중 수술 도중 감염에 의한 패혈증으로 베쑨은 1939년 11월 13일 사망한다. 그가 남긴 <부상>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부상병의 몸의 일부를 잘라내야 하는 의사로서의 고통과 그들이 불구로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 있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베쑨의 명성은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그를 추모하기 위해 사람들은 그가 묻혀 있는 중국의 석가장으로 몰려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