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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문
01. 명동 거리 - 1969년 10월 서울 명동은 꽃 피는 봄날처럼 향기롭고 눈부셨다 02. 클럽 왕실 - 모델이란 직업으로 먹고살기는 어렵겠지만 머잖아 좋은 날이 올 겁니다 03. 이용화양복점 - 많은 양복점들이 현금을 긁어모았고 내게는 명동의 양복점 사장이 어느 은행장 부럽지 않아 보였다 04. 한국 양복업계 - 분명 원단 제조사의 잘못인데도 모든 책임을 양복점이 고스란히 져야만 했다. 그게 당시의 관례였다 05. 초년고생 - 이 무렵 나의 단골집은 삼각동 수제비 집이었다. 50환짜리 수제비 한 끼로 하루를 버텼고 그렇게 한 달을 보냈다 06. 양복점 개업 - 찰스 김 테일러를 기반으로 하여 5년 후인 1975년까지 자수성가하겠다는 각오로 전화번호도 1975번으로 정했다 07. 찰스 김 테일러 - 당시 양복 한 벌 가격은 2만 원 내외로 웬만한 회사원 한 달 봉급에 맞먹는 적잖은 금액이었다 08. 새마을운동 - 〈새마을노래〉가 온 나라에 울려 퍼지던 이때, 섬유업계의 호황은 복장계에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09. 《복장계》 - 대부분의 수입을 숨 돌릴 틈 없이 《복장계》 만드는 일에 쏟아 부었다.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는다는 게 어떤 건지 실감이 갔다 10. 검열 - 당장 배포된 잡지들을 몽땅 거둬들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였다. 이미 1000여 권 이상이 시중 양복점과 업체 등에 풀려 나간 상태였다 11. 자금난 - 사채를 끌어다가 원단을 사서 6개월 할부로 맞춤 양복을 팔고 할부 대금을 깔아놓은 상태라서 현금은 늘 모자랐다 12. 시대의 악몽 - 세상이란 게 나 혼자만 떳떳하다고 내 편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는 것도 당시에는 몰랐다 13. 구치소 생활 - 6개월 만에 구치소를 나와보니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내가 살던 세상은 없었다 14. 무대의상 제작 - 이 나라 연극사 이래 가장 큰 극장, 가장 큰 무대에서 가장 많은 물량과 인원의 투입으로 만들어진 엄청난 모험이 심판대에 올랐다 15. 마지막 대형 무대 - 마치 등대 없는 암흑 속 항해처럼 느껴지던 첫 공연이 성황리에 끝났다 저자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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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성 패션모델 1세대의 산파’ 김광수
복장의 역사를 통해 본 한국 1960~1970년대의 풍속사 한국 최초로 런웨이를 걷었다 “1960년대 후반 얼떨결에 남성복 모델이 되면서 패션계에 발을 내디딘 남자의 이야기로 그 당시 남성 패션의 풍속도를 보여준다.” --- 2009 〈조선일보 논픽션 대상〉 심사위원회 패션은 인간 내면의 다른 이름이었다. 구한말 김옥균을 위시한 개화파 세력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세상을 바꾸려 하기 전에 자신들의 낡은 저고리부터 벗고 양복으로 갈아입었듯이, 패션은 세계관과 뜨거운 사상의 표출이었다. 한국 복장계 역사의 새로운 전기마다 풍속과 사회 전반의 변화가 동반되었다. ◎ 한국 최초의 남성 패션모델 - 국내 최초의 패션쇼는 여성복 패션쇼로서, 1956년 10월에 디자이너 노라노의 패션쇼가 당시 최고의 건물이었던 반도 호텔(현재의 롯데 호텔) 다이너스티 룸에서 열렸다. 이 당시 무대에 섰던 모델은 배우, 가수, 무용수 같은 연예인과 일반 고객이었다. 모델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다. -남성 모델의 출현은 양복점에서 시작된다. 당시 양복점에는 직접 입고 판매 촉진 역할을 하는 직원이 있었다. 이들은 월급을 받으며 고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옷을 직접 입었고, 고객들에게 옷을 잘 입는 방법을 소개해주는 일을 했다. 신장이 175~180cm정도로 크고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들인 이들은 모델 겸 샵마스터(shop master) 역할을 동시에 했던 것이다. 이들이 우리나라 남성 모델의 시초이며 패션쇼 무대에 오른 1세대 패션모델이다. - 국내 최초로 전문 모델이 등장한 남성복 패션쇼는 1969년 10월에 시민회관(현재의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주문양복연맹총회’의 패션쇼다. 