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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에스키모의 늑대 사냥과 전략형 CEO ‘이병철’
1. 간결하고 냉혹한 인간, 이병철 주름살 많은 얼굴과 바지 끝 / 간결한 말씨, 남성다운 필재 / 강렬한 개성과 냉혹한 성격 Coffee Break ‘작은 일도 완벽을 추구해야 큰 경영자가 될 수 있어’ 2. 하루의 일과와 책읽기 원두커피로 시작하는 하루의 일과 / 책읽기와 ‘사람에 대한 공부’ Coffee Break ‘사람이란 다 다듬기 나름인 거야’ 3. 인간 형성의 뿌리 논어냐, 맹자냐 논어를 지혜의 샘으로 삼았다 / 그러나 호암은 맹자(孟子)형 인간 Coffee Break ‘운명과 용기는 내 평생 실천 덕목’ 4. ‘황제경영’이 내게는 정답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 황제경영을 찾다 / 이유는 없다. 명령은 내가 한 다 / 삼성은 노조 없는 경영한다. Coffee Break ‘황제경영도 황제경영 나름’ 5. 일 년 중 절반을 일본 도쿄에서 머문다. 이런 정보를 얻기 위해 간다. / 도쿄에서의 ‘숙제 메모수첩’ Coffee Break ‘조직은 나무이고 정보는 그 나무를 키우는 영양소’ 6. 호암의 여성 편력과 ‘유리성(城)’ 호암이 쓴 호암자전이 없다 / ‘유리성’의 실제 인물 과연 호암인가 Coffee Break ‘정상에 서려면 더욱 근실할 줄 알아야’ 7. 우여곡절 많았던 ‘삼성전자’의 출범 부정 축재자 1호, “히기 단디이 해라” / 철벽의 금기, 첨단 기술만이 살길이다 / 전자산업만이 우리가 살길이다 Coffee Break ‘삼성전자의 힘은 ‘청취어람(靑取於藍) (而靑於藍)’ 8. 73세의 호암, 반도체에 승부수를 띄우다 8년 분석 끝에 첨단의 ‘메모리사업’을 선택하다 / 드디어 ‘동경 선언’을 내놓고 / 우리 속담에서 찾아낸 아이디어 Coffee Break ‘삼성의 미래 성장 동력 찾아주고 싶었다.’ 9. 세 아들 가운데 ‘이건희’를 후계자로 삼은 까닭은 창업과 수성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 삼성이라는 창조적 경영체를 상속시키려고 / 이맹희, 이창희, 이건희는 이렇게 달랐다 Coffee Break ‘불씨마저 꺼야 공평한 상속이다’ 10. 57전 44승11무2패, 호암의 성공과 실패 승률 96%의 ‘사업의 귀재’ / 11무승부 속에 30년 술장사도 있었네 / 뼈아픈 2패의 기록, 토지 사업과 한국비료 / 호암이 끝내 외면한 사업, 그리고 미완의 사업 Coffee Break ‘적이 많아지면 질수록 더 강해질 줄 알아야 한다.’ 11. 호암의 마지막 나날, 최후의 순간 소화 기능이 나빴던 호암의 건강 비결 / 마침내 위암 수술을 받다 / 마지막 나날, 최후의 순간 12. 호암 이별철, 고연 어떻게 볼 것인가 CEO 이병철의 경영어록 CEO 이병철의 연보 이 책을 내면서 참고한 문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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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 창업자 호암 이병철 탄생 100주년 기념!
지구촌 정복에 나선‘한국적 신경영의 전략형’ CEO! 자기 긍정과 성취열정 이병철 회장 야성적 DNA와의 대화! 백의민족 한국인들에게 '파란자신감'으로 갈아입혀 지구촌 정복에 나선'한국적 신경영의 전략형' CEO! 일본의 3 대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내셔널 그룹의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 혼다자동차의 창업주 혼다 소이치로, 소니의 창업주 이부카 마사루가 그들이다. 이 셋을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 사람이 바로 이병철이라는 사람이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기업가라고 말하고 싶다. 얼마 전 한 설문 조사에서 오피니언 리더들이 뽑은 역대 및 현역 CEO 가운데 한국 기업에 필요한 ‘21세기 형 CEO상’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 1위에 삼성 그룹의 창업주 고(故) 이병철 회장을 선정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이러한 얘기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1980년대 이후 삼성과 현대와 같은 글로벌 기업이 전연 나오지 않고 있다라는 것이다. 물론 뒤늦은 감이 없지는 않으나, 최근 들어 경제학자 슘 페터의 ‘경제 발전의 이론’을 이론적 바탕으로 하는 기업가사학(企業家史學)에 대한 중요도가 점차 높아지면서, 국내 대학에서도 삼성의 이병철과 현대의 정주영 같은 기업가에 대한 관심이 새삼 높아지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 실례로 얼마 전부터 중앙대학교 유한공전 등에 삼성의 창업주인 ‘이병철학’이, 그리고 숭실대학교 울산대학교 관동대학교 등에 현대의 창업주인 ‘정주영학’ 강좌가 각기 개설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책은 삼성 그룹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의 철저한 인물 분석을 통하여 그의 경영력의 숨은 비밀을 본격적으로 파헤쳐본 것이다. 