아시아 지역의 총 8개국에서 참가한 이 패션쇼는 각 나라를 대표하는 양복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대회였다. 이때 한국 측 모델은 이순신, 이상규, 홍근삼, 김광수 이렇게 네 명이었다. ◎ 한국 최초 모델 에이전시 설립 1) 한국 남성 패션모델 클럽 ‘왕실’ -1969년 11월 1일 김광수, 김사성, 김현동, 도신우, 오상규, 이성호, 이종재 총 7명의 남성 모델이 모인 왕실 모델 클럽은 김광수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모델 활동을 시작했다. 왕실 모델 클럽은 회원 자격이 학사 졸업 이상일 정도로 위상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이후 ‘왕실’은 여성 패션모델까지 받아들여 1973년 총 회원 24명의 ‘코리아 모델 클럽’으로 성장한다. 2) 모델 포트폴리오 최초 제작 -이때 김광수는 코리아 모델 클럽의 회장을 맡아 그들의 사진을 한 페이지에 담아 업체들에게 보냈다. 현재 에이전시에서 사용하는 모델들의 포트폴리오의 시초라 할 수 있다. ◎ 구체적인 자료와 기록을 통한 한국 남성 패션계 이야기 1) 전문 모델이 없던 시절의 한국 패션업계 - 당시 국내 패션쇼는 무대나 연출 등이 세분화되지 않았고, 현재처럼 기획, 연출, 음악, 무대, 조명, 스타일리스트 등의 체계적인 구조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델들이 다양한 역할을 스스로 소화했다. -양복점 주인이 코디네이터의 역할을 했으며, 모델이 직접 메이크업을 했다. 패션쇼를 할 장소가 없어서 반도호텔 꼭대기나 유네스코회관 경양식 집, 건설회관 등에서 했다. 2) 남성 패션모델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인식 - 여성 모델에 비해 남성 모델의 패션쇼는 1년에 열 개도 안 되었기에 패션쇼만으로는 생활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복장계》, 《선데이 서울》, 《의상》, 《멋》 등의 잡지나 의류, 직물 광고를 중심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 당시는 모델이라는 단어가 생소한 시기였고, 남성이 멋을 내는 것을 인색하게 받아들이던 때라 남성 모델에 대한 사회 전반의 평이 부정적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활동하던 남성 패션모델들은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이방인 취급을 당했다. 3) 양복 한 벌 가격이 대기업 사업의 월급과 맞먹던 시절 - 당시 양복 한 벌 가격이 1만 5000원(당시 대기업 초봉이 약 3만 원) 할 때였으므로 양복을 맞춰 입을 형편이 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양복점의 고객은 정치인, 문화인, 재벌 같은 유명 인사들이었다. 양복은 소수의 엘리트 집단만이 즐길 수 있는 특권 중 하나였다. - 모델의 수가 많지 않아 지금과 같이 CF 모델, 패션쇼 모델, 잡지 모델 등의 구분이 없었고, 모든 분야의 활동이 가능하여 활발히 활동을 했던 모델은 대부분 고소득자들이었다. 패션모델이 잡지 촬영을 하거나 패션쇼 무대에 오르면 3~5만 원의 모델료를 받았다. ◎ 한국 복장계의 정론지 《복장계》 창간 1) 월간 《복장계》 창간 -‘왕실’ 모델 클럽의 회장인 김광수는 막연히 다른 업체에서 주는 일만 기다리기보다는 좀 더 적극적인 홍보 및 광고 효과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뢲 1973년 9월에 월간 《복장계》를 창간했다. -《복장계》는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남성 잡지로서 남성의 패션과 문화를 담당하는 오늘날의 《GQ》나 《에스콰이어》 같은 남성 패션 잡지의 역할을 했다. 2) 대통령 의전을 비판하다가 검열에 걸리다 - “문공부였다. 당장 배포된 잡지들을 몽땅 거둬들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였다. 이미 1000여 권 이상이 시중 양복점과 업체 등에 풀려 나간 상태였다. 가슴이 뛰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p.179) - 문제의 기사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가 입은 의상을 비판했다는 사유였다. - 박대통령이 뉴질랜드를 방문했을 때 공항에서 국빈 환영식을 받는 사진과 복장 설명: 수입 원단으로 만든 박 대통령의 모닝코트를 두고 “코루바지 감이 국산이 아직 안 나오는 게 섭섭하기도 하였다”라고 쓴 사진 설명이 문제가 되었다. (p.181) - 우리나라를 방문한 미 상무장관과 악수를 나누는 김종필 총리의 사진과 복장 설명: 누가 보아도 등판이 물에 젖어 우는 것 같이 쭈그러진 총리의 양복이 눈에 띄었다. “김종필 총리의 재킷 등판의 자리 잡음이 아쉬었다.” ◎ 한국 복장계 역사와 변천 과정을 보여준다 1) 양복 역사의 시작: 1883년 갑신정변의 주역들 -“최초로 미국 시찰단으로 나간 보빙사 일행은 난생 처음 마주친 구미의 현란한 문물에 큰 충격을 받는다. 