그만의 고집스런 헤어스타일에서부터 독특한 옷차림은 물론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 일수불퇴의 괴팍한 성격까지 낱낱이, 그리고 마치 시계 바늘처럼 정확했던 그의 하루 일과며 책 읽기 방법, ‘경영은 곧 정보다’라고 말했을 만큼 정보력을 중요시했던 그의 메모수첩 공개에서부터 여성 편력과 더불어 끊임없는 정치권력과의 악연, 그로 말미암아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직 첨단 산업 뿐이다’는 ‘철벽의 금기’를 갖게 되기까지의 과정, 그리하여 73세의 노구를 이끌며 반도체에 마지막 집념을 불사르기까지. 또한 지금까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아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호암의 후계 구도를 둘러싼 세 아들에 대한 절묘한 경영 상속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끝내는 78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할 때까지의 통산 57전 44승11무2패의 성공과 실패에 따른 경영 실적이며, 미완의 사업에 이르기까지를 샅샅이 분석해 보인다. 그런가 하면 장마다 그 끄트머리의 ‘Coffee Break’에서 호암과의 가상 인터뷰를 통하여 본문에서 미처 다 거론치 못한, 운명론자이면서 엄숙주의자 이었으며 또한 노장적(老莊的) 고독주의자이면서 철저한 플래너(Planner)였던 호암의 내면세계까지 직접 전해 듣는 치밀함마저 보여준다. 따라서 수많은 기업의 부침이 무상하기만한 우리나라 재계에서 과연 어떻게 반세기를 넘어 정상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는지, 그 어떤 시련과 역경에도 결코 굽힐 줄 몰랐던 그의 뿌리 깊은 내적 규범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그리고 마침내는 첨단산업에 도전하여 민족 자립 경제의 주춧돌을 세워 오늘날의 글로벌 삼성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는지, 포장되지 않은 호암의 심층 인간 탐구를 통하여 이른바 ‘신경영’으로 일컬어지는 그의 숨은 경영력을 낱낱이 들여다본다. 그리하여 변화와 위기에 대한 탁월한 판단과 대처 능력, 내일을 개척하는 혜안과 불퇴전의 리더십을 보여준 호암의 경영력 이야말로 오늘날에도 기업 의 고민과 성취에 여전히 맞닿아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인생을 살아가는 한발 앞서 있는 지혜임을 흥미롭게 펼쳐 보이고 있다. 저자는 호암 이병철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우리나라 경제에 근대적 의미의 기업가들이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 아래에서였다. 엄격한 유교적 신분 질서 속에서 그동안 미천한 업으로만 분류되어 오던 상업과 공업 분야에서 새로운 종사자들이 나타나 산업자본을 형성하면서 기업가 집단으로 사회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저마다 쌀장사, 포목점, 방직, 무역 등으로 시작하여 기반을 닦았고, 해방 이후 사회적 혼란기와 6.25 한국전쟁이라는 거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우리나라 경제의 산 역사이자 곧 증인들이었다. 호암 이병철(1010-1987)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시대를 격렬하게 살아나온 우리나라 대표적인 기업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한데 우리는 이런 호암을 떠올릴 적마다 곧잘 한 가지 깊은 의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가 그러한 시대를 과연 어떻게 헤치고 나왔는지, 숱한 외압과 시련에도 굽힐 줄 몰랐던 그의 뿌리 깊은 내적 규범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다수의 사람을 만나기보다 소수의 사람을 깊이 알기 위해 노력했던, 그 가운데서도 정예만을 모아 조직화하고 조율해 나감으로써 수많은 기업의 부침이 무상하기만 했던 우리나라 재계에서 어떻게 반세기에 걸쳐 정상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는지, 그리고 마침내는 첨단산업에 도전하여 민족 자립 경제의 주춧돌을 세워 오늘날의 글로벌 삼성 제국과 같은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앞에서 이미 두루 살펴본 바와 같이, 호암이 일제 강점기에 도정 사업을 처음 시작하였을 때만 하여도, 그의 존재는 보잘 것 없는 피라미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시기라면 서울에선 토종의 재력가 말고도 일제의 막대한 자본까지 밀고 들어와 이미 고래 같은 굵직굵직한 사업체가 수두룩했다. 종로 거리에는 벌써 현대식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까지 갖춘, 호암의 자본금보다 무려 2백배 이상이나 되는 화신백화점을 비롯하여 미쯔코시(三月)백화점, 미나카이(三中井)백화점, 히로다(平田)백화점, 조지야(丁子屋)백화점이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북촌과 남촌에 걸쳐 들어서 있었는가 하면, 각종 은행이며 증권회사, 호텔, 대규모 방직공장이며, 맥주공장, 화학공장 따위가 마포와 용산의 벌판에 빼곡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호암은 이제 겨우 남쪽 바다가 시퍼렇게 넘실대는 지방의 작은 항구 도시에서 정미 사업을 이제 막 벌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닌 세 사람이서 공동으로 투자한 동업으로였다. 말하자면 그 또한 맨 처음 재계에 뛰어든 같은 시대의 여느 기업인들과 형편이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는 얘기다. 호암 역시 처음부터 서울의 유수 기업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처음으로 재계에 뛰어든 같은 시대의 여느 기업인들과 거의 같은 조건 아래에서 시작하였음에도, 195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이미 뚜렷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대구의 조선양조와 삼성물산을 비롯하여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을 잇달아 창업하면서 마침내 우리나라 재계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1987년 겨울 78세를 일기로 타계할 때까지 줄곧 그 자리를 놓쳐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정상의 CEO를 자랑했었다. 그는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자신의 삼성 제국을 창업하고 또한 맨 앞장서 이끌고 나면서 어떤 누구의 뒤도 따르려하지 않았다. 닮으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취약점으로 인식되어온 자신의 냉혹함마저도 애써 고치려 들지 않았다. 오로지 타고난 자신만의 본태, 그만의 이상과 동력으로 제국의 길을 탄탄대로로 열어나갔다. 따라서 그에게 따로 스승이 있을 리 만무했다.‘움직이는 계산기’로 불리는 맥나마라 세계은행 총재, 박력이 있고 건실한 동경지포전기(東京芝浦電氣)의 도꼬(土光) 사장, 그리고 자신감을 가지고 매사를 처리하는 삼정물산(三井物産)의 미즈까미(水上) 사장을 존경한다고 밝혔으나, 하지만 이것도 그의 나이 이순(耳順)에 이를 무렵인 훗날의 얘기일 따름이다. 대신 호암은 운명론을 들고 있다. 재물이나 지위는 마음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운명적으로 정해진다는 것이다. 운명적이라고 해도 그냥 정해진다기보다는 하늘의 도리랄지 우주의 섭리에 순응해서 정해지는 것이라는 관념이다. 옛날의 천자나 제왕들이 무력을 앞세워 패권을 장악하고도 스스로 그가 행사하는 권력은 하늘의 명을 받아, 또한 하늘의 도리에 따라 행사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과 같은 이치다. 여기에 덧붙여 호암이 즐겨 강조하는 말이 있다. 사람이 능력 하나만으로 성공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운(運)을 잘 타고 나야 할 뿐더러, 또한 때와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는 뜻이다. 하긴 운이란 건 그렇게 자주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오죽하면 운을 기다리는 것은 곧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도 같다고 말하고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애 가운데 일대 전기가 될 수 있는 어떤 운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아마 일생에 고작 한두 번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운을 놓치지 않고 운을 잘 타고 나가려면 역시 운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일종의 둔(鈍)한 맛이 있어야 하고, 운이 트일 때까지 버티어 나가는 끈기(根)라고 할지, 아무렇든 그러한 굳은 신념이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 호암의 생각이다. 