개화의 신념을 확고히 다진 젊은 그들은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양복 차림으로 귀국하는 대범함을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p.75) 2) 1913년 『장한몽』에 나오는 김중배의 복장 -“매일신보에 연재된 조일제의 소설 『장한몽』에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중배가 프록코트에 단장을 짚고 금테 안경에 다이아몬드 반지, 실크 모자, 순록가죽 장갑, 에나멜 구두를 착용했다.” (p.83) 3) 임시사료편찬위원회 1919년 -“임시사료편찬위원회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한국독립운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서구 열강에게 한국의 독립운동 노력을 바르게 이해시키기 위해 설립된 단체. 이들의 복장은 당시의 기본 스타일인 싱글 투버튼, 밝은 색조인 것으로 보아 춘하 절기의 가벼운 의상이며 넓지 않은 타이에 흰색 신발로 멋을 부렸다.” (p.80) 4) 호놀룰루 1920년 이승만과 정한경 -“세루 양복에 조끼를 입고 그 속에 회중시계를 넣은 채 ‘나리가와’라는 양가죽 구두를 신고 지팡이를 든 멋쟁이 신사가 우리나라에도 등장한 것이다.” (p.81) 5) 우리나라 최초의 양복점 -“1889년 일본인이 설립한 ‘하마다양복점’이었다. 이 양복점은 일본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와 일본 공사관 직원들과 당시 주둔하고 있던 일본 군대의 군복을 만들며 유지하다가 1895년 양복이 공인되자 조선 궁중의 양복도 주문받아 납품하였다.” (p.83) 6) 1930년대 -“이 시기에는 방모에 속하는 트위드 천의 양복에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스타킹을 신고 헌팅캡을 눌러 쓴 스타일이 유행하여 윤치호, 서재필 등도 입고 다녔다. 이는 전형적인 영국 스타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이나 외국에 유학하고 돌아온 학생이나 일본 고관들의 복장을 모방하는 이들을 통해 국내에 선보였다.” (p.85) 7) 1940년 전후 -“한복과 양복을 절충하여 바지저고리 위에 오버코트나 망토를 입었으며, 지방에서는 양복지로 만든 두루마기에 흰 동정 대신 비로드나 털을 달아 입기도 했다.” (p.86) 8) 광복 후 -“해외 동포의 귀국으로 양복 유행이 가속화되어 아이비 스타일과 콘티넨털 스타일이 도입되었다. 광복 이후 어깨와 품이 풍성한 미국식 볼드 룩 스타일이 유행하면서 미국에서 들여온 구제품을 그대로 입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p.88) 9) 6.25 이후 -“후반에는 ‘로마에’라 불리던 더블브레스트가 유행하여 가슴 주머니에 포켓치프를 꽂고 색안경과 파이프를 물고 있는 모습이 멋의 전형으로 인식되었다.” (p.91) 10) 1960년대 -“이 시기에 새로 도입된 유럽형 콘티넨털 룩은 어깨가 넓고 그 끝이 내려앉는 드롭트 숄더에 허리는 약간 조이고 가슴과 어깨 부분을 돋보이게 한 실루엣으로 상의의 길이는 짧은 편이고 뒤쪽의 좌우 아래를 튼 옆트기가 많았다.” (p.91) 11) 1970~1980년대 초까지: 맞춤 양복의 최대 호황기 -“칼라가 더 넓어지고 피크트 라펠이 주를 이루었고 바지 길이도 길어졌다. 후반부터는 볼드 룩이 퇴조하고 칼라 폭과 넥타이 폭이 좁아지고 재킷의 길이도 다시 짧아졌다.” (p.92) 12) 1980년대 중반 -“젊은이들이 하나둘 인근 백화점 등에서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기성복을 선호하게 되면서 고객이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p.93) 13) 1990년대 초 -“수입자유화, WTO 체제 출범으로 전 세계 경제 블록이 무너지며 해외 유명 브랜드가 이른바 ‘명품’이라는 미명 아래 대도시 중ㆍ상류층 고객을 타깃으로 국내 주요 상권 및 대형 백화점 매장을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p.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