둔과 근이 따르지 않을 때는 제아무리 좋은 운이라 할지라도 그만 놓치고 말기가 일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호암의 운명론에는 두 개의 뚜렷한 경향이 상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하늘이 주는 것으로 알고 받아들여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 순응하고 복종함으로써 무욕과 무탐에 침잠하는 것 같은 자세가 그 하나라면, 또 다른 하나는 주어진 운명의 명령에 순응하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창조하고 개척하며 부단히 노력할 뿐만 아니라 고난과 역경에 직면해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고 전진하는 용기 있는 자세가 그것이다. 물론 그가 일본통이었다는 것도 호암을 설명하는데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점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다지만 그가 만일, 만일에 하나 당대의 지식인들을 따라 일본이 아닌 중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호암이 일본이 아닌 중국에 더 애정이 많았다고 한다라면, 그리하여 일본의 와세다(早稻田)대학 전문부 정경과가 아닌 중국의 베이징(北京)대 학 전문부 정경과라도 입학하게 되었더라면 호암은 물론 오늘날 삼성의 운명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호암이 신규 사업을 벌일 적마다 아이디어는 말할 것도 없고, 기술이며 설비 대부분을 일본에서 들여온 것으로 미뤄볼 때 그럴 개연성은 더욱더 높아 보인다. 믿거나 말거나 말이다. 부유한 집안의 배경도 호암을 설명하는데 있어 빠질 수 없는 점이 되고 있다. 수많은 유산을 물려받아서라기보다는(호암은 선친으로부터 먹고 살기에는 넉넉하나, 그렇다고 사업 자금으로 쓰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유산을 물려받았을 뿐이다), 곧 그러한 집안의 환경이 자신의 경영철학을 형성하는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재계에 처음 투신하였을 무렵 같은 시대의 기업가들, 예컨대 현대의 정주영 회장, 금호아시아나의 박인천 회장, 기아자동차의 김철호 회장, 아남그룹의 김향수 회장, 동양그룹의 이양구 회장, 대림산업의 이재준 회장, 종근당의 이종근 회장 등 거의 대부분이랄 수 있는 기업가들이 전통적인 자본 축적의 방식, 마치 개미와도 같이 부단하게 티끌을 끌어 모아 태산을 이루어간 데 반해, 호암은 전혀 다른 방식을 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천 석지기 대지주 집안의 막내아들답게 처음부터 맹수가 되어 일거에 큰 먹잇감을 덜컥 사냥하고 마는, 호암 특유의 사업 특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근한 예로 호암의 사업 초기랄 수 있는, 1958년에 시작하여 1965년부터 건설에 들어간 ‘한국비료’만 놓고 보더라도 그러하다. 물론 대구의 조선양조를 비롯하여 삼성물산,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을 잇달아 설립하면서 호암의 존재가 널리 부각된 시기라고는 하나, ‘한국비료’는 당시 우리 경제의 크기로 볼 때 누가 보더라도 분명 상상 이상의 규모였다. 당시 1백만 달러면 지금 돈 500억 원 정도 되던 시절에 자그마치 4천6백만 달러에 달하는 건설비용은 독일에서 차관으로 끌어온 것이라고 손쳐도, 그렇게 건설될 시설은 연산 요소 비료 33만 톤의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비료 공장이었다. 말하자면 같은 시대 재계에 뛰어들었던 여느 기업가들과는 달리 보통 통()이 큰 게 아니었다는 얘기다. 더욱이 그러한 방식이나 문법이 곧 기업 경영의 요체라고 호암은 이해하고 있었다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이나 문법이야말로 오늘날의 글로벌 삼성 제국을 구축하는데 있어 중요한 동력이 되었을 것이라는데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는 것이다. 이쯤 되고 보면 그의 성격 또한 그냥 넘어갈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이미 앞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차갑다, 매섭다, 냉정하다, 냉혹하다, 사정없다, 엄격하다, 까다롭다, 예리하다, 날카롭다…. 뭐, 이와 비슷한 단어들 을 국어사전에 있는 대로 죄다 나열하고 보면 그의 강렬한 개성과 냉혹한 성격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보았을 때 그는 결코 좋은 사람은 아니었던 듯싶다. 호암은 이와 같이 일수불퇴의 괴팍한 성격에다, 또한 머리끝에서부터 바지 자락 끝부분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군데 흐트러짐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깐깐해 보이기까지 한 자신의 외모와도 같이 치밀하고 완벽한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서울 태평로 2가 삼성 본관 옆의 삼성생명과 중앙일보 사옥을 지어 올릴 때 외벽 대리석의 색상을 직접 손수 고르는가 하면, 대리석 칸과 칸 사이의 간격을 몇 mm로 할 것인가까지 일일이 지정해 줄 정도였던 것이다. 유난스러운 그의 일류 고집 또한 반드시 짚고 가야할 대목이다.“계절마다 양복을 새로 지어 입으시는데, 그 때마다 담당 재단사를 외국에 보내 연수를 시킨 다음 옷을 짓도록 하시지요. 그렇게 해서 양복이 완성된 후에도 조금이라도 짧거나 길거나 하면 대수리가 시작됩니다. 단추 하나, 옷 안의 천 빛깔까지도 일일이 지적해서 만들도록 하십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면(四面) 어느 쪽에서도 보더라도 완벽하게 몸에 딱 맞고 단정하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양복 뿐 만이 아니었다. 신발에서부터 셔츠, 넥타이, 가방, 심지어는 식빵에 이르기까지 호암의 일류 고집은 유난스럽기까지조차 한 것이었다. 물론 이 같은 생활 태도는 그의 경영철학과도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호암이 늘 찾는‘세계 제일의 상품’은‘가장 좋은 것’을 선호하는 그의 성격 탓도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세계 제일의 상품’을 사용해 봄으로써‘무엇이, 어떻게, 왜’좋은가를 스스로 느끼고 ‘그것에 못지않은’‘그것보다 더 좋은’우리의 물건을 만들어 내려는 숨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류 고집과 더불어 그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정치적 배신 또는 시련을 겪어야 했던 경험 또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그러한 배신 또는 시련으로 말미암아 급기야 ‘삼성은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는 ‘철벽의 금기’를 낳기에 이르렀고, 또 그러한 ‘철벽의 금기’는 곧 ‘기술만이 살 길이다’라는 명제를 누구보다 먼저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을 통하여 결과적으로는 그의 삼성 제국이 1등주의를 누구보다 먼저 육화시킬 수 있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다음으로는 호암의 침착함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섬뜩하리만치 냉혹한 인간이었던 반면 또한 태산처럼이나 침착한 CEO였음에 분명하다. 마치 삼국지의 적벽대전이나 오장원에서 오(吳)나라의 대군을 맞아 최후의 결전에 나서는 제갈공명만큼이나 침착한 CEO였다는 것이다. 그 일례로 삼성의 ‘사업성 검토 지침’을 꼽을 수 있다. 신규 사업이든 기존 사업의 확대든 모든 중요 사업이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 별 검토 내용 및 기준이 집약된 지침이 그것인데, 검토 대상으로 큰 항목 20개와 세부 항목 90개가 포함된 포괄적이고 세밀한 내부 업무 지침이다. 하나의 사업 추진에 앞서 조사하고 따져보아야 할 사항이 무려 90가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사업성 검토 지침이야말로 호암의 기업 경영 50년에 걸쳐 삼성에 축적 된 귀한 노하우 가운데 하나지요. 단지 얼마를 만들어 얼마의 이익을 내는 가를 살펴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업의 목적부터 시작해서 사업 환경, 요 소 별 추진 방법, 조직화, 성과에 이르기까지 제반 사항이 검토됩니다. 호암 의 사업 검토 방식을 실무적인 면까지 포함시켜 정형화했다고나 할까요. 생 전에 호암이 사업을 검토할 때 하나하나 따져나가던 그 엄격한 모습이 선합니다.” 호암을 일컬어 어찌 침착하다고 말하는지, 어찌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나서 건너가는 사람을 확인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건넌다고 회자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하지만 호암은 가을 고목처럼 언제나 고독하게 살아야만 했던 것 같다. 그가 이따금 즐겨보았다는 프로권투 중계방송만 해도 그러하다. 결과가 KO로 끝나야 만이 통쾌했노라고 고백할 수 있을 정도로 호암은 승부사로써의 기 질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달리말해 심심풀이 삼아 찾아본 권투 경기 하나에서조차 두루 뭉실하게 쉽사리 만날 수 없었던 깊은 고독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 또한 그러한 고독을 애써 숨기지 않았다. 호암은 집에서나 집무실에서 혼자서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이 적지 않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또 그럴 때면 곧잘 도자기나 불상 앞에 정좌하여 한껏 사색의 날개를 펴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호암의 이런 노장적(老莊的) 고독은 자의적인 강제가 더 강한 편이다. 예컨대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성(城) 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그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그 누구에게도 열어 보이려 하거나 속사정을 털어놓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굳이 이런 호암과 유사한 인물을 역사 속에서 찾는다면 우선 이런 인물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삼국지에 등장하고 있는 제갈공명과 함께 조선왕국을 창건했던 태조 이성계가 바로 그들이다. 아니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제갈공명과 태조 이성계를 합쳐놓은 그 중간쯤의 인물이 다름 아닌 호암과 유사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호암은 정작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게 또한 나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가 거인처럼 더 커 보이는 것이며, 그가 떠난 지 스무 해가 지나간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인 것이다. 아무렇든 호암은 냉혹함과 침착함, 완벽주의와 제일정신, 그리고 작은 일에도 신경을 깊이 씀으로써 큰일을 도모한다는 엄숙주의자였음에 틀림이 없다. 또한 끝으로 호암은 인간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꿰뚫어 본, 매우 성숙한 기업가 였다라는 점이다. 어떤 기업가는 불굴의 개척정신을 말한다. 또 어떤 기업가는 상생의 인화경영을 말한다. 또한 어떤 기업가는 공존의 합리경영을 목숨처럼 추구해 왔노라고 말하고 있다. 한데 호암은 이 모두를 아우르면서 시대의 불투명함까지도 품을 줄 알았던, 기업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퍽이나 성숙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성숙함으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경영이라는 거대한 에너지를 만들어내어, 우리 현대사쟀 심장부를 어기차게 관통하면서, ‘삼성’이라는 기업 활동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가능성을 폭발시킨 ‘가장 성숙한 CEO’, ‘가장 성숙한 리더’였다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호암 이병철 회장이 걸출한 사업가였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이들이 알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치밀한 판단력과 혜안으로 삼성이라는 대그룹을 일구었으며, 오늘날 삼성이 한국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놓았다. -정주영 세상 사람들은 흔히 경영을 간단히 말하자면 돈벌이로 생각한다. 호암 선생도 물론 그런 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호암은 물질에 대한 욕망을 이미 뛰어넘은 대단한 사업가였다. 나는 사업가에도 일류와 이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류 사업가가 되자면 사적인 탐욕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호암은 일류 사업가였다. -(워싱턴 포스트) 캐서린 그레이엄 명예회장 호암 선생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은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안색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호암 선생에게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는데, 호암 선생 역시 자신의 시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연한 모습이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평생 해왔던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참 아름다웠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대가의 자세가 아닌가 잠시 숙연해졌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진짜 경영자라면 호암선생처럼 최후의 순간까지, 경영 일선에서 자신의 마지막 생명까지 불태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했었다. -제너럴 일렉트릭 잭 웰치 